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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작은 가게 이야기 -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
정나영 지음 / 미래의창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정나영의 [오래된 작은 가게 이야기]
제3공간에 대한 체험적 에세이
학자와 생활인의 경계에서 경험한 ‘좋은 가게’
네이버의 책에서 검색하면 이 책은 ‘경제/경영’ 파트의 ‘창업/장사’ 관련 서적으로 분류됩니다. 예스24 인터넷 서점은 ‘경제/경영’ 대분류는 동일하지만 소분류는 ‘기업/경영자스토리’로 결을 조금 달리하죠. 하지만 직접 책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네이버의 책 분류보다는 예스24의 분류가 조금 더 가까워보입니다. 하지만 둘 다 아닙니다. 책을 다 읽은 제가 분류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하나의 주제를 갖는 에세이입니다. 미국 생활에서 경험한 오랜 가게들에 대한 단상에 대한 글 모음이죠. 이 책은 결코 경영서적이나 창업서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분류하기엔 너무 따뜻한 이야기가 가득하답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경제나 경영을 다루는 책들이 차갑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에세이라는 장르와 경영이라는 장르를 비교해 보면 둘 간의 온도는 쉽게 수긍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는 얘깁니다. 이 책은 창업 관련 책도 아니고, 경영자의 속내를 펼쳐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저자는 학자입니다. 소매업과 상품기획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그 공부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생활했습니다.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까지 해가며 생활해야 했으니 그 마음과 육체가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안 봐도 상상이 됩니다.
얼마 전에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펴낸 『제3의 장소』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었었죠. 그 책을 읽고 나서, 아, 우리 동네에도 그런 지역 주민들이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제3의 장소가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래된 작은 가게 이야기』 책을 잡으면서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책 표지도 그렇고, 어딘가 이 가게들 중에 “제3의 장소”가 있을 것 같아, 하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요.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는 제일 첫 번째 소제목으로 “제3의 장소를 찾아서”라고 적어 놓지 않았겠습니까. 그녀는 미국 워싱턴 주의 엘렌스버그라는 시골도시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교수로서의 첫 직업을 가집니다. 미국 북서쪽에 위치해 6개월이나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칼디스’라는 작은 까페에서 찾게 됩니다. 스타벅스가 아니라 동네의 작은 까페였었죠. 그리고 그녀는 ‘칼디스’가 자신에게 “제3의 장소”였다고 선언을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도 그 책을 읽었어요. 그래서 “제3의 장소” 개념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 간략하게 설명까지 달아 놓았답니다.)
그녀는 거의 매일 칼디스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사람이 북적일 때도 다른 커피숍에 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강의를 마치고 무거운 노트북을 배낭에 넣고 10분을 걸어 커피숍에 도착한 저자는 혼자 조용히 사색하며 일을 했고, 휴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아이들은 칼디스를 제 집처럼 더 편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집보다 더 편하게 생각하는 장소로 만들었을까요? 이 책은 그녀가 손님으로 직접 체험한 경험과 소매점과 상품기획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의 이론과 분석을 겸한 독특한 책입니다. 학자로서의 분석글도 조금 포함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개인적인 체험글이 훨씬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매일 카푸치노를 마셨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녀의 모든 생활습관을 알 것처럼, 그녀는 자신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칼디스의 분위기가 좋았다. 커피를 한 잔하며 두어 시간 동안 오후 일과를 칼디스에서 처리하는 것은 내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직원들과 환한 미소를 주고받는 것이 좋았다. 나는 늘 그곳에서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계산대에 선 그들은 늘 내 이름을 부르며 반겼다. 그들은 나를 알고 나 또한 그들이 친근했다. (032)
너무 힘들 때 베트남 쌀국수집 할머니에게서 받은 국물보다 더 뜨거운 사랑의 국물 이야기. 크리스마스 때 직원들이 손으로 정성들여 쓴 카드를 받은 이야기(심지어 그녀의 이름을 한글로도 적었다고) 주소를 들고도 입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꽁꽁 숨어 있는 무간판 케잌 가게의 문전성시(한 번 맛을 본 이후에는 반드시 그 케잌점에서 사게 된다는), 자유롭게 들어가 그림을 그리다 나올 수 있는 ‘더 캔바스’ 가게, 페이스북 친구(단골)에게 피자가 나오는 시간을 알려주는 피자가게, 시낭송회를 하는 동네 작은 서점 이야기.
이 책은 수많은 가게들이 지역 공동체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관계를 형성하며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넘어서, 사랑과 관심의 공동체로 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표지처럼 따뜻한 그림이 군데군데 맛난 케잌처럼 독자를 맞이합니다. 그러니 제가 경영서적이 아니라고, 에세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지요.
이들 가게가 저자에게 특별했던 건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직원과 손님이 제3자로 돈을 주고 받는 거래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가지는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안색이 안 좋으면 건강이 걱정되고, 아이가 보이지 않으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마주칠 때 우리는 작건 크건, 잠깐이건 오랫동안이건 그와의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누구나 그가 혹은 그녀가 나를 알아봐주기를, 그리고 나를 친근하게 느끼기를 바라게 된다.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나를 보면 반가워해주는 것. 이는 언제나 매혹적인 일이다. (043)
그러나 아쉬운 것은 우리 동네를 둘러봐도, 지금껏 내가 살아온 생활환경을 돌아다봐도 저자가 미국에서, 작은 동네에서 행복하게 경험한 오래된 작은 가게처럼, 나를 알아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카드를 주고 사랑을 주는 그런 가게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그런 가게를 발견하지 못했고 관계를 맺지도 못했습니다.
저마다 외로운 섬인 우리들은 집과 회사가 아닌, 또 다른 영혼의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가게들은 너무 쉽게 문을 열고, 너무 쉽게 문을 닫습니다. 동네 터줏대감이 되어 오랫동안 지긋하게 손님들의 이름을 알고 부르며 안부를 물어주는, 그러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는, 그런 가게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가게를 연다면, 그런 가게를 꿈꿔보시지 않겠어요?
손님으로 만족한다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런 가게를 찾아보자구요. 어딘가에는 잊지 않을까요? 미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우리나라인데 말입니다.
그보다 먼저,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가슴이 따뜻해지니까요. 책은 아직 제게 제3의 장소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