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2
서신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상소문을 썼다고 고하십시오」 中

선비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고 저마다 두려워하는데 박태보공이 홀로 말하기를
"이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법에 맞는 것이니 놀라지 마십시오"
하면서, 말과 행동이 조용하며 편안한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해창위 오태주는 오두인공의 아들이다. 그가 울며 부친께 아뢰기를
"일의 형편을 예상할 수가 없으니 아버님께서는 들어가서 아뢸 말씀을 의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박태보공이 오두인공께 말하기를
"이 상소를 짓고 쓴 것은 진실로 제가 한 일이니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공께서 먼저 들어가실 것이니, 상께서 누가 짓고 썼느냐 물으실 때에 반드시 바른대로 아뢰소서"
하니, 오두인공이 말했다.
"내 어찌 차마 그렇게 하리오."
박태보공이 말했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음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니, 공께서는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임금을 속이지 마옵소서."
이세화공이 바지를 걷어 다리를 만지면서 한숨 쉬며 탄식하였다.
"30년 동안 임금의 은혜를 입어 후히 녹봉을 받아먹어서 다리에 살이 쪘는데, 오늘 국청 자리에서 이것을 드러낼 줄 어찌 알았으리오." -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있는 한국 신화 - 흐린 영혼을 씻어주는 오래된 이야기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금애기〉와 같이 자료가 많은 신화에서 하나의 저본을 선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서사 내용상 고형(古形)으로 보이는 자료나 이른 시기에 보고된 자료를 고르는 방법이 있고 이야기 자체의 성격과 의미 요소에 주목하는 방법도 있는데, 내가 선호하는 것은 후자 쪽이다. 여기서는 1972년에 경북 영일에서 김유선 무당이 구연한 〈당금아기〉를 바탕으로 삼아 내용을 정리한다(최정여 · 서대석, 《동해안무가》, 형설출판사, 1974 수록). 실제 굿의 현장에서 구연된 신화로서, 순결한 처녀 당금애기가 어머니 신 삼신(삼신할머니)이 되기까지의 서사적 의미 맥락이 잘 형상화된 자료이다. -75쪽

세상에 당금애기가 자다가 숨이 답답해서 눈을 떠 보니 병풍 밖에 자던 시준님이 넘어와서 시준님 팔은 당금애기 베개가 되어 있고 시준님 다리는 당금애기 허리에 둘러 있었다. 당금애기가 일어나서 호령하는데,
"이 고약한 중아. 중이라는 것이 청산에 올라가 불도나 닦지 민가에 내려와서 이런 무례한 행실이 어디 있소!"
"아이고 아기씨요. 중이면 절에서나 중이지 마을에서도 중입니까. 이 집이 양반집에 아들을 낳고 딸을 하나 낳으면서 사주책을 만들었을 테니 책을 꺼내어서 아기씨 사주를 살펴보십시오."
당금애기가 벽장문을 열고서 사주책을 꺼내놓고 보니 부천님 도술로 스님 가장을 둘 것이 분명했다. 자기 팔자 사주에 스님 가장이라 돼 있는 걸 보더니 당금애기는 부모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준님과 부부를 삼아서 함께 잠을 잤다. -79-80쪽

원자료를 충실하게 반영한 내용이다. 이 자료(김유선 구연본)는 내용이 그다지 길고 상세한 편이 아니며, 대체로 담백한 쪽이다. 이보다는 양평이나 화성, 안성 등 경기 지역의 자료와 함흥, 평양, 강계 등 북한 지역의 전승 자료들이 상대적으로 내용이 더 길고 묘사가 자세하다. 신화적 신성성 역시 이들 자료에 더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거기 비하면 이 이야기는 무척 세속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으니, 당금애기와 화주승이 한 방에서 동침을 하는 내용 같은 것이 그러하다. 다른 자료에서는 이 대목을 이와 다르게 신성혼에 어울리는 화소와 묘사로 풀어내고 있기도 한 터다. 화주승이 신통력으로 당금애기 꿈에 태몽을 불어넣었다거나 화주승이 백미 세 톨을 집어준 것을 당금애기가 받아먹고서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86-87쪽

나는 당금애기의 임신과 관련하여 육체적 동침이 배제된 상태의 상징적 결합과 신이한 잉태가 이 신화의 정체성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왔었다. 당금애기는 아름답고 깨끗한 동정의 처녀로 남아 있어야 신성이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러한 생각이 문득 바뀌었다. 앞의 이야기에서처럼 화주승과 한이불 속에서 잠을 잤다고 해서 당금애기의 본질적 가치나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금애기는 한 명의 여자이다. 그렇다면 남자를 만나 동침을 해서 잉태를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당연히 그리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그것을 그리해서는 안 될 부정한 일로 보는 편견이 문제가 된다. -8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송사삼백수 을유세계문학전집 62
주조모 엮음, 김지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자리 위 맑은 눈빛 가을 물을 닮았고
옥주는 비껴 나는 기러기 떼 같아라.
애간장 끊어지는 대목 탈 때 되어선
봄 산 같은 눈썹을 낮게 숙이는구나. (장선 ‘보살만’ 中) -26쪽

더없이 시름겨워
옛 추억 두 번 세 번 곱씹어보네.
방 안 깊은 곳에서
몇 번이고 술과 노래 즐기고 나면
원앙 이불 향기롭고 따뜻했었네.
어찌 잠시 떨어져 따로 지내며
공연히 애 태우는 일 있었으랴.
도타운 운우지정
천 번 만 번 맺으며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었네. (유영 ‘낭도사만’ 中) -66-67쪽

삶과 죽음 갈리어 아득히 지낸 십 년
생각 아니 하려 해도
잊을 수가 없구려.
외로운 그 무덤은 천 리 너머라
슬픔을 털어놓을 길이 없는데
혹여 마주친대도 못 알아볼 듯하오.
얼굴은 풍진으로 가득한데다
머리는 서리처럼 희어졌으니. (소식 ‘강성자’ 中) -126쪽

해마다
제비 같은 신세로구나.
사막 두루 헤매다가
서까래로 와 깃든다.
이 한 몸 밖의 것은 생각지 말고
오래도록 술자리에 있을지어다.
강남에서 초라하게 지쳐버린 나그네라
흥겨운 음악소린 차마 듣지 못할지니,
노래 울려 퍼지는 자리 한 편에
베개와 대자리를 먼저 펴 두리
내 흠뻑 취해 바로 잘 수 있도록. (주방언 ‘만정방’ 中) -184-185쪽

정강년의 국치를
아직 설욕 못했나니
이 신하의 통한은
언제쯤 그치리오.
큰 수레를 몰고 가 깨부수리라
하란산 낮은 곳에 쳐진 요새를.
큰 뜻 세워 오랑캐 살 배불리 먹고
담소하며 흉노의 피 달게 마시리.
옛 산하를 남김없이 되찾은 후에
천자의 궁궐 향해 큰절 올리리. (악비 ‘만강홍’ 中) -273-274쪽

해 기울어 가는데
한껏 멀리 내다봐도 높은 성은 뵈지 않고
그저 마구 솟아오른 뭇 산만 보이누나.
위고가 떠난 뒤로
옥가락지 주며 맺은 약속 어찌 잊었으리.
하루 빨리 돌아감이 제일이리라
붉은 꽃 즐길 이가 없을 듯하니.
잘 드는 병주 가위 있다고 한들
이별 시름 천 가닥 못 잘라내리. (강기 ‘장정원만’ 中) -342쪽

고운 정 가득 담긴 그녀 눈빛에
난 그만 상사의 정 깊이 품은 터
봄 깊은 날 술자리 벌일 수밖에.
그녀야 또 어찌 알리
시구를 읊으려다 이 몸 축나서
입던 옷을 다시금 줄여야 한다는 걸. (오문영 ‘서학선’ 中) -432쪽

푸른 빛깔 둥근 연잎 제 홀로 말갛구나,
널따란 물가 한편 야트막한 모래톱에
우뚝하니 선 자태 맑고 아름답도다.
비녀인양 도르르 말려 난 새 잎
가을날의 수심을 아니 펼친다.
무더위는 얼마나 말아 품고 있으려나.
연잎을 지붕 삼은 쌍원앙이 나눈 밀어
빨래하는 여인에겐 말해주지 말게나.
원망 어린 노래 탓에 꽃바람이 그치면
천 겹 푸른 구름 닮은 연잎 다 시들 테니. (장염 ‘소영’ 中) -4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