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밀린 집안일들을 끝내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러 카페에 갔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책도 몇 장 못 읽고 부지런히 편지만 썼다 왜 편지에 쓰는 말들은 입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할까… 편지쓰듯 말하는 삶을 살면 좋을텐데 그런 고운 말들은 대체로 펜촉 끝에서만 나온다

새 고무장갑을 사러 다이소에 갔다가 이것저것 사서 나왔다 입 주변에 바르는 히알루론산 스틱이라던지… 지하상가 상설무대에는 작은 스크린 티비가 설치되어 있고 노인들은 그 앞에 띄엄 띄엄 앉아서 다들 말없이 티비를 쳐다보고 있다

인파에 어깨를 부딪혀가며 지하상가를 걸어다녔다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 모양…
그런 것들은 하루종일도 구경할 수 있다
나또한 지하상가 분수대 앞에 온종일 앉아 말없이 세상을 구경하는 그런 종류의 노인으로 늙겠지

약속시간은 아홉시, 그전에 출출한 뱃속을 채우러 중앙시장으로 향하다가 경로에 있던 알라딘 중고서점에 빨려들어가듯 들어갔다. 한국소설 매대에 기웃거리다 늘그렇듯 양귀자 책 두 권과 옛 한국소설가들의(윤후명, 김채원, 김인숙….) 자전적 단편이 담긴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내 주위에서 책을 고르던 소녀들의 대화가 너무 귀여워서 만면에 미소를 짓게 됨(“너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이 진짜 재밌는 거 알지?”, “알지알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얘들아 언니가 책 추천 몇 권 해도 되겠니..? 데미안은 아직 읽지마렴.. 별로 재미 없다구..” 하고 싶은 마음 가까스로 참고 계산하고 나왔다. 소녀들은 이제 마라탕을 먹으러 가는 참인 것 같았다. 시내에 놀러나와 용돈으로 책을 고르고 맛있는 거 먹으러 와르르 몰려가는 루틴은 나 어릴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즉석떡볶이가 마라탕으로 바뀐 정도의 변주…

핫바 먹으러 잘 가는 어묵집에 갔다가 장사를 마친 사장님과 그 앞에서 채소 파시는 이모님(81세)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셨다. 정말 너무 웃김… ㅋㅋ 이모님은 안구건조증이 있으신지 연신 눈물을 한줄기씩 흘리시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계속계속 울다가 한 번씩 식탁에 놓인 냅킨을 뽑아들고 엉망으로 눈가를 닦아내시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싸구려 휴지조각이 눈꺼풀에 붙었다. 전주 상산고를 나오셨다는 사장님과 그의 아들과의 중매를 밀어붙이는 이모님과 깔깔 웃으며 막걸리를 다섯 병이나 비웠다. 자기가 조금만 젊었어도 이 삼춘(사장님아들)을 꼬셨을 거라며 제발 이 삼춘이랑 결혼하란다. 그렇게 시장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다가 아홉시가 돼서, 친구들 만나러 대흥동으로 복귀했다.

숙취에 머리 붙잡고 일어나 어제 산 책들 뚜껑을 열어보니 96년 이 책을 처음 가졌던 이의 글씨가 적혀있다. “둥근해가 떴습니다가 유치원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온세상 사람들의 공유물이 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길 기원하며.”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북클럽의 책갈피도 끼어있다. 베텔스만 북클럽을 검색해 보니 <베텔스만 북클럽을 둘러싼 출판계의 빛과 어둠> 이런 논문이 나온다.


옛날 사람들이 아직도 곳곳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날에는 늘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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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헝그리 2026-03-09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옥을 정오기라고 적은 것으로부터 96년을 진하게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