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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김이 서린 택시 차창 너머로 병원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광기를 포함한 모든 것들 위에 고독이 조용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가장 섬세한, 최소한 가장 번득이는 광기로서의 고독이었다. -p.25
칠레 출신의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작가라 불리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이다. 평소 남미 작가들의 책은 많이 읽지를 않아서 볼라뇨의 소설도 처음 읽어봤다. 전에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문화나 역사적인 차이가 있어서인지 생소한 느낌이었다. '팽선생' 역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랜 시간 천천히 읽었다.
주인공 '팽선생'은 최면치료를 하는데 몇달 전 자신이 돌봐주었던 레노부인과 연이 닿아 레노부인의 소개로 바예호 씨의 멈추지 않는 딸꾹질 치료를 하기로 한다. 그 약속을 한 뒤부터 아직 환자도 만나지 않았는데 기묘한 일들이 벌어진다. 누군가가 자신의 치료를 방해하고 바예호 씨를 만나지 못하도록 수를 쓴다.
스페인 말을 쓰는 두 사내가 나타나 치료를 하지 않는 대가로 뇌물을 주고 가버린다. 다시 그들을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가 없고 이상한 일들은 계속된다.
저 책표지처럼 아무리 환자에게 다가가려 해도 갈 수가 없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당신들이 원하는 것 자체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니 좀 느긋해지는군요. 나에게 돈을 선물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 나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변명했다. [당신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돈이 많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지요.] 갈색 사내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상상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상상해 내는 법입니다.]
[모든 것을요.] 깡마른 사내가 말했다. -p 69
아..어디부터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알 수 없다.
상상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상상해 내는 것이라니 주인공의 모든 일은 현실이 아닌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부터가 이상하다. 딸꾹질을 멈추지 않는 환자와 환자를 방치하는 저 고독한 병원이라니...
작가는 이런 상상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마치 자기도 모르게 소송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형이 집행되는 카프카의 '소송'속의 요제프k 같다.
팽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그 사건은 끝이 나 있었다.
잠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몇몇 얼굴들이 희미하게 보였다(아마 이 얼굴들이 주는 <무게감>을 이미 지적했던 것 같다). 잠에서 깨자 어떤 소리가 들렸다. 겨우 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내 의식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나는 눈을 떴다.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p.107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팽선생은 최면에 걸렸거나 아니면 최면에서 깨어났거나 했을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식의 한가운데에 누군가 물방울을 '똑' 하고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실존 인물인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를 등장시켜 현실 세계의 부조리함과, 죽음, 그리고 죽음처럼 무의미한 삶을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한 듯 하다.
<건망증은 낮 동안엔 사막과 같아. 하지만 저녁이 되면 마치 밀림 같아지지. 야생 동물들이 우글거리는 밀림 말이야. 넌 아직도 우리가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어?>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