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한국 신화 - 흐린 영혼을 씻어주는 오래된 이야기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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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금애기〉와 같이 자료가 많은 신화에서 하나의 저본을 선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서사 내용상 고형(古形)으로 보이는 자료나 이른 시기에 보고된 자료를 고르는 방법이 있고 이야기 자체의 성격과 의미 요소에 주목하는 방법도 있는데, 내가 선호하는 것은 후자 쪽이다. 여기서는 1972년에 경북 영일에서 김유선 무당이 구연한 〈당금아기〉를 바탕으로 삼아 내용을 정리한다(최정여 · 서대석, 《동해안무가》, 형설출판사, 1974 수록). 실제 굿의 현장에서 구연된 신화로서, 순결한 처녀 당금애기가 어머니 신 삼신(삼신할머니)이 되기까지의 서사적 의미 맥락이 잘 형상화된 자료이다. -75쪽

세상에 당금애기가 자다가 숨이 답답해서 눈을 떠 보니 병풍 밖에 자던 시준님이 넘어와서 시준님 팔은 당금애기 베개가 되어 있고 시준님 다리는 당금애기 허리에 둘러 있었다. 당금애기가 일어나서 호령하는데,
"이 고약한 중아. 중이라는 것이 청산에 올라가 불도나 닦지 민가에 내려와서 이런 무례한 행실이 어디 있소!"
"아이고 아기씨요. 중이면 절에서나 중이지 마을에서도 중입니까. 이 집이 양반집에 아들을 낳고 딸을 하나 낳으면서 사주책을 만들었을 테니 책을 꺼내어서 아기씨 사주를 살펴보십시오."
당금애기가 벽장문을 열고서 사주책을 꺼내놓고 보니 부천님 도술로 스님 가장을 둘 것이 분명했다. 자기 팔자 사주에 스님 가장이라 돼 있는 걸 보더니 당금애기는 부모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준님과 부부를 삼아서 함께 잠을 잤다. -79-80쪽

원자료를 충실하게 반영한 내용이다. 이 자료(김유선 구연본)는 내용이 그다지 길고 상세한 편이 아니며, 대체로 담백한 쪽이다. 이보다는 양평이나 화성, 안성 등 경기 지역의 자료와 함흥, 평양, 강계 등 북한 지역의 전승 자료들이 상대적으로 내용이 더 길고 묘사가 자세하다. 신화적 신성성 역시 이들 자료에 더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거기 비하면 이 이야기는 무척 세속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으니, 당금애기와 화주승이 한 방에서 동침을 하는 내용 같은 것이 그러하다. 다른 자료에서는 이 대목을 이와 다르게 신성혼에 어울리는 화소와 묘사로 풀어내고 있기도 한 터다. 화주승이 신통력으로 당금애기 꿈에 태몽을 불어넣었다거나 화주승이 백미 세 톨을 집어준 것을 당금애기가 받아먹고서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86-87쪽

나는 당금애기의 임신과 관련하여 육체적 동침이 배제된 상태의 상징적 결합과 신이한 잉태가 이 신화의 정체성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왔었다. 당금애기는 아름답고 깨끗한 동정의 처녀로 남아 있어야 신성이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러한 생각이 문득 바뀌었다. 앞의 이야기에서처럼 화주승과 한이불 속에서 잠을 잤다고 해서 당금애기의 본질적 가치나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금애기는 한 명의 여자이다. 그렇다면 남자를 만나 동침을 해서 잉태를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당연히 그리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그것을 그리해서는 안 될 부정한 일로 보는 편견이 문제가 된다.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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