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대학 재편과 대학 공간의 변화
- 고려대의 공간 분석을 중심으로 -
1. 문제 제기
최근 몇 년 사이에 진행된 대학 공간과 풍경의 변화는 소위 ‘대학의 정체성’에 어떤 단절이 있었음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경쟁하듯 신축되고 있는 기업 기부 건물들, 대자보 대신 게시판을 가득 메운 취업정보 포스터, 대학 공간 내에 입점하는 다국적 기업의 체인점들. 이러한 풍경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대학 공간의 ‘소비 공간화’, 즉 ‘자본화’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문제적’ 현상인가? 혹시 대학이 직업훈련소가 되어버렸다는 이데올로기적 수사가 그러한 풍경들보다 더욱 낯설게 다가오지는 않는가? 우리의 잠정적인 대답은 ‘그렇다’이다. 대학 공간의 소비 공간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담론’의 부재는 그것이 현재의 대학주체들에게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즉 지금과 같은 대학의 공간 배치와 풍경이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과거 ‘저항의 진지’를 상징했던 대학 공간의 의미가 그와 대립되는 ‘자본주의적 소비 공간’으로 급격히, 아무런 단절의 고통 없이 전화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1)
삶의 물질적 토대인 공간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주체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리를 취하기가 쉽지 않다. 근대 학문체계에서도 시간담론에 비해 공간담론은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해왔다. 이는 “자신이 공간적인 은유에 사로잡혀 있다고 고백하는 푸코(Foucault)조차도 ‘공간은 죽은 것, 고정된 것, 비변증법적인 것,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 ‘시간은 풍부하고 비옥하며 살아있는 변증법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언제 그리고 왜 발생했는가에 대하여 의아해”2)했다는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르페브르(H. Lefebvre)는 이렇듯 공간을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할 단순한 ‘빈 공간’으로 인식하는 일상적 사고의 공허함을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논리적-수학적 공간론의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공간 개념과 대비되는 실천적-감각적 영역으로서의 ‘사회적 공간(social space)’ 개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며, 따라서 특정한 사회적 관계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공간을 생산한다. 예컨대 가치증식이라는 보편법칙 하에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사회적 관계를 측정 가능한 상품들(교환가치)의 관계로 추상화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그에 상응하는 ‘추상 공간(abstract space)’을 생산해낸다.3)
이렇듯 공간이 사회적 ‘생산물’이라면, 공간은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와 계급투쟁을 반영하여 만들어지고, 따라서 공간의 생산과정은 곧 권력구조를 재배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공간은 공간의 의미를 둘러싼 재현과정에서의 권력관계를 함축하며, 공간의 배치와 주체화의 기제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4) 따라서 공간에 대한 인식은 자본의 축적 전략이라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제도적/정책적 개입, 그리고 공간의 의미를 둘러싼 담론상의 재현과정과 공간의 배치에 의한 주체화의 과정으로서 총체적으로 사고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글은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대학 공간의 변화가 대학 발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맑스를 좇아 ‘왜 그 내용이 그러한 형태를 취하는가?’, 즉 ‘왜 현 시점에서 기업 자본에 의한 건물 신축과 소비 공간화라는 형태로 대학 공간의 변화가 진행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통해 대학 공간이 자본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갈등의 장소라는 것, 그리고 대학 공간의 변화가 그에 따른 일종의 구조적 효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대학 공간의 변화가 노동의 유연성을 지상 목표로 삼는 신자유주의적 노동력 재생산의 메커니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대학 공간의 재편에 있어 가장 극명한 변화를 보여주는 고려대의 공간 분석을 중심으로 대학 공간을 소비 공간으로 재편하는 흐름 이면에 깔린 자본의 노동력 재생산 전략 및 신자유주의적 대학 정책과의 친화성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역공간(liminal space)/추상공간/가시성의 배치 등의 개념을 통해 변화된 대학 공간의 성격이 의미하는 정치적 함의, 그리고 그러한 공간적 배치가 대학주체의 주체화 과정에 끼치는 영향을 추적할 것이다.
2. 대학 공간의 상품화와 신자유주의적 대학 재편
르페브르의 문제의식을 경유하여 공간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시도한 하비(D. Harvey)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간생산 논리가 ‘공간의 상품화’에 다름 아님을 설파한다. 공간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자본의 끊임없는 이윤창출의 도구로서 공간이 이용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과잉축적의 위기를 벗어나 자본회전속도를 가속화하기 위해 물리적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에 자본투자를 한다든지(이른바 ‘공간적 돌파 spatial fix’), 상품소비 공간을 세련되게 꾸며 소비를 가속화하는 것(이른바 ‘문화적 돌파 cultural fix’) 등을 말한다.5)
바야흐로 대학 공간은 명시적이고 노골적인 ‘상품화’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 공간의 변화를 자본 축적 전략이라는 일면적 요인만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우선 이론적 난점으로서 그러한 관점은 자본의 일반적인 축적 전략이 어째서 상이한 사회적 공간 형태를 구성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관철되는가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6) 따라서 대학으로의 기업 자본 침투는 이윤창출을 위한 자본투자라기 보다는 기업이 원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자본의 전략은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에 의한 제도적 보완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개념적 구분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대학 공간의 상품화’ 과정을 각각 대학 공간의 소비 공간화와 대학 자체의 상품화(소위 말하는 ‘대학 마케팅’)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인식론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용하다. 물론 그 둘은 서로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상호적 관계이다. 이를 통해 연구 공간으로서의 대학 공간을 마치 쇼핑몰처럼 세련되게 치장하는 논리와 대학의 건물 신축 열풍이 주로 기업자본의 투자에 의존하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학 공간의 소비 공간화 - 고려대를 중심으로
먼저 대학 공간의 소비 공간화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첨예한 변화를 보여주는 고려대를 찾아가도록 한다.
새롭게 개통된 지하철 6호선을 타고 ‘고대입구’ 역에서 내린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에스컬레이터의 출구는 고대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외벽을 끼고 돌아 새롭게 단장한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길을 택하겠다. 정문으로 가는 동안 길 건너편 상가들을 보니 몇 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낡고 궁색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정문에 도달하니 전혀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흙먼지 날리던 예전 대운동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시원스런 분수대를 필두로 잘 정리된 푸른 잔디밭이 구획을 이루고 있는 깔끔하고 웅장한 중앙광장이 펼쳐진다. 유럽의 잘 가꾸어놓은 공원에 들어선 듯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저 멀리 소실점의 끝에 유서 깊은 본관건물이 올려다 보인다. 전체적으로 본관과 분수대를 축으로 대칭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어 차분하고 질서정연한 느낌을 준다. 잔디밭 구역 주변에 조경해 놓은 나무 그늘 밑으로는 벤치들이 들어서 쉴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이제 중앙광장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 보자. 중앙축선을 기준으로 좌우측에 각각 입구가 있으나, 우리는 좌측 입구를 이용하겠다. 지하로 내려가면 로즈버드 커피전문점과 서점, 24시간 편의점, PC방 등의 편의시설이 보인다. 우측으로 나있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는 각종 행정편의시설과 열람실이 들어서 있다. 열람실은 학생증이 없으면 못 들어가니 복도를 따라 우측으로 계속 이동해보자. 잠시 걷다 보면 어느새 100주년기념 삼성관 지하 라운지에 도달해 있다. 원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고미술 전시실, 고려대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 최첨단 환경을 갖춘 멀티미디어실 등이 나온다.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와 지하철 환승통로를 연상케 하는 복도를 따라 계속 걷도록 하자. 복도 중간 지점 내려가는 계단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또 다시 작은 규모의 라운지가 등장하고, 학생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LG-POSCO 경영관이다. 한 층 올라가니 유명한 ‘이명박 라운지’가 나온다. 이쯤에서 지하공간을 벗어나 건물 밖으로 나가기로 하자. 현관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면 경영대생을 위한 고급스런 도서관을 볼 수 있다. 현관 라운지를 지나가다 보니 벽에 걸린 여러 대의 대형 LCD에서 세계 각국의 뉴스를 방영해주고 있다.
꽤 먼 거리를 이동해서 피곤하다면, TIGER PLAZA에 입점한 스타벅스에 가서 아이스커피를 한 잔 마실 수도 있다. TIGER PLAZA에는 그 외에도 던킨 도너츠나 패밀리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어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이공계 캠퍼스에는 고려대의 등록금 수납 은행인 하나은행에서 자금을 댄 하나스퀘어가 지난해 공사를 마쳤다. 역시 지하의 넓은 공간을 활용한 하나스퀘어에는 열람실, 세미나실과 함께 버거킹과 영풍문고, 피트니스 센터 등이 들어서 있다.
지금까지의 동선을 반추해보면 새로운 공간 배치와 구성이 대형몰(mall)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코엑스몰이나 고속터미널 센트럴파크와 같은 대형몰들은 광대한 공간 안에 백화점, 쇼핑몰, 문화 공간, 지하철 등의 공공 공간이 한데 혼합되어 있는 구조를 취한다. 이러한 몰의 공간 구성은 폐쇄성과 근접성을 특징으로 한다. 몰은 외부와 분리된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공간으로서, 외부의 더운 날씨, 짜증스런 교통 혼잡과 대비되는 깨끗하고, 안전하고, 화려한 천국 같은 내부이다. 또한 몰은 쇼핑, 문화생활, 사회적 상호작용 등 방문객의 다양한 필요와 욕망의 대상들을 서로 인접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최대한 방문객의 발길을 사로잡아 놓는 곳이다.7)
한 고려대생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몇 년 사이 학교에 학생 수가 많아진 것 같다는 느낌을 피력한다. 정원이 늘지 않은 이상 학생 수가 늘어나진 않았을 테고, 몰링(malling)의 효과로 더욱 많은 학생들이 한정된 공간 안에 머물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일 것이다. 이제 굳이 학생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러 학교 앞 커피숍에 들르지 않아도 되고, 친구들과 PC방에 가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며, 운동을 하기 위해 집근처의 스포츠센터를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고려대에 사람이 많아진 이유는 방문객의 증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지하철과 연계되어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아름다운 캠퍼스를 찾는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대학 공간의 상업화, 소비 공간화는 비단 고려대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연세대 학생회관 2층의 글로벌 라운지를 보면 “한쪽 벽면은 LG LCD TV 14대와 대형 TV 한 대로 구성돼 있고, 입구 쪽에는 스탠딩 PC가 즐비”하다. “모니터가 붙어 있는 보드마다 STX, 동아제약 등 지원 기업의 이미지(CI)와 광고가 반복되는 LCD 화면이 붙어 있다.” 이화여대에는 지난 2004년부터 ‘Ewha Campus Center(ECC)’ 건설이 한창인데, 학교측은 이 건물에 “푸드코트를 마련하기 위해 모 기업과 접촉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부산대학교는 캠퍼스 안에 쇼핑몰 건물을 짓는 공사를 시작하고 임대분양 광고를 냈다.”8)
이러한 현상들에 비추어볼 때 이제 대학 공간의 소비 공간화는 주지의 사실이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 듯이 보인다. 소비 공간은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 즉 미학적 차별성을 강조하게 되고, ‘필요’의 원칙이 아닌 ‘욕망’의 원칙을 이용한다. 소비 공간화의 행로를 따르고 있는 대학 공간 또한 대학 구성원들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치 활동 공간이나 학습 편의 시설보다는 ‘욕망’을 자극하는 각종 상업시설을 유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욕망 창출의 가장 효과적인 기제로서 ‘스펙터클’9)이 동원되고, 그에 따라 대학 풍경이 스펙터클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학 공간의 상품화와 스펙터클의 동원은 그 공간을 점유한 주체들에게 은연중에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출한다. 몇 년 만에 고려대를 방문한 한 여학생은 “하이힐을 신고, 잘 차려 입은 후 학교에 나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과거 대학 공간의 특징이었던 공동체성이나 저항성은 ‘이미지’와 ‘스타일’을 중시하는 소비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 고려대 곳곳에 들어서 있는 라운지들은 특정 소속원들의 공유 공간인 동아리 방이나 과실과 달리 익명의 다수가 불규칙적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공간이다. 그 곳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큰소리를 내지도 않고, 조용히 이어폰을 꽂은 채 책을 읽거나,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로 작업을 한다. 원하기만 하면 각 개인들은 열람실, 라운지, 커피숍 등을 오가며 공동체에 휩쓸리는 법 없이 개인주의적 대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대학생들의 탈정치화 성향은 이런 공간 구성과 그로 인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간의 변화는 공간의 ‘의미’의 변화를 수반하고, 매일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다국적 기업의 체인점과 상업시설들은 대학을 ‘소비 공간’, ‘자본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을 유발하지 않는다. ‘이명박 라운지’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100주년기념 삼성관에서 취업 공부를 하는 주체가 정치적 활동을 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그의 라이프스타일과 좀처럼 조화를 이루기 힘들 것이다.
2) '대학 마케팅'과 기업 자본의 침투
자본의 욕망에 몸을 맡긴 공간은 단순히 상품의 소비를 촉진하는 수준을 벗어나 직접 공간 자체를 소비의 대상으로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대학 자체를 소비자(수험생)에게 적극적인 구매 대상으로 ‘마케팅’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대학 경쟁력 강화’를 기치로 내건 각 대학들은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와 마케팅에 나서고(모교 연예인을 활용한 홍보 전략), 지하철 역명을 둘러싼 갈등을 벌이고10), 스펙터클한 외관의 캠퍼스로 수험생을 유혹한다. 이는 실질적인 교육 여건이나 교육의 질보다 대학의 이미지를 광고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후기 자본주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욕망 창출의 가장 효과적인 기제는 스펙터클의 동원이다. 고층빌딩과 상업광고로 도시공간을 장악한 스펙터클이 뒤늦게 대학 공간에 이식된다. 따라서 변화는 무엇보다도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신축 건물과 리모델링으로 인한 대학 풍경의 변화에서 첨예하게 감지된다. 빛바랜 외벽과 우중충한 콘크리트 건물로 표상되던 대학 캠퍼스들은 바야흐로 환골탈태중이다. 고려대의 경우 주요 건물의 외형을 중세시대의 고풍스런 석재 건축물처럼 리모델링하여 마치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레고 블록을 연상케 한다.
대학은 이러한 건물 신축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부분 대기업의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다. 한 경제 주간지 조사에 따르면 삼성의 경우 “90년대 서울대 호암관을 시작으로 2008년 완공예정인 연세대 120주년 기념도서관까지 포함해 지원 규모가 총 1000억여원에 달하”며, “LG는 고려대 LG-POSCO 경영관 등을 포함해 총 600억원가량을 지원했다.” 또한 “포스코 500억원, SK는 300억원가량을 지원했고, 신세계도 이화신세계관 건립을 위해 150억원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다시 각 대학별로 살펴보면 서울대는 “포스코생활체육관, SK경영관, LG경영관, CJ어학연구소, LG연구동, SK텔레콤연구동, 호암관”을 지원받았고, 연세대는 “삼성관, 상남경영관”, 이화여대는 “이화SK텔레콤관, 이화삼성교육문화관, LG컨벤션홀, 이화포스코관, 이화신세계관, 이화삼성캠퍼스”을 기업으로부터 기부 받았다.11)
고려대의 경우 2005년에 발간한 「개교 100주년 기념 건축사업 보고서」12)에 따르면 2001년도 이후 100주년기념 삼성관, LG-POSCO 경영관, TIGER PLAZA 등 1캠퍼스에만 총 12개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했다. 이 중 기업 명칭이 들어간 건물들은 기업 기부금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이며, 그 외 동문들의 발전기금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기부금 액수에 따라 기부자에게는 일정한 예우가 제공되는데, 단일 건물의 건축비를 기부하면 “기부자의 의사에 따라 건물 명칭에 기부자의 이름을 명명”해주고 “기부자의 기념물을 제작 비치하여 고귀한 뜻을 영구히 보존”하며, 10억원 이상을 기부하면 “기부자의 사진, 약력, 기념물, 유품 등을 본교 내에 소장하여 영구히 기리”는 정책을 시행중이다. 심지어 기자재 구입비용을 기부해도 “기자재에 기부자의 명패를 부착해”주는 예우조항에 있으니, 학내의 책․걸상 하나에도 동문들의 고귀한 뜻이 아로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13)
LG-POSCO 경영관 내로 들어서면 호텔 로비를 방불케 하는 고급스런 양식의 라운지를 볼 수 있다. 모든 테이블에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전원장치가 내장되어 있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스탠딩 PC들이 따로 늘어서 있다. 조용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마치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로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그 곳이 바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이명박 라운지’이다. LG-POSCO 경영관내 강의실 정문마다 기부자의 이름이나 기업명을 딴 강의실명이 새겨져 있는 것도 이러한 예우정책의 일환이다.
이러한 기업의 건물 기부를 단순히 기업 이미지 제고와 홍보 효과를 위한 것이라거나, 기업과 대학당국이 내세우듯 교육 여건 개선과 학술 진흥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지극히 순진한 판단이다. 기업은 건물을 기부하는 대신 ‘산학협동’이라는 명목으로 대학에 침투해 그들이 원하는 ‘인재 맞춤형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노동력의 초기 교육비용을 일정 부분 대학에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서강대는 최근 삼성전자와 반도체 전문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반도체 트랙’ 협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는 서강대에 5억원의 운영기금과 30여명의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을 제공하고, 대학은 삼성이 원하는 ‘맞춤형 인재’를 제공하는 식이다. 하이닉스는 한양대 전자, 재료, 물리, 화학 분야 학부생 중 20여 명을 선발해 반도체 관련 교과목을 집중 수강케 하고 졸업 후 입사기회를 부여한다. 고려대의 경우 공과 대학원 진학을 앞둔 4학년 때부터 2년간 대학원에서 LG가 주는 과제 연구를 수행하고 장학금을 받는다. 이른바 ‘주문형 석사’ 제도이다.14) 이는 대학이 취업 전부터 기업의 인력 교육을 대신해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기업의 기부금을 받는 대학, 기업으로부터 직접적인 장학금 혜택과 과제를 받는 대학생, 그리고 그 기업의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신자유주의적 대학 재편과 노동력 재생산
‘대학의 상품화/기업화’는 대학에 경쟁원리를 도입하려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에 의해 적극적으로 지지되며, 또는 그러한 정책의 결과이기도 있다. 앞서 인용한 경제 주간지의 기업 기부금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기업과 대학은 자본주의의 양 축이다. 대학에서 좋은 인재가 나와야 기업에서 적극 활용할 수 있고, 열악한 재정에 허덕이는 대학들은 기업의 자금 지원이 절실하다.” 대학의 역할이 무엇보다 기업이 원하는 경쟁력 있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임을 자명한 당위적 사실로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당위적 진술 앞에 교육의 공공성이나 전인교육에 대한 논의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교육부가 발표한 문서와 제정한 법령을 중심으로 한국 대학정책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분석한 임재홍에 따르면 “최근 10여년간 전개된 우리나라 대학교육정책의 흐름을 정리하면 대학의 국제화와 경쟁력강화이며, 그 구체화는 신자유주의정책을 대학에 이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대학정책의 최상위개념은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유능한 인재의 양성”15)이다. 이러한 취지는 “2001년 1월 종래의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을 개정한 것”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16) 즉, 대학 제도의 합리화나 교육 여건의 개선보다 ‘경쟁력 있는 노동력의 창출’이 최상위의 목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을 양산하기 위한 교육부의 해법은 간단하다. 대학에 ‘경쟁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이다. 임재홍은 교육부가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 도입한 정책들을 크게 ‘대학(원)의 국제적 경쟁’,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간의 경쟁’, ‘대학 내에서의 경쟁’, ‘교수간의 경쟁’으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하에 교육의 공공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음을 비판한다.17) 예컨대 대학 내 경쟁에 해당하는 학부제의 경우,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1~2년간 대학생활을 한 후 자신의 세부전공을 선택하게 한 결과 학생들의 수요가 적은 과목이나 전공은 폐지되거나, 폐지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외형적으로 총장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각 단과대학으로 이전하는 듯이 보이는 독립채산제의 경우에도 형식적인 권력분배 이면에 단과대학별 경쟁을 도입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18)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과 대학에 침투한 기업 자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지점이 바로 ‘경쟁력 있는 노동력의 창출’이라는 지상최대의 목표에서이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최선의 방편은 무차별적인 경쟁의 도입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자본의 공간 이동성이 가속화되고, 금융자본에 의한 자본의 국제화와 단일한 세계시장이 형성되면 지역 내부투자를 유인하려는 ‘지역간 경쟁’이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19) 이런 맥락에서 대학의 상품화 또한 신자유주의적 경쟁 메커니즘의 도입에 따라 표출된 ‘대학간 경쟁’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유연적 축적을 자본 축적 전략으로 삼는다. 유연적 축적 하에서의 노동조건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구조적 실업’, 급격한 숙련의 파괴 및 재구성, 실질임금의 적당한 상승, 그리고 포디즘 체제의 정치적 기둥 가운데 하나인 노동조합 세력의 통제를 의미”20)한다. 노동의 유연성에 의한 고용 조건의 불안정과 노동 강도의 강화는 노동주체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억압으로 다가온다.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경쟁 메커니즘은 이러한 노동의 유연성을 강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가 부과하는 불안정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은 경쟁의 압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의 창출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밑바탕에 깔린 진정한 의도는 ‘경쟁을 감내하는’ 노동력, ‘노동의 유연성을 받아들이는’ 순응적이고 타협적인 노동력의 창출이다. 이는 최근 기업들이 직무 내용과 상관없이 일정 수준의 토익 점수와 높은 학점을 요구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높은 토익 점수가 영어 실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높은 학점이 우수한 업무 능력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기업들이 요구하는 것은 창조적이고 전인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기존 체제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그 목적이나 가치를 따지지 않고 묵묵히 따르는 체제 순응적 노동력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노동력 재생산 전략과 앞서 살펴본 대학 공간의 상품화가 대학주체들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데에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구조적 병폐인 학벌주의와의 관련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학벌 경쟁 속에서 대학주체는 대학의 가치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기에 대학간 경쟁의 수단인 대학의 상품화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으로의 기업 자본 투입과 대학 공간의 상품화가 대학 발전의 지표라고 인식한다. 이는 이들이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이 내세우는 경쟁력의 이데올로기 또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개별 자본가간의 ‘경쟁’은 추상적인 수준의 가치법칙을 현실에 구체화시키고, 이후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동하면서 자본의 비인격적 운동을 촉발시키고, 상품들의 관계 이면에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이에 따라 경쟁에 편입된 개별 자본가는 끊임없이 특별잉여가치를 생산해내야 하는 구조적 압력에 처하게 되고, 그 영원한 순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경쟁은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공간을 끊임없이 자본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에(세계시장의 형성), 이 흐름을 끊으려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공간이 새롭게 생산되어야만 한다.
반면 학벌경쟁의 경우 평준화나 국․공유화 등의 정책을 통해 경쟁의 흐름을 끊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존재한다. 이윤추구의 논리인 경쟁의 논리는 동등하고 평등한 교육 여건의 제공을 목표로 하는 대학 공공성의 이념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대학 공공성 확보는 이러한 무한경쟁의 고리를 끊는 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21)
3. 역공간(liminal space), 추상적 공간으로서의 대학 공간
대학 공간이 단순히 소비 공간과 노동력 재생산의 장이라는 성격만 갖는 것은 아니다. 대학 공간은 다른 사회적 공간과 마찬가지로 배치의 변화와 그로 인한 의미 변화가 발생하는 장소이며, 공간의 전유와 활용을 둘러싼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역공간, 추상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최근 진행되고 있는 대학 공간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고, 그 정치적 함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공간의 배치에 따른 고유한 가시성의 배치는 그 자체 특정한 권력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보는 자는 언제나 보이는 자보다 우월하다. 이에 따라 대학 공간에서 은폐된 풍경을 찾아냄으로써 그 이면에 놓인 권력 관계를 드러낼 것이다.
역공간이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문화와 경제, 시장과 장소 등을 가로지르고 결합하는 공간”22)이다. 이러한 역공간의 대표적인 사례가 소비문화공간이다. 예컨대 코엑스몰이나 센트럴파크는 노동공간도, 문화공간도, 소비만을 위한 공간도 아닌 복잡한 영역으로서 역공간의 성격을 띤다. 마찬가지로 지하철역과 연계된 백화점들은 사적 공간도 아니고 공공 공간도 아닌 모호한 경계를 생산한다.23) 이러한 역공간 개념은 모두에게 열린 중립적 사회공간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모순을 은폐하는 부르주아적 경관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했다.
고려대의 공간 배치에서 우리는 이러한 역공간적 성격을 볼 수 있다. 고려대 중앙광장은 재학생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출입이 허용된 공간이다. 분수대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고, 고풍스런 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중고생들이 핸드폰 사진을 찍으며, 산책 나온 주민들이 한가로이 거닐곤 한다. 방문객들은 지하 광장의 커피전문점, 화장실, 편의점 등에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있으니 중앙도서관과 열람실들이다. 각 단과대학 열람실을 비롯하여 모든 도서관과 열람실에는 입구에 바코드 인식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고대 재학생이 아니면 출입이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중앙도서관을 제외한 외부 열람실을 지역주민에게 개방하는 대학들이 많았으나, 이제 대부분의 대학들이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이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가 선택과 배제의 변증법임을 의미한다. 이는 대표적인 소비 공간인 백화점의 전략과도 유사하다. 백화점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며, 지하철역과 연계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지나쳐가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출입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거지나 노숙자 등은 출입이 제한된다. 그래서 백화점 공간으로 진입하지 못한 거지와 노숙자들은 백화점과 지하철역의 경계 부근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고려대 방문객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 또한 실질적으로 중앙광장 외에는 상업시설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차별적 접근성은 그 공간을 점유한 구성원들에게 고유한 정체감을 형성한다. ‘고대인의 자부심’은 차별적으로 공간을 향유하는 데에서도 그 근거를 마련한다.
이러한 광장 개방의 효과는 부수적인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 광장이 일종의 지역 공원화되면서 과거 대학을 특징짓던 광장 정치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재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평화로운 산책 장소로서의 중앙광장은 그 곳을 정치 투쟁의 장소로 점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한다. 이는 예컨대 집회 공간으로의 공간 전유를 막기 위해 여의도 공원이나 시청 앞 광장을 공원화한 것과 유사하다. 과거 거리로 뛰쳐나가는 출발점이었던 고려대 정문 앞 대운동장이 중앙광장으로 변한 것은, 그 공간의 정치적 의미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이제 ‘대학생들이 정문을 뛰쳐나왔다’는 표현은 예전과 같은 울림을 주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광장의 소멸은 민주주의의 소멸, 그리고 그 자리를 전유한 소비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실례로 중앙대의 경우 학우들의 이동이 가장 빈번한 곳이며 시선이 집중되는 위치로서 각종 집회의 장소였던 해방광장이 어느 날부터 주차장으로 전용되었다. 그 후로는 학내에서 집회를 조직하려 해도 광범위한 참여와 관심을 끌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 폭력적인 개입이나 이데올로기적 억압 없이 단지 공간의 용도를 전환시킨 것만으로 정치적 행위의 조직 가능성을 불식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로서 ‘합리성의 논리’가 개입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광장의 주차장으로의 공간 전용은 ‘관료적 합리성’의 담론에 의거해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 최근 각 대학들은 사법고시나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별도의 공부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이런 공간 주변에서는 소음 생산이 엄격히 금지된다. 여기서도 타인의 사적 공간에 대한 침입을 금기시하는 부르주아적 추상 공간의 ‘합리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24) 따라서 최근 대학 공간의 재편에는 자본주의적 소비 공간으로의 변화와 함께 ‘근대적 합리성’에 입각한 추상 공간으로의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시각이론에 따르면 근대적 공간인 “원근법의 공간은 내용이 사상되고 형식만 남는 추상화와 사물화라는 의미에서 합리화된 공간이고 또 의미 상실과 계산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목적 합리성에 의해 조직되는 합리화된 공간”25)이다. 즉 원근법적 공간은 “외부의 관찰자에 의해 포착된 공간이며, 그 내부의 인간적 삶이 거세된 탈-육화된 공간이자,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등질적으로 분할된 추상 공간”26)이다. 이러한 원근법적 공간에서 바라보는 주체가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외부 세계를 연장으로서의 순수 공간으로 환원하여 그것에 보편적 질서를 부여하는 근대적 합리적 주체, 즉 데카르트적 주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대 중앙광장의 구도가 일종의 원근법적 경관을 구성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고대 중앙광장은 정문에서부터 소실점의 자리에 위치한 본관에 이르기까지 대칭적으로 구획된 잔디밭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높아지다가 본관 근처에 이르러서는 계단식 층을 이루는 구조이다. 이러한 가시성의 배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본관에 모종의 권위를 부여하게끔 하며, 그 공간이 합리적으로 질서 잡힌, 따라서 그러한 질서를 보존해야 할 공간임을 암암리에 드러내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가시성의 배치, 즉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은폐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 기저에 작동하고 있는 권력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예컨대 “풍요와 화려함을 전시하고 기표들의 유희로 가득 찬”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소비 공간들(압구정, 홍대 앞)은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적 무대 뒤편으로 추방하고 보이지 않게 덮어버리는 공간들이기도 했다.” 예컨대 대단위 쇼핑공간과 아파트 단지는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도시 빈민들의 판자촌을 밀어내면서 지어지고, 박정희정권은 “많은 고물상들이 밀집해 있던 황학동 시장이 고가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에서 보이지 않게 가려버렸다.”27)
그렇다면 대학 공간에서 은폐되는 풍경은 무엇일까? 바로 대학 공간의 환경미화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본부가 아닌 외부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다. 법적 책임이 없는 대학은 그들의 노동조건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에겐 휴식공간조차 마련되지 않거나 눈길을 끌지 않는 곳에 겨우 자리 잡는다. 대학 공간의 합리적이고 세련된 외관은 이른 새벽부터 행해지는 그들의 노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4. 마무리
과거 대학의 공간은 그 의미가 유동적이고, 불변적이며, 개방된, 일종의 ‘카니발적인’ 공간이었다. 광장은 축제의 장이자 정치 집회의 장이었고, 잔디밭에서는 주점이 펼쳐졌으며, 대학 본관은 상황에 따라 점거해야 할 공간이었다. 동아리방이나 학생회실은 늦은 밤 아무 때나 들어가 쉬는 곳이었고, 공동체 생활의 터전이었다. 반면 의미가 선험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간주되는 추상 공간에서는 주체가 그 장소에서 취할 수 있는 행위의 스펙트럼이 일정하게 제약을 받는다. 금줄 쳐진 잔디밭을 주점 장소로 활용한다든지,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평화로운 중앙광장에서 정치 집회를 연다든지, 등록금 투쟁을 위해 본관을 점거한다든지 하는 공간적 실천은 이제 그 공간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불합리한 행위가 된다. 따라서 공간을 새롭게 전유하려는 공간적 실천은 공간의 의미/상징을 변화시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부정적 의미에서 대학 공간의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고려대에서 우리는 공간의 의미를 변용시키려는 정치적 실천의 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고려대 본관 앞에는 다소 흉물스럽게 보이는 파란색 천막 한 채와 흰색 천막 두 채가 1년 넘게 들어서 있다. 작년 4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박사학위 수여식에 반대했던 7명의 학생들이 이후 보건대 투표권 논란과 관련하여 교수들을 ‘감금’하였다는 이유로 출교조치를 당한 사건이 벌어졌었다. 이에 불복하는 학생들이 본관 앞에서 1년 넘게 천막 농성중인 것이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본관 앞을 농성장으로 택함으로써 중앙광장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시각장 내에 일종의 오점/얼룩을 형성한다. 이들 천막의 존재로 인해 합리적이고 등질적인 추상적 공간이라는 신화가 깨지고, 그 곳이 갈등과 투쟁을 은폐하고 있는 기만적인 장소임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르페브르는 “예전에 비해 오늘날에는 계급투쟁이 더욱더 공간 속에 각인되고 있다. 실제로 오로지 계급투쟁을 통해야만 추상적 공간이 지구 전체를 접수하고 급기야 모든 차이들이 말소되어버리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28)고 설파한다. 계급투쟁만이 모든 공간의 장소적 특질/차이를 무시하고 상업화의 공간으로 등질화하는 자본의 공간생산 전략을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정치 투쟁의 장이었던 대학 공간은 자본주의와 관료적 합리성에 의해 마름질되지 않은 차별적인 질적 특징을 지닌 공간이었다. 그러한 대학 공간의 의미를 복원시키는 것 또한 공간적 실천을 통해 대학 공간에 갈등적, 투쟁적 성격을 기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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