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거슬러
토마스 에스페달 지음, 손화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나이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내가 아닌 것만 같다. 나는 항상 노년의 이미지에 매력을 느껴 왔다. 늙다리와 어린 소녀. 이 이미지가 내게 무엇을 상기시키려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범죄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자연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무자비함과 폭력, 그리고 자연의 청정함과 결백성 말이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와, 가슴이 깊이 파인 검은색 파티 드레스를 입고 거의 무릎에 앉아 있는 그녀 중 누가 무죄하고 결백한지 모른다.

-p.11

 

 

처음 표지를 봤을 땐 '아담과 이브'가 생각났다. 태초의 자연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저 수풀 사이로 맨 다리를 드러내고 뛰쳐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제목이 '자연을 거슬러'라니...저 표지는 제목의 극적 효과를 가져다 주는 듯했다.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요즘 나도 나이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여 몹시 지쳐있었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나'로 시작하는 1인칭 시점이었다가 '그와 그녀'가 나오는 3인칭 시점이었다가 현재였다가 과거였다가...혼란스러웠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의 '롤리타' 같은 이야기인 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또 책의 6장이 서로 다른 단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 '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로웠다. 남자도 저런 생각을 할까? 이건 마치 여자들의 사랑이야기를 쓴 것 같았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사랑에 관한 책.

​마치 삼중 액자를 보는 듯 하다.

​                  '토마스 에스페달'의 삶 속에 '주인공 나(토마스)'의 삶 속에 '책 속의 아벨라르'의 삶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인 듯 하지만 결국은 작가 자신일 것이다.

자연을 거스른다는 것...

나이차가 배나 나는 아버지뻘인 남자와 딸같은 여자가 만나는 것...

실제 작가의 삶은 어떤지 모르지만...주인공 '나'와 딸같이 어린 '얀네'

그리고 과외 선생인 '아벨라르'와 딸같이 어린 '엘로이즈'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소.<No se pued vivir sin amar.>라고 부르짖지만 사랑을 두려워하는 남자.

                   내가 두려워하는 건 바로 사랑입니다.     - p.88

밖으로 일을 하러 나가는 그리고 더 자유롭기 위해 결혼을 하는 여자와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남자

사랑하는 여자와 살지 못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월급을 더 받기위해 결혼을 한다는 것

그 여자는 자연스러운 삶을 위해 자연 속에서 살기 원하고 집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서 세상을 떠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겐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이 다른 이들과는 달리 부자연스럽고 가식적인 삶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p.103

​내 삶은 가식적이었고, 나도 가식적인 사람에 불과했다. 글을 쓸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 작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 p.119

행복에 관해 쓰고 싶지만 그를 위해 불행을 말하는 것.

 

 

불행은 행복의 필수 조건인가?

아니, 행복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다. 무엇과도 상관없는 독립적인 것이 바로 행복 아닐까. 행복은 마치 자연 현상처럼 지금 이 순간과 얽혀 있는 것이다. 마치 무지개와 별똥별, 번개처럼 장엄하고 무시무시하며 동시에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 행복이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 p.146    

 

얀네에게서 버림받은 주인공은 그 실연이 삶의 가장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그 아픔이 가신 뒤에 온다는 걸 잊지 마세요.     - p.221

이렇듯 이 책엔 자연을 거스르는 것 투성이다. 주인공에겐 부자연스러운 일이 다른이에겐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은 항상 함께였다.

마지막 장인 <짧은 단상>은 마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연상시켰다.  아무것도 쓸 수가 없고, 자신이 쓴 것은 모두 가식적이며 자신의 글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작가의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창작이란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인가...

 

 

행복에 관한 책은 두껍지도 않을 것이며, 깊은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될 것이다. 행복을 표현하는 언어는 소박하고 평범하기 마련이며, 행복 그 자체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 않은가?

행복에 관한 책은 짧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 장편소설처럼 지속적이고 서로 연관이 있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속에서는 연계성도 찾아볼 수 없으며, 이성과 논리를 찾을 수도 없다. 이처럼 행복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 p.150

나는 행복을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행복은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는,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알 듯 모를 듯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나는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든 후 그녀에게 식사하러 오라고 부르곤 했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나란히 함께 앉아 음식을 먹으며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아니, 나는 그 당시 행복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행복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 행복! 나는 정말 행복했다. 

p.158

 

요즘의 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힘들다고만 생각했다. 모든 것이 힘들기만 했다. 일을 하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남편과도 다투게 됐다.

아..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내가 행복을 저 하늘 위에 뜬 구름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옆에 있어주는 남편이 있어서 행복하고, 귀여운 아가들이 있어서 행복하고, 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걸 잠시 잊고 지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 할 수 있다고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던가...

정말 조그만 생각의 차이인데도 이런 행복한 것들을, 감사한 것들을 잊고 불행에 휩싸여 힘들어 하다니...

​힘들때마다 저 구절을 생각해야지....

사람은 이상하게도...정말 행복한 순간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들을 모두 잃어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때가 행복한 때였구나...하고 후회를 한다...

행복은 멀리있지 않다....바로 나의 곁에...내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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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Then wear the gold hat, if that will move her;

If you can bounce high, bounce for her too,

Till she cry 'Lover, gold-hatted, high-bouncing lover,

I must have you!'

-THOMAS PARKE D'INVILLIERS-        

 

 

 

 

[상실의 시대] 속 '나가사와'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 말때문에 내가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 읽게 된 듯하다.

 

 

† 처음 읽기 - 문학동네 : 김영하 번역

처음 읽을 땐 내가 이런 고전도 안 읽어서야 되겠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2012년 10월의 일이었다  http://blog.naver.com/yokil99/140170481159)

당시엔 이게 왜 20세기 초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야? 하는 의문이 생겼다.

아마도 제목에서 오는 위화감에 내용도 모르고 있다가 (내 나름대로 이런 내용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전혀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아니라서 그 줄거리에 충격을 받은 때문이기도 했다.

 

† 두번째 읽기 - 열림원 : 김석희 번역

두번 째 읽은 건 2013년 5월이었는데   http://blog.naver.com/yokil99/140189703268

당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 영화 개봉으로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새로운 번역본을 내기 시작했고 그 중 괜찮은 번역이라는 평을 받는 김석희 번역의 위대한 개츠비를 두번째로 읽었다.

두번 째 읽을땐 좀더 책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였고, 김영하 번역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좀 더 꼼꼼히 읽기도 했다.

 

† 세번째 읽기 - 열린책들 : 한애경 번역

그리고 얼마 전 '상실의 시대'를 읽고 주인공 와타나베가 '읽으면 읽을수록 좋아지는 책'이라고 평했기 때문에 나도 그런 마음이 드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세번째 읽게 되었다. 물론 책이 두껍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말이다.

와타나베의 말대로다. 읽을수록 좋다더니...세번째 읽으니 두번째 읽을때 안보이던 것들도 보이고 개츠비의 매력에 빠져드는 듯 하다

 

† 세 출판사 비교 - 개인의 취향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세 권의 책으로 비교해 보니 열림원 책과 열린책들 책의 번역이 깔끔한듯 했다. 다른이들의 평처럼 김영하 번역은 번역가의 색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김영하가  쓴 책인지 피츠제럴드가 쓴 책인지 모호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네번째 읽을 때에는 원서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싶다. (아마존에 들어가니 ebook이 무료다. 바로 다운받았다...)

 

 

 

인간의 성격이란 것이 성공적인 제스처의 연속이라면, 그에게는 뭔가 멋진 게 있었다. 마치 1만 5천 킬로미터 밖에서 발생한 지진을 계측하는 저 정교한 지진계에 연결된 것처럼, 그의 내면에는 인생의 가능성을 감지하는 고도의 감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의 이런 감수성은 <창조적인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저 구태의연한 감수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비상한 재능, 일찍이 어느 누구에게도 본 적이 없었던, 앞으로도 영원히 보지 못할 낭만적인 감수성이었다. 그래, 결국 개츠비가 옳았다. 내가 사람들의 쓰라린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잠시나마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는 바로 개츠비를 삼켜 버린 것들, 그의 꿈이 지나간 자리를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

- ebook p.22/546 -

 

 

 

 

If personality is an unbroken series of successful gestures, then there was something gorgeous about him, some heightened sensitivity to the promises of life, as if he were related to one of those intricate machines that register earthquakes ten thousand miles away. This responsiveness had nothing to do with that flabby impressionability which is dignified under the name of the 'creative temperament'-it was an extraordinary gift for hope, a romantic readiness such as I have never found in any other person and which it is not likely I shall ever find again. No-Gatsby turned out all right at the end; it is what preyed on Gatsby, what foul dust floated in the wake of his dreams that temporarily closed out my interest in the abortive sorrows and short-winded elations of men. 

- Loc.26/2418 -

 

 

주인공 닉은 개츠비의 옆집으로 이사와서 매주 성대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를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그런 돈많은 허영심에 가득찬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츠비의 특별함을 알게 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책을 세번 읽으니까 개츠비의 특별함을 나도 알것 같다)

개츠비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말해주는 저 문구도 두번째 읽을때까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세번째 읽을땐 개츠비가 어떤 사람인지 표현해 주는 저 문구에 빠져들었다. 지진을 감지해내는 고도의 감수성이라니...정말 멋지지 않은가?

 

피츠제럴드는 삶이 개츠비같았다고 한다. 대법원 판사 딸인 '젤다'와 결혼하려 했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파혼을 당하고 피츠제럴드는 어떻게든 성공해서 젤다와 결혼하려 했고 첫 소설이 성공하자 바로 젤다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재벌이 된 부부는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고 계속되는 소설의 실패의 쓴맛을 봤다고 한다. 

 

 

 

그는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다 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 미소는 영원히 변치 않을 평생 네다섯 번이나 볼까 싶은 아주 보기 드문 미소였다. 영원한 세계를 잠시 보았거나 보는 듯한 미소,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온 정신을 다해 집중하겠다는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어하는 만큼 당신을 이해하며, 당신이 믿고 싶어 하는 만큼 당신 자신을 믿어주며, 당신이 전하고 싶어하는 최고의 인상을 정확히 받았다고 확인해 주는 그런 미소였다. 정확히 바로 그때 그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서른한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우아하지만 거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공들여 격식을 갖춘 그의 말투는 겨우 어리석음을 면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가 자기 소개에 앞서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으니 말이다. 

- p.134/546 -

 

 

 

개츠비의 화려한 삶 뒤에 숨겨진 출세를 향한 욕망,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노력들, 그리고 뭔가 있는 듯한 누구나 빠져들 법한 미소. 개츠비의 파티에 왔던 이들은 닉이 수첩에 적어놓고 싶을 정도로 많은데도, 이런 개츠비의 특별함을 아는 이만이 개츠비의 장례식에 왔다. 바로 주인공 닉과 개츠비의 서재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부엉이 안경을 낀 남자.

 

 

 

'어떻게 생각해?' 그가 불쑥 물었다.

'뭘 말입니까?'

그는 손을 들어 서가 쪽을 가리켰다.

'저것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필요 없어. 내가 벌써 다 확인해 봤거든. 저건 다 진짜야.'

'책들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진짜야. 속지도 있고 모두 다 있어. 혹시 마분지로 만든 멋진 장식용 서적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근데 하나같이 완벽한 진짜더라고. 속지도......아! 내가 보여 주지.'

우리가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그는 책장으로 달려가서 '스토더드강연지'의 첫 권을 들고 왔다.

'봐!' 그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건 진짜야. 처음엔 속았지. 이 집 주인은 진짜 벨라스코 같은 사람이라니까. 정말 대단해. 얼마나 완벽한지! 엄청나 리얼리즘이랄까! 자제할 줄도 알아서 읽으면서 자르게 되어있는 책장을 아직 자르지도 않았어. 그런데 왜 들어왔지? 뭘 찾나?' 

- p.126/546 -

 

 

저 책들을 다 읽었을까? 개츠비가? 그건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개츠비의 장례식에 아버지가 가져온 개츠비의 일일 계획표를 보면 저 책들을 정말로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안개만 없다면 만 건너로 당신 집이 보였을 텐데.' 개츠비가 말했다. '부두 끝에 늘 밤새 빛나는 초록 불빛이 있더군요.'

데이지가 불쑥 개츠비의 팔짱을 꼈지만, 개츠비는 방금 자기가 한 말에 열중한 것 같았다. 아마 그 불빛이 가진 놀라운 의미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와 데이지를 떼어 놓았던 엄청나 거리에 비하면, 그 불빛은 거의 그녀에게 닿을 만큼 무척 가까워 보였다. 달 주위에서 빛나는 별처럼 가까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불빛은 부두에 켜진 초록 불빛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사로잡았던 대상의 숫자가 하나 줄어든 셈이다.

- ebook p.243/546 -

 

 

 

그토록 사랑하던 데이지를 얻기 위해 돈을 벌고 바다 건너편으로 데이지의 집의 푸른 불빛이 보이는 곳에 대저택을 사들여 데이지가 파티에 오기를 바라며 5년을 기다렸건만 데이지는 파티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 황금 모자를 높이 쓰고 열심히 뛰어 보지만 데이지에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작별 인사를 하러 그들 쪽으로 갔을 때, 나는 개츠비의 얼굴에 되돌아온 어리둥절한 표정을 목격했다. 지금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희미하게 의심하는 듯한 그 표정. 5년이라! 바로 그날 오후에도 데이지가 개츠비의 꿈에 못 미치는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이지의 잘못이라기보다 개츠비가 품은 엄청나 환상 때문이다. 그의 환상은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능가했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그 환상에 직접 뛰어들어, 언제나 그 환상을 끊임없이 키워 가며, 자기 앞에 떠도는 빛나는 낱낱의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이다. 어떤 강한 열정이나 순수함도 인간이 유령 같은 제 마음속 깊이 간직한 것에는 맞설 수가 없다. 

- ebook p.251/546 -

 

 

결국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를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하지만 이제 데이지는 과거의 데이지는 아닌 듯 하다.

 

 

 

전화는 한 통도 걸려 오지 않았지만, 집사는 낮잠도 자지 않고 4시까지 기다렸다. 전화가 걸려 와도 받을 사람이 없어진 한참 뒤까지. 개츠비 자신도 전화가 걸려 올 거라 생각지 않았고, 아마 더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 예전의 따뜻한 세상을 잃었을 것이고, 단 하나의 꿈을 너무 오랫동안 품고 살아온 대가라기엔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장미꽃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지, 갓 돋은 잔디에 햇살이 얼마나 가혹하게 내리쬐는지 깨닫고, 무시무시한 나뭇잎 사이로 낯선 하늘을 올려다보며 틀림없이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 실체 없이 물질적이며, 가엾은 유령들이 공기처럼 꿈을 마시며 정처 없이 떠도는 세계가 다가왔다. 형체도 없는 나무들 사이로 그에게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저 잿빛 환영처럼.

- ebook p.416/546 -

 

 

 

데이지의 남편인 톰 또한 정부가 있지만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자 질투에 눈이 먼다. 어쩌면 치밀하게 전략적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데이지와 개츠비가 노란 차를 타고 가게 했을수도 있다.

개츠비는 수영장에서 끝까지 데이지의 전화를 기다리지만 결국 전화는 오지 않고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도망을 치지 않는다.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 모든 삶의 의미가 없어져버렸을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죽음뿐......

 

문학동네 책의 해설에 보면 Great를 '위대한'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조소의 의를 담은 '대단한'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말이 나온다.

'저 인간 정말 대단하군, 여자 하나때문에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더니 목숨까지 버렸더군.'하고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츠비는 개츠의 삶에서 제이 개츠비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그래서 그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제이 개츠비같은 인물을 꾸며 내어, 그 이미지에 끝까지 충실했던 것이다.                                                                                                  -ebook p.256/564 -

 

어쩌면 서재 안의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도 개츠비 스스로 개츠비 이미지에 충실하려 노력한 것이 엿보였기 때문이고, 5년 만에 만난 데이지가 이제는 조금은 실망스럽지만 그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개츠비야말로 진정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제목을 잘못 지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정말 제목을 잘 지었다는 생각으로 변하게 된 이유였다.  

 

읽으면 읽을수록 좋아지는 책이라니...아무데나 펼쳐보아도 좋은 책이라니...

그런 책은 찾기가 힘들지만 하루키 덕에 세 번이나 읽게 된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인가 싶다.

책의 줄거리만을 보는 사람들은 책이 주는 진정한 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의 말처럼 읽고 또 읽으면 작가가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찾게 되는게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곳에 앉아 그 오래된 미지의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개츠비가 데이지의 선착장 끝에서 빛나는 초록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로움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까지 먼 길을 왔고, 그의 꿈은 너무나 가까이, 틀림없이 손에 잡힐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알지 못했다. 그 꿈이 그가 지나온 곳, 도시 너머의 광막한 어둠 속 어딘가, 밤하늘 아래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들이 펼쳐진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개츠비는 초록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물러나는 환희의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면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며,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맑은 날 아침에는......

그래서 우리는 조류를 거슬러 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ebook p.464/546 -

 

 

 

And as I sat there brooding on the old, unknown world, I thought of Gatsby's wonder when he first picked out the green light at the end of Daisy's dock. He had come a long way to this blue lawn and his dream must have seemed so close that he could hardly fail to grasp it. He did not know that it was already behind him, somewhere back in that vast obscurity beyond the city, where the dark fields of the republic rolled on under the night.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tom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And one fine morning--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Loc 2406/2418 - 

 

 

 

P.S. 여전히 드는 생각이지만 개츠비 역할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어울리지 않는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였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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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나가사와랑 친구가 될 수 있어

 

그 당시 내 주위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며, 나와 그가 친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내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볕을 쬐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느냐고 물어 왔다. <위대한 개츠비>라고 말했더니 재미있냐고 물었다. 훑어 읽는 건 세 번째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p.80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두 번 읽었고  조만간 한 번 더 읽을 예정인데...이 정도면 나도 친구해도 되지 않겠어??

 

 

† 하루키가 말하는 좋은 책이란...고전인가?

 

 

그(나가사와)는 나 같은 건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였는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 외에는 신용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하지만 스콧 피츠제럴드는 죽은 지 아직 28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상관없어, 2년쯤은" 하고 그는 말했다. "스콧 피츠제럴드 정도의 훌륭한 작가라면 언더 파로도 충분해"

-p.81

 

아...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역시 책은 뭐니뭐니해도 고전이 진리다.

하지만...하루키 정도의 훌륭한 작가라면 아직 살아있는 작가라도 상관없다

 

 

 

†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상실의 시대 목차에서 제목을 따왔는가?

 

오래전에 봤던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큰 임팩트는 없지만 잔잔한 로맨스 스토리와 내가 좋아하던 유희열, 김연우, 윤종신 등이 참여한 OST가 엄청 좋았던 영화라서 가끔 봄이 되면 생각나는 영화다

 

그런데...[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는데...깜짝 놀랐다.

제 9장 봄철의 새끼곰만큼 네가 좋아

상실의 시대는 1988년에 나왔으니까 저 영화가 이 제목을 따라한 거겠지??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 하루키화 된게 많은데...사람들은 그걸 알란가 몰라...

나도 하루키 월드에 빠지기 전엔 몰랐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잘 모르겠지...

 

 

제 1장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해요

제 2장 죽음이 찾아왔던 열일곱 살의 봄날

제 3장 비와 눈물이 섞인 하룻밤

제 4장 부드럽고 평온한 입맞춤

제 5장 아미료에서 날아온 편지

제 6장 정상적인 세계와 비정상적인 세계

제 7장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제 8장 하지만 쥐는 연애를 하지 않아요

제 9장 봄철의 새끼곰만큼 네가 좋아

제 10장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 것

제 11장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이 목차들만 봐도 그렇다...

저런 식의 목차...최근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서 이제는 자주 볼 수 있는 식의 제목이다.

처음부터 독창적으로 생각해서 지은 걸지도 몰라...라는 말은 안 통한다...모든 것엔 "최초"가 있고 또 그걸 "유행"시킨 이가 있으니까...

 

 

 

†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좋아하는 방식

 

 

저, 저, 뭔가 말해 줘요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요.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해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더 멋진 말을 해줘요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p.380

 

 

 

 

내 헤어 스타일 괜찮아요?

굉장히 좋아

어느만큼 좋아?

온 세계의 숲에 있는 나무가 다 쓰러질 만큼 멋져

-p.420

 

 

 

 

나에 관해 싫은 게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 줘요. 고칠 수 있는 건 고쳐 나갈 테니까.

별로 없는데.     아무것도 없어.

정말?

네가 입고 있는 건 뭐든지 좋고, 네가 하는 일도, 말하는 것도, 걸음걸이도, 술 주정도, 무엇이든 좋아해.

정말 이대로 좋은 거에요?

또 바뀌면 어떤 게 좋은지 모르겠으니까 그대로가 좋아.

얼마만큼 나 좋아해?

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돼버릴 만큼 좋아.

-p.427

 

 

 

아....이 대목에선 저 영화도 생각났지만...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가 딱 생각났다.

그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데...

 

 

 좋아해, 정윤

 윤미루 만큼?

 작은 참새를 손에 쥐고 있을 때...그때의 그 기쁨만큼...

 윤미루 만큼?

 형들이 참새를 구워서 돌려줬을때..그때의 그 슬픔만큼...

 윤미루 만큼?

 친구들과 처음으로 참새구이를 먹었을때...그때의 그 절망만큼...

 

얼마만큼 좋아하냐고 묻는 저 미도리와 정윤이 왠지 모르게 닮아있다. 그리고 재밌는 대답을 해주는 두 남자도...

† 봄이 되면...읽고 싶을 그런 책....아무 때고 아무데나 펼쳐 보아도 좋을 그런 책...

 

 

 

4월이 가고 5월이 왔지만 5월은 4월보다 더 가혹했다. 5월이 되자 나는 깊어 가는 봄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떨림은 대개 해질녘에 찾아들었다. 목련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 오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없이 부풀어 오르고, 떨리고, 흔드리고, 아픔으로 차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긴 시간이 걸려 그것은 지나갔고, 그 뒤에 둔탁한 아픔을 남겨 놓았다. 

 -p.414

 

봄의 낮은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봄의 밤의 외롭고 쓸쓸하다

특히나 밤에 부는 봄바람은 슬픈 기운을 몰고 와서는 내 코를 마비시킨다.

봄의 밤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정처없이 걷고 싶어지는 까닭도 나의 정신이 마비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봄은 가을과 다른 우울함을 지니고 있다.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여명]은 잔인한 4월을 이야기하고,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가혹한 5월을 이야기한다.

봄에 꼭 읽고 지나가야 하는 책으로 [여명]을 꼽았고 얼마전에 다시 읽어보기까지 했는데...이젠 봄에 읽을 책으로 [상실의 시대]를 추가한다.

 

와타나베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 읽고 아무데나 펼쳐서 자주 읽는다고 하는데 읽을 때마다 더 좋아진다고 했다.

아마도 그런 책이 좋은 책이지 않을까.

아무데나 펼쳐보아도 또 새롭고 점점 좋아지는 책.

 

나에게 [상실의 시대]는 그런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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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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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기억은 확실히 멀어져 가는 것이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미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쩌면 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변두리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향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언제까지라고 잊지 말아 줘요. 내가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줘요.'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글프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47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은건 고3이었다.

당시 일본 문화 개방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책이라든가 음악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많이 들어왔는데...그러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런 덕에 우리 집에도 이 책이 있었다.

그 때 당시에는 성관계라던가, 레즈비언 이야기라든가 하는 것들에 충격을? 받아서 '이런 책이 왜 베스트 셀러야?' 했었다.

아마 하루키와의 첫 만남을 이 책으로 시작하지 않고 단편집이라든지 에세이라든지 다른 책으로 시작했더라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꽤 하루키에게 빠져있을 터였다.

이 책을 읽은 후 '일본 작가의 책은 이상해'라는 생각이 머리에 콱 박혔고, 일본 작가의 책은 읽지도 않았으며 실상 1Q84가 나오기까지 난 하루키에게 관심도 없었다.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을 섭렵했고 (꽤 재밌는것들이 많았고 그 중 히가시고 게이고의 소설이 단연 으뜸이다.) 그 후 1Q84가 나오면서 다시 하루키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 10년 가까이 하루키 책을 안 읽었고, 그 사이 나는 많이 성장했다. 다시 하루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난 하루키 책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푹 빠져들었다.

하루키 책은 거의 다 있고, 얼마전부터 하루키가 책을 쓴 순서대로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하루키를 있게 만든 책.

상실의 시대 전작에서도 알 수 있긴 하지만 그 모든게 집약된 책인 것 같다.

 

삶이 우울한 주인공 와타나베와 저마다 아픔을 간직한 주변 인물들

17살인 채로 머무르는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친구 나오코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 레이코

대학에서 같이 강의를 듣다가 만나는 쿨한 여자 미도리

모든걸 다 갖추었지만 여성 편력이 심한 선배 그야말로 쿨한 나가사와

그리고 나가사와의 여자친구이자 주인공의 젊은날의 동경과도 같은 하쓰미

 

 

 

 

[죽은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감으로 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 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440​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저 나이엔 저럴 수 밖에 없어' 라는 생각도 든다

나의 스무살을 생각해보니 죽음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방황같은 걸 한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엔 집과 학교만 왔다갔다 하다가 대학교에 가선 갑작스럽게 생긴 자유 시간에 어쩌면 뭘 해야할지 모르고 방황비슷한 걸 하긴 했다. 집에서 나와 기숙사에 있으면서 더 혼란스러웠고 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수다떠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음악듣고 책 읽는 게 전부였었다. 시시한 대학 강의도 흥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많던 시간을 그렇게 헛되게 보낸게 아깝기도 하지만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으니...좀 늦었지만 다행이랄까... 적어도 난 나의 아이들에게 나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알려줄 수도 있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살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줄 수가 있으니 말이다.

 

 

하루키의 다른 책에서처럼 하루키가 좋아하는 음악과 여러 책들을 엿볼 수 있어 좋기도 하고 가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음악이 나올 때는 '난 하루키와 공통점이 있어' 하며 미소짓기도 했다.

 

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She asked me to stay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So I looked around and I noticed there wasn't a chair.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drinking her wine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It's time for bed"

She told me she worked in the morning

and started to laugh.
I told her I didn't and crawled off to sleep in the bath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gian wood.

예전에 나는 한 여자를 소유했었지,

아니 그녀가 나를 소유했다고 할 수도 있고.

그녀는 내게 그녀의 방을 구경시켜 줬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머물다 가길 권했고 어디 좀 앉으라고 말했어.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자하나 없었지.

 

양탄자 위에 앉아 시계를 흘끔거리며 와인을 홀짝이며

우리는 새벽 두 시까지 이야기했어.

이윽고 그녀가 이러는 거야. "잠잘 시간이잖아"

 

그녀는 아침이면 일을 해야한다고 말했어.

그리곤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지.

나는 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목욕탕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어.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난 벽난로 불을 지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비틀즈 노래는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하루키도 비틀즈 노래는 별로였는데 저 노르웨이의 숲이 실린 음반은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중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노르웨이의 숲]은 도입부의 기타소리가 무척 맘에 들어 비틀즈 노래중 맘에 드는 몇 곡 안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에 관한 이야기는 하루키 에세이집 [잡문집]에 나와있는데 꽤 재밌다.

=> http://blog.naver.com/yokil99/140146877799

 

 

하루키 책은 잡힐듯 잡히지가 않는다. 읽고 난 후 공허감, 상실감이 크다.

책을 읽으며 '그때 난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진지하게 돌아다 보았다.

그 때보단 더 성장했다. 어른도...아이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진  성장해야 한다. 성장통을 겪으면서...

그래서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거다.

 

 

 

반딧불이 사라져 버린 뒤에도 그 빛의 흔적은 내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가녀린 엷은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방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어둠 속에 몇 번이고 손을 뻗쳐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조그마한 빛은 언제나 나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안타까운 거리에 있었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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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오브 로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작노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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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25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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