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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마룻바닥에 맨발을 내딛고 창문쪽으로 걸어간다. 당신은 여섯 살이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뒷마당의 나뭇가지들은 하얗게 변해 간다. -p.7 | |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작가는 나를 현재의 내가 아닌 6살의 나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는 현재의 나로 다시 되돌려 놨다. 마치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어 시간여행을 하게 하는 듯했다.
나의 여섯살은 어땠을까...
추운 겨울의 아침 6살, 어쩌면 5살이나 7살이었을지도 모를 그 어린 시절 나의 겨울은, 눈이 많이 오던 군산의 어느 동네에 작은 마당을 가진 2층집에서 창밖을 내다 보니 어린 나의 눈으로 보기엔 꽤나 넓은 마당의 한쪽 구석엔 어린아이 한명쯤은 거뜬히 올라갔다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는 눈미끄럼틀이 만들어져있었다.
| 당신의 이야기는 잠시 밀어 두고 당신이 살아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첫날부터 오늘까지 이 몸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살펴보자. 감각적 자료들의 카탈로그랄까. <호흡의 현상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되겠다. -p.7 | |
작가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화자인 '나'를 통해 하지 않고 관찰자 시점에서 '당신'이란 2인칭 주인공을 통해 서술하는 특이한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은 폴 오스터도 될 수 있고, 나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전적인 이야기지만 폴 오스터만의 특별한 감각으로 글을 쓰면서도 살아온 일대기를 시간의 흐름대로 쓰지 않고 마치 생각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작가가 되려면 평탄한 인생으로는 글을 쓸 수 없는 공식이 있는 것처럼 폴 오스터의 삶도 굴곡이 많은 인생이었다.
얼굴에 큰 상처가 몇 번인가 생겼지만 다행히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난 것, 터질 듯한 오줌보 때문에 사고가 난 것, 21번이나 이사를 다닌 끝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브루클린에 정착하여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린 인터뷰는 그 곳에서 한 것,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여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던 그 때 천생연분인듯한 두 번째 부인을 만난 것, 그리고 열네 살 어느 숲에서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은 것 등등.
이 중 두번째 부인을 만난 것과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은 것은 작가의 인생에 아마도 큰 영향을 줬으리라..
| 당신의 아내는 당신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아내가 걱정한다면 그것은 단지 당신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럴 뿐이다. 당신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아내를 곁에 가까이 둔 이유를 헤아려 본다. 물론 이런 이유도 그중 하나다. 인내하는 사랑의 광대무변한 별자리 중에서 빛나는 별들 중 하나. -p.22 | |
| 그 사건이 제 삶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것은 한 치의 의심도 할 수 없어요. 멀쩡히 살아 있던 제 친구가 한순간에 죽었지요. 저는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무작위로 일어난 죽음과 함께 세상만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지요. 단단한 땅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사람들이 땅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작가란 무엇인가 中에서 -p.166 | |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경험해서일까, 아버지의 죽음앞에서도, 조부모의 죽음 뒤에도, 가장 아꼈던 사촌이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도, 그리고 어머니가 죽었을때도 울지 않았다. 마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같다.
모두 급작스럽게 죽어버렸다.
작가는 2011년 예순 네살을 맞이했다.
예순 네살에 쓰는 자서전적 기록이다.
아, 나도 나이가 들었을 때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본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지만 서서히 나타날 수도 있다. 만약 나에게도 천천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러한 글을 남기리라.
| <주베르: 삶의 종말은 고통스럽도다.> 틀림없이 지금보다 꽤나 더 나이를 많이 먹었을 그는 1815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그 말을 쓴 지 1년이 채 못 되어, 그는 삶의 마지막에 관하여 다르면서 훨씬 더 도전적인 어구를 적었다. <누구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문장에, 특히 괄호 속의 말에 감동한다. 그 말을 보기 드문 세심한 정신,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 특히 나이든 사람, 노쇠해져서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힘겹게 얻은 깨달음을 보여준다.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 마지막이 고통스럽건 않건 마지막에 가서 사랑스러워진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성취는 없을지도 모른다. -p.231 | |
작가는 이 글을 <호흡의 현상학>이라 했다.
처음 읽을 땐 그게 뭐지...했는데,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긴 호흡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겨울이, 그리고 새로운 문 뒤엔 봄이 들어선다.
|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가면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당신의 맨발. 당신은 예순네 살이다. 바깥은 회색이다 못해 거의 흰색에 가깝고 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당신은 자문한다.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문이 닫혔다.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당신은 인생의 겨울로 들어섰다. - p.2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