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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기억은 확실히 멀어져 가는 것이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미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쩌면 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변두리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향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언제까지라고 잊지 말아 줘요. 내가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줘요.'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글프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47 |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은건 고3이었다.
당시 일본 문화 개방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책이라든가 음악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많이 들어왔는데...그러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런 덕에 우리 집에도 이 책이 있었다.
그 때 당시에는 성관계라던가, 레즈비언 이야기라든가 하는 것들에 충격을? 받아서 '이런 책이 왜 베스트 셀러야?' 했었다.
아마 하루키와의 첫 만남을 이 책으로 시작하지 않고 단편집이라든지 에세이라든지 다른 책으로 시작했더라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꽤 하루키에게 빠져있을 터였다.
이 책을 읽은 후 '일본 작가의 책은 이상해'라는 생각이 머리에 콱 박혔고, 일본 작가의 책은 읽지도 않았으며 실상 1Q84가 나오기까지 난 하루키에게 관심도 없었다.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을 섭렵했고 (꽤 재밌는것들이 많았고 그 중 히가시고 게이고의 소설이 단연 으뜸이다.) 그 후 1Q84가 나오면서 다시 하루키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 10년 가까이 하루키 책을 안 읽었고, 그 사이 나는 많이 성장했다. 다시 하루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난 하루키 책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푹 빠져들었다.
하루키 책은 거의 다 있고, 얼마전부터 하루키가 책을 쓴 순서대로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하루키를 있게 만든 책.
상실의 시대 전작에서도 알 수 있긴 하지만 그 모든게 집약된 책인 것 같다.
삶이 우울한 주인공 와타나베와 저마다 아픔을 간직한 주변 인물들
17살인 채로 머무르는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친구 나오코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 레이코
대학에서 같이 강의를 듣다가 만나는 쿨한 여자 미도리
모든걸 다 갖추었지만 여성 편력이 심한 선배 그야말로 쿨한 나가사와
그리고 나가사와의 여자친구이자 주인공의 젊은날의 동경과도 같은 하쓰미
| [죽은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감으로 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 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440 |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저 나이엔 저럴 수 밖에 없어' 라는 생각도 든다
나의 스무살을 생각해보니 죽음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방황같은 걸 한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엔 집과 학교만 왔다갔다 하다가 대학교에 가선 갑작스럽게 생긴 자유 시간에 어쩌면 뭘 해야할지 모르고 방황비슷한 걸 하긴 했다. 집에서 나와 기숙사에 있으면서 더 혼란스러웠고 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수다떠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음악듣고 책 읽는 게 전부였었다. 시시한 대학 강의도 흥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많던 시간을 그렇게 헛되게 보낸게 아깝기도 하지만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으니...좀 늦었지만 다행이랄까... 적어도 난 나의 아이들에게 나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알려줄 수도 있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살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줄 수가 있으니 말이다.
하루키의 다른 책에서처럼 하루키가 좋아하는 음악과 여러 책들을 엿볼 수 있어 좋기도 하고 가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음악이 나올 때는 '난 하루키와 공통점이 있어' 하며 미소짓기도 했다.
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She asked me to stay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So I looked around and I noticed there wasn't a chair.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drinking her wine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It's time for bed"
She told me she worked in the morning and started to laugh. I told her I didn't and crawled off to sleep in the bath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gian wood. | 예전에 나는 한 여자를 소유했었지, 아니 그녀가 나를 소유했다고 할 수도 있고. 그녀는 내게 그녀의 방을 구경시켜 줬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머물다 가길 권했고 어디 좀 앉으라고 말했어.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자하나 없었지. 양탄자 위에 앉아 시계를 흘끔거리며 와인을 홀짝이며 우리는 새벽 두 시까지 이야기했어. 이윽고 그녀가 이러는 거야. "잠잘 시간이잖아" 그녀는 아침이면 일을 해야한다고 말했어. 그리곤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지. 나는 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목욕탕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어.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난 벽난로 불을 지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
비틀즈 노래는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하루키도 비틀즈 노래는 별로였는데 저 노르웨이의 숲이 실린 음반은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중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노르웨이의 숲]은 도입부의 기타소리가 무척 맘에 들어 비틀즈 노래중 맘에 드는 몇 곡 안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에 관한 이야기는 하루키 에세이집 [잡문집]에 나와있는데 꽤 재밌다.
=> http://blog.naver.com/yokil99/140146877799
하루키 책은 잡힐듯 잡히지가 않는다. 읽고 난 후 공허감, 상실감이 크다.
책을 읽으며 '그때 난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진지하게 돌아다 보았다.
그 때보단 더 성장했다. 어른도...아이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진 성장해야 한다. 성장통을 겪으면서...
그래서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거다.
| 반딧불이 사라져 버린 뒤에도 그 빛의 흔적은 내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가녀린 엷은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방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어둠 속에 몇 번이고 손을 뻗쳐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조그마한 빛은 언제나 나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안타까운 거리에 있었다. -p.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