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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평점 :
20년이 지나도 상처는 핏빛으로 남아.
상처는 어떻게 세월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하는가.
상처는 사람의 몸속에 칼을 박아 넣고 있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숨겨질 뿐이다.
이 책은 사람이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줄 경우, 상처는 살아남기 위해 그 사람을 숙주 삼아 평생 동안 그를 휘감아 꼼짝 못하도록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처는 결코 저절로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존재가 아님을,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이제 10년이 지났으니 다 잊었을 거야.
20년이나 지났는데 옛날 일 가지고 뭘 그래.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손 잡아주는 한 명의 친구도 없이, 도와주는 선생님도 없이 홀로 맞서야 했던 집단왕따와 집단폭력의 잔인함. 그 잔인함의 영속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두려움입니다.
20년이라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지나도, 피해자들은 폭력을 당하던 20년 전의 그 때의 나이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에 붙들린 것처럼 단단히 들러붙어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를 때리던 아이들이 몇 명인지, 그 얘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벽에 등을 붙이고 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키던 그때의 감정은 도저히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10년이 넘도록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왔는데 (243)
2019년 유튜브에 <왕따였던 어른들>이라는 제목으로 10여분 가량의 동영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100만의 조회수를 넘기며 만 개 이상의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나도 그러했노라고, 나도 아팠노라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당신은 소중한 존재라고, 용기내 준 당신 덕분에 내가 힘을 얻었노라고,
그러나 댓글 가운데에는 성인이 다 된 지금까지도 대인기피증에 사회생활을 힘들어하는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얼굴을 공개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낸 그녀는 가면을 쓰고서 영상 출연에 동참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20년, 30년 가슴에 묻어 두었던, 가족들도 이 정도일 줄 까맣게 몰랐던 그때의 나와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피해자에게, 서로의 동지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으로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해자들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으로, 정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포장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울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누구는 경찰이 됐고, 누구는 소방관이 됐고, 이런 얘기를 들으면 진짜 너무 화가 나요. 화나서 잠도 안 왔어요. ‘네가? 그랬던 네가? 경찰서에 잡혀 가야 하는 사람인 네가… 사람 목숨 하나 죽일 뻔했던 네가?’ 이런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울먹이며) 가해자는, 누군가에게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겠지만 나한테는 정말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었으니까요. (51)
저에게도 학창시절에 책에 소개된 최고령자 ‘권배’님과 비슷한 경험이 중학교 1학년 때 있었습니다. 반장보다 선생님보다 더 힘이 막강했던 그 친구, (아, ‘그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는 아무것도 모르는 반 친구들을 때리고 자기 기준으로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를 갈라세웠습니다. 반 전체를 공포로 몰아갔습니다. 쉬는 시간은 숨도 쉬지 못하는 공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부당한 일이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후폭풍이 너무 눈에 선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서웠습니다.
책에서 성호라는 친구는 선생님에게 얘기를 해 봤지만, 선생님은 친구의 고통을 업무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서류 1장짜리 업무, 처리해야 하는 일의 증가일 뿐이었습니다.
저도 선생님에게 얘기해 본 적이 있어요. 얘기했다가 조사하는 데만 3달이 걸렸어요. 그리고 그 3달 동안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학교에 소문만 퍼졌어요. “얘가 신고했다. 찌질하게.” “남자끼리 싸운 건데, 장난친 건데, 얘는 그걸 못 버티고 찌질하게 신고했다.” 결정적으로 선생님들은 제 고통을 업무적인 면으로만 봐요. 저의 고통, 내가 느끼는, 너무 힘들고 살기 싫고 이런 걸 그냥 서류 1장으로 봐요. (179)
바뀐 건 없습니다. 세상은 예전처럼 흘러갈 것입니다. 너무 큰 기대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강물 밑바닥에서는 뭔가 다른 물결의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숨어 있던 많은 피해자들의 영혼이 서로의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고, 방관자였던 나와 우리들이 방관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격려자, 손을 내미는 자, 말리는 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용기와 격려는 나비의 날개짓을 능가하는 파동으로 거세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용기를 낸 영상들은 짧게 편집된 것들이었습니다. 이번 책 『나의 가해자들에게』는 실제 인터뷰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의 대화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실려 있습니다.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유가족들의 음성을 담았던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와 『금요일엔 돌아오렴 이후 가장 가슴 아프게 읽은 책입니다.
그러나 밝습니다. 절망을 노래한 책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한 책이라는 걸 압니다. 주저 앉으려는 책이 아니라 일어서려는 책임을. 그들이 뱉어낸 아픔의 기억들이 나를 붙잡아 줄 용기의 단어들임을. 우리들도 그러함을. 왕따와 학교폭력에서 버텨내고 살아준 생존자들을 꼭 껴안아주고 싶습니다. 죽지 말고 꼭 살아내라고. 아름답게 이겨내라고.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s/photos/hugging FREE PICTURE)
영상을 모두 마치고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그들은 조금 더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피해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가해자였음을. 어른이라는 권위로, 경험자라는 권위로, 남자라는 권위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 섬세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나에겐 가벼운 행위일 수 있지만 당신에겐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겐 장난처럼 여겨지는 일이지만 나에겐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어요. 최대한 할 수 있는 선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며 점차 달라져 가는 제 모습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어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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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xZOWHl1L1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