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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재灰 > 그들의 정향(定向)을 보다: 쿤데라, 발마스, 로쟈

 

혹(惑)하여, 괴테의 <파우스트>를 구입하려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읽게 된 로쟈의 글을 무단으로 옮겨왔다. 허락없이 함부로 옮겨와 예의에 어긋났다.

쿤데라, 발마스, 로쟈. 이 셋은 텍스트 하나에 대응하는 해석 주체의 넓고도 조밀한 인식틀을 가졌다. 아래 긴 글은 이언 와트의 책에 대한 쿤데라의 토막글, 지젝의 책에 대한 발마스의 토막글, 그 두 토막글에 대한 로쟈의 충돌을 담고 있다.

쿤데라의 고전주의적 자세의 허실, 아도르노, 푸슈킨 등이 쿤데라에 대한 로쟈의 충돌이다. 그의 충돌은 발마스가 제기한 지젝에 관한 몇 가지 쟁점(문화산업과의 친연성, 사례로서의 대중문화와 이론의 혼돈, 알튀세르와 라캉의 논쟁에 대한 시선의 밀도)에 대해서도 일어난다. 두 충돌 모두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비판할 것에 대해서는 가만있지 않는 끈덕짐을 확인한다. 로쟈의 충돌에 대한 쿤데라와 발마스의 궁극적인 반격 혹은 답변은 그 둘이 쓰지 않고(/못하고) 있는 글의 쓰여짐에서나 가능할 듯하다. 그 답변이 가능할 때쯤, 로쟈 또한 다른 충돌을 예비하고 있을 것이다.

쿤데라, 발마스, 로쟈. 그들 셋의 정향(定向)을 스치듯 확인케 하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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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면서 재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을 했던가 잠시 둘러보다가 '두 개의 서평에 대하여'란 페이퍼에 눈길이 머물렀다.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다가 지금은 비공개로 돌렸던 것인데,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바로 언급이 되지만, 제목의 두 서평은 각각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와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관한 것이다. 그럼 2년전 가을로 되돌아가보도록 하겠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카피해온 두 개의 서평에 대해서 몇 마디 참견하도록 하겠다. 하나는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문학동네, 2004)에 대한 쿤데라님의 서평(다음카페 ‘비평고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에 대한 발마스님의 서평(‘알라딘’)이다.

특별히 두 서평에 대해서 참견하는 것은 이 책들이 현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전자는 최근에 내가 읽고 싶어한 책이며, 후자는 최근에 다시 읽고 있는 책이다). 서평들은 내게 유익했던 만큼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바, 그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자 하는 것. ‘-’로 시작하는 문단은 인용이며(인용문의 오타들은 교정했으며, 필요에 따라 야간의 수정을 가했다), ‘*’를 단 건 참견의 말들이다). 먼저, 쿤데라님의 서평을 따라가 본다.

-<소설의 발생>으로 유명한 영문학자인 이언 와트의 책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유용한 교양서다. 즉 이 책은 특별한 문학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심지어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들, 말로/괴테의 <파우스트>, 티르소의 <돈 후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은 사람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저자가 작품 줄거리까지 제공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학자인 것 같다. 그 이 책의 말미에서 대중매체에 의해 저하되고 있는 독서인구에 대한 한탄하고 있다. “ 이 점은 대학교수로서의 나의 경험에 비춰보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학생들이 매우 유명한 책들 - 이를테면 <돈키호테>나 <로빈슨 크루소> - 을 당연히 읽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누군가 그 책을 읽었다면 다른 강의에서 그 책을 다루었기 때문인 것이다.”(384쪽)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바로 이런 세대들을 위한 책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엔 어떤 순진함,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가 아무리 중요성을 설파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돈키호테> 따위는 읽지 않을 것이다(*쿤데라님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의 이문열 옹호론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사람들이 너나없이 <돈키호테>를 읽는 분위기였다면 쿤데라님은 거꾸로 <돈키호테> ‘무용론’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것이 소위 ‘키호테주의’일 것이다).



 

 

 

-<돈키호테>를 읽지 않더라도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으며, 비평가가 될 수 있으며, 문학박사학위도 받을 수 있다(*쿤데라님이 굳이 억울할 일은 무엇인가?). 그런데도 이언 와트는 근대문학의 대표적 네 유형을 마치 대단한 가치가 있는 유산처럼 다루고 있다. 그의 조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그럼에도 쿤데라님 또한 “고전을 읽자!”는 모토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조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안쓰럽다. 거기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어떤 순진함과 시대착오이다. 거꾸로, 필요한 사람은 다 읽으며 읽기 마련이다. 쿤데라님이 굳이 안쓰러워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책의 원제는 'Myths of Modern Individualism'이다. 흔히 하는 식으로 번역하자면,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자들은 <근대 개인주의 신화>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근대의 개인주의 신화’로도 읽힐 수 있으며,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로도 읽힐 수 있다. 또 ‘근대’ ‘개인주의’ ‘신화’라는 키워드의 나열로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방하며, 어느 것을 선택해도 의미 차이는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액센트를 문제 삼는다면, 당연 중심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놓여진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주의’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19세기(다시 말해 낭만주의 이후)이다. 물론 단어상의 의미로 볼 때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도 개인주의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의’ 개인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어 자체가 근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근대(Modern)’를 붙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여긴 그냥 넘어가도 될 듯하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 중에 <나의 개인주의>라는 유명한 강연문이 있다(*최근에 번역/소개된 걸로 안다). 여기서 소세키는 ‘개인주의’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 단어를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 말하고 주의를 주고 있다. 그가 이런 주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본래 ‘개인주의’가 어떤 ‘경멸적/비하적’ 단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상 ‘개인주의자’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반동적 가톨릭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라고 한다. 그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지적 분위기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이 단어를 썼다.

-왕당파였던 발자크도 ‘개인주의’를 경멸의 뜻을 담아서 사용하였으며, 벤야민이 <파사젠베르크>에서 높이 평가한 초기 공산주의자 블랑키 역시 마찬가지다(*<파사젠베르크>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번역돼 있다). 이와 같은 단어사용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토크빌에 와서다. 하지만 그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우리말 번역은 <미국의 민주주의> 아닌가? 아마도 쿤데라님은 일역본을 읽은 듯하다). 왜냐면 개인주의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반-전통적 입장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감탄한 미국 민주주의가 개인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점 역시 (*그는)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화(myth)’ 역시 낭만주의 이후의 용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린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특정 신화체계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인 ‘mythology’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사회를 지탱하는 무의식 체계를 의미한다. ‘신화’는 오늘날 별로 인기가 없다. 이를테면 아도르노(<계몽의 변증법>)나 롤랑 바르트(<신화론>)는 ‘신화’가 자본주의적 상부구조의 허위성을 떠받치고 주고 있다고 비판한다(*바르트의 <신화론>의 원제는 ‘Mythologies’이며 <현대의 신화> 등으로 번역돼 있다. 바르트는 myth와 mythology를 혼동하고 있다!). 그런데 와트나 투르니에는 이와 정반대의 의견을 한다. ‘신화’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담보하고 있다고 말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서로 핀트가 다를 뿐이다. 이언 와트나 미셸 투르니에가 긍정하려는 ‘신화’는 주로 문학적 범위에 국한된다(*문화현상 전반에 대한 기호학적 ‘신화’비평을 가하고 있는 바르트는 그렇다 치고, 아도르노의 경우는?).

-이언 와트가 근대의 대표적인 신화로 드는 것은 파우스트, 돈 후안, 돈 키호테,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다. 여기서 우린 시대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로빈슨 크루소 대신 햄릿을 넣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근대적 인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돈 키호테형 인물, 햄릿형 인물로 구분하지 않았던가(*1860년쯤의 한 강연에서였다. 강연문 <햄릿과 돈키호테>는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한 ‘세계 에세이선집’에). 하지만, 그(와트)는 햄릿이 유명한 것은 그의 영향력이나 대표성에서보다는 순전히 ‘문학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라고 거부한다(이는 투르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네 신화 대부분(로빈슨 크루소만 빼고)이 반종교 개혁 시기에 탄생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그것은 개인성을 발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르네상스와 그것의 왜곡인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에서 찾는다. “반종교개혁 사상가들에게 주로 문제가 된 것은 르네상스의 긍정적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합당하지 않다는 현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르네상스의 가치를 계속 추구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환멸감에 빠지거나 혼란상태에 귀착한다는 것이 문제였다.”(189쪽)

-그 증거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개인적 욕망에 의해 모두 ‘벌’을 받는다는 것에서 찾는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언 와트에게 있어 반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의 반대라기보다는 종교개혁을 과격화를 의미한다. 참고로 마녀사냥이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중세가 아닌 바로 이때(종교개혁 이후) 집중적으로 행해졌다는데, 독일에선 루터파가 이를 주도했다. 파우스트는 실존인물로 악마라기보다는 광대나 사기꾼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루터가 그를 악마와 연관시켰고, 그 후 파우스트는 루터적 편견에 따라 구성되어 갔으며 오늘날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파우스트 형상이 완성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악마와 타협하는 파우스트는 루터가 만들어낸 형상에 다름 아닌 셈이다(*맨마지막 주장은 와트의 것인지 쿤데라님의 것인지 모호하다).

-이와 같이 독일에서 형성된 파우스트(<파우스트 서>)는 영국으로 건너가 크리스토퍼 말로에 의해 <파우스트 박사>라는 희곡으로 재탄생한다(*말로의 원작이 <파우스투스 박사>인 듯하지만, <파우스트 박사>로 통일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는 파우스트 이미지는 괴테의 것이 아니라, 말로의 것이다. 말로에 의해 파우스트는 고뇌하는 개인주의자로서의 모습을 갖춘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언 와트가 말로의 파우스트가 탄생할 수 있던 것을 당대 ‘교육의 문제’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16세기는 대학들 갑자기 증가한 시기이다. 영국의 예를 들자면 30년 간(1560년-1590년 사이) 입학생의 수가 무려 3배나 증가했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문제(대학생 실업자 문제)는 오늘날에도 능히 짐작 가능하다. 대학이 부여한 기대치와 사회가 제공하는 빈약한 실현 사이의 간극이 사회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따라서 홉스는 어딘가에서 “반역의 핵심은 대학이다”라고 썼다), 그것이 바로 파우스트에게 반항/고뇌하는 형상(환멸)을 부여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와트에 의하면, 어떤 ‘사회적 잉여’가 파우스트적 형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고학력의 ‘파우스트-백수들’! 참고로, 푸슈킨도 <파우스트의 한 장면>이란 아주 짤막한 ‘드라마’를 썼는데,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 장면으로만 구성돼 있다. 파우스트와 돈 후안은 푸슈킨의 대표적인 자기-이미지이다).

-이언 와트는 파우스트 분석에 이어 돈키호테를 분석한다. 하지만 그의 돈키호테 분석은 파우스트 분석에 훨씬 못 미친다. 이는 그의 능력부족이라기보다는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완결성(완벽성)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 파우스트 신화나 돈 후안 신화는 <파우스트 서>나 티르소의 <돈 후안> 이후에도 새로운 버전으로 읽을 만한(괜찮은) 작품들이 창작되어 나왔으나(말로 <파우스트 박사>, 괴테의 <파우스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몰리에르 <돈 주앙>, 소리야 <돈 후안 테노리오> 등), <돈키호테>에는 그런 쓸 만한 아류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투르니에는 ‘소설 주인공’은 ‘소설가’보다 유명하지 않으나 ‘신화적 주인공’은 ‘작가’보다 유명하다고 주장하고 이언 와트도 그에 동조하지만, 적어도 <돈키호테>만큼은 그렇지 않다.

-세르반테스는 꼭 돈 키호테만큼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의 꽤 괜찮은 다른 작품들이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말이다. 이언 와트는 쩔쩔매면서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무리한 숙제를 해결하려고 끙끙대는 아이처럼.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가 안쓰러웠다(*쿤데라님이 또다시 안쓰러워하는 대목인데, 그의 <돈키호테론>을 기대해봄 직하다). 그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과도한 추상화를 거부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그것이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돈키호테>는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경의의 책이다(*‘경의’는 ‘경이’의 오타일 듯하다). 헤르더는 평생 <돈키호테>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점에서 <돈키호테>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단테의 <신곡> 정도일 것이다.

-참고로, 이언 와트는 세르반테스의 후계자로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백치>)를 들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판의 날에 이승에서의 삶을 이해했는지 또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돈키호테>를 내놓으며 이것이 삶에 대한 나의 결론이라고 말할 생각이다.”(*참고로, 투르게네프가 계속적으로 시도한 것도 돈키호테적 인물을 자신의 소설에서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에서의 바자로프도, 적어도 서두에선, 돈키호테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비록 햄릿적인 인물로 죽게 되지만.)

-다음은 돈 후안에 대해서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 중 하나는 돈 후안이 파우스트처럼 민중설화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티르소의 돈 후안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창조해낸 것보다 더 창조적인 인물이다. 즉 티르소라는 개인이 창작해낸 인물이다. 이는 장 루세의 <돈 주앙의 신화>만 읽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설화와 유사성을 문제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지막 부분(사자(死者)에 대한 조롱과 사자의 방문)뿐이다. 단적으로 말해 거침없는 난봉꾼으로서의 돈 후안은 티르소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인물이다(*내가 알기에 티르소의 ‘공적’은 ‘돈 후안’과 ‘죽은 자의 조롱/방문’이라는 두 가지 신화소를 ‘결합’시켜놓은 것이다. 즉,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티르소의 ‘돈 후안’은 <돈 후안+석상손님>이다. “거침없는 난봉꾼으로서의 돈 후안은 티르소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인물이다”는 와트의 견해인지 쿤데라님의 견해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동의할 수 없는 견해이다. 돈 후안이 “티르소라는 개인이 창작해낸 인물”이라면 ‘돈 후안’은 ‘신화’가 아니다.)

 

 

 



-이점에서 이언 와트의 티르소의 돈 후안 분석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몰리에르의 <돈 주앙>에서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알렌카 주판치치의 말대로 그것은 돈 후안의 가장 세련된 판본일지 몰라도 가장 재미없는 판본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돈 후안 판본은 티르소의 것과 소리야의 것이다(푸슈킨의 것은 너무 짧아 재미니 내용이니 논할 게 없다). 돈 후안에 대해서는 이언 와트의 이 책과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쿤데라님의 개인적인 취향에 대해서 참견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조만간 쿤데라님이 스페인어책을 들고 다니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푸슈킨의 것은 너무 짧아 재미니 내용이니 논할 게 없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는 걸 밝혀둔다. 푸슈킨은 이미 ‘고전’이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 역시 짧아도 텍스트-무한이다. 그리고, ‘간명함’이란 건 거의 푸슈킨의 시학적 원칙이며, <석상손님>은 그래도 ‘소비극’ 중 가장 긴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조만간 올리도록 하겠다. 참고로 푸슈킨의 <석상손님>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돈 후안이 ‘시인’이라는 점이다. <석상손님>의 국역은 <보리스 고두노프> 등에 수록돼 있다).

-사실 몇 달 전 돈 후안에 관한 글을 쓰고자 여러 작품들(티르소, 몰리에르, 푸슈킨, 소리야, 버나드 쇼, 막스 프리쉬 등의 작품)과 장 루세의 연구서를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왜 포기하셨을까 궁금하면서 또한 아쉽다. 재미있는 글이 나왔을 듯한데 말이다. 한편으로 장 루세의 연구서 <돈 주앙 신화>(1978)는 아직 우리말로도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일역본으로는 나와 있는지?) 하여튼 이언 와트의 설명으로 돌아오면 그의 돈 후안 해석 중 한 가지 주목할 게 있다. 그것은 돈 후안의 방탕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죄의식의 부재에 대한 설명이다. 어떻게 해서 돈 후안은 아무런 죄의식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이언 와트는 말로의 <파우스투스 박사>를 설명할 때와 연관지을 수 있는 설명을 한다. 그것은 돈 후안이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청년입니다” (티르소,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손님>(번역서 제목: <세빌랴의 난봉꾼 석상에 맞아죽다)>, 김창환 옮김, 울산대학교출판부, 24쪽)(*또 다른 번역본은 <돈 후안 –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 안영옥 옮김, 서쪽나라, 2002이다). 다시 말해 돈 후안이 죽음(그리고 그로 인한 심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과 심판은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래 동안 지연되리라 믿었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방탕할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언 와트는 <돈 후안>이 사기꾼(방탕아)과 ‘유예된 응보’를 두 축으로 삼고 석상을 통해 이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참고로, ‘돈 후안’ 신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분석으로는 James Mandrell의 'Don Juan and the Point of Honor: Seduction, Patriarchal Society, and Literary Tradition'(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2)가 자세하다. 나는 티르소의 <돈 후안>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는데, 자잘하지만 한국어본과 다른 대목이 많아서 좀 당혹스럽다).



-그럼 여기서 우린 잠깐 다른 스페인극과 <돈 후안>을 비교해 보자. 황금기 스페인극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건의 중심이 ‘명예’에 걸려 있으며, 그것은 자주 딸을 보호(여성의 정절을 지켜주기)하는 아버지(가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린 칼데론의 <살라메아 시장>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돈 후안 역시 당대의 인물들처럼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사실 그가 석상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그로 인해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진다)은 ‘명예’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그의 명예가 공동체(가족)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그는 타인(가족)의 명예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무참히 짓밟기까지 한다), 오직 자신하고만 관계한다는 점이다(*그런 점에서 돈 후안은 ‘청년’이면서 아직 ‘어린애’이다).

-돈 후안은 말로의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청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며 기존 사회체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악마와 결탁하거나 방탕에 몸을 맡기거나 한다. 하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심판(형벌)이 무한한 지연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도덕이 사회체제를 유지시키는 바탕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도덕적으로 ‘무(無)’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언 와트는 파우스트, 세르반테스, 돈 후안을 함께 평가하면서, 이 세 사람 다 편집광적 인물들로 집을 떠난 방랑자(유목민)이며, 이들에게 가정사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며, 그들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인물로 하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수긍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말로의 파우스트와 티르소의 돈 후안이 청년인데 반해, 돈키호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또 파우스트와 돈 후안의 마지막 장면(신성모독에 의한 징계)과 돈키호테의 마지막 장면(임종)은 전혀 관계가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은 설득력이 없다. “이들 세 주인공의 상징적인 최후의 형벌은 반종교개혁 세력이 르네상스 개인주의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려 한 재미없는 교훈이 아닌가 싶다. 최소한 티르소, 세르반테스, 말로 모두 고난과 역경을 겪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모두 외로운 인간이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소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신의 주요 작품에서 결국 실패하고 마는 개인주의의 상징이 되는 영웅을 생산해 냈다.”(201쪽)(*개인주의의 실패는 적어도 ‘돈 후안’에 대한 비평으로서는 유효하다.)

 

 

 



-다음은 <로빈슨 크루소>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그다지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애당초 이언 와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작품 년대가 비슷한 <햄릿>을 선택해야 했다. 그래야 좀더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분석한 후(<소설의 발생>도 이 소설에 대한 분석이다), 그에 대한 패러디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비교한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분석이지만, 나에게는 좀 따분했다. 대신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한 견해에 대해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는 괴물 같은 작품이다. 거기엔 우리가 생각하는 파우스트도 메피스토펠레스도 없다. 축약본이나 공연되는 연극에서는 분량을 이유로 많은 부분을 줄이는데, 그리고 나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아니라 말로의 파우스트가 된다. 해서 이언 와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한번도 괴테 같은 타고난 천재성을 누린 적이 없다. 오히려 괴테에 대해 짐짓 아이러니한 난색을 표하는 츠베탕 토도로프에 동의한다. “괴테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이 발언을 좀 덜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좀더 정당한 것으로 하기 위해선 어쩌면 ‘오늘날에는’이라든가, ‘게르만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고선’이라든가, 아니 어쩌면 훨씬 더 겸손하게 ‘나로서는’ 같은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근대 개인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그것의 엄청난 인기 때문이다.”(293쪽)

-나는 이언 와트의 솔직한 표현에 공감을 표하고 싶다. 솔직히 파우스트나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인물에 중심점을 두고 읽으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이다. 그들을 둘러싼 사건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이는 파우스트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래 전 루카치가 분석했던 것처럼(그리고 그 관점을 이어받은 모레티의 분석처럼) 이 책을 자본주의의 서사시로 읽는다면 사태를 달려진다. 물론 이언 와트도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있고 또 그에 대해 언급도 하고 있다(296-297쪽). 하지만 깊게 들어가지는 않는다. 기억하자. 이언 와트의 이 책은 파우스트라는 신화적 존재에 대한 분석임을.



 

 

 

-이제 마무리를 해보기로 한다. 이언 와트의 이 책은 4명의 근대적 인물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무게중심은 르네상스의 좌절(그리고 그로 인해 환멸감)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 환멸감은 그 뒤를 잇는 로빈슨 크루소를 거치고 루소의 <에밀>이나 괴테와 <파우스트>에 이르러 어떤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징벌적 결론은 사라지고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상태’는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찬양을 받고(루소), 파우스트는 자본가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사회구조에 적대적이었던 젊음은 사회진보의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덧붙이자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루소의 크루소 ‘고독’ 해석이 가진 함의다. 루소는 4대 신화적 인물이 가진 ‘무절제(방탕/광기)’라는 문제를 ‘교육’이란 문제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이후 현대 작품으로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언급된다. <파우스트 박사>는 이전 모든 파우스트 판본(특히 최초의 판본인 <파우스트 서>)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기막힌 뒤집기를 시도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냉소주의자는 아드리안이고, 악마야말로 낭만적 낙관론자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제레누스라는 화자를 내세워 새로운 서사층위를 구축해 내고 있다.

-투르니에 역시 디포의 소설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그 전복의 강도로 말하자면, 정말 놀라울 정도다(들뢰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하지만 이언 와트는 일정 정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왜냐면 투르니에가 프라이데이와 크루소의 역할 바꾸기에는 성공했지만, 디포와 마찬가지로 프라이데이의 ‘내면’은 여전히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떠나길 거부하는데, 이는 프라이데이의 교육적 효과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청춘’(379쪽)이라는 디포적 명제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이언 와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투르니에의 크루소는 진정한 1960년대식 낙오자 영웅이다”(381쪽)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아카데믹한 영문학 연구자의 냄새가 나는 책이다. 친절하지만 규범적이고, 솔직하지만 그뿐이다(*‘아카데믹하다’는 게 ‘친절하고 솔직하다’는 뜻인가?!). 하지만 근대문학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 그것도 네 명을 어떤 연관 속에서 한꺼번에 다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은 실제작품들을 읽기 위한 교양서(개론서)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실제작품은 읽고 나면 이 책의 가치는 빛을 잃을 것이다(*“네 명을 어떤 연관 속에서 한꺼번에 다루었다는 점”의 가치는? 구슬이 너 말이라도 꿰어야…). 그러나 실제작품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럴듯한 교양을 축적하기에는 최상의 책이다(*쿤데라님의 ‘고전주의자’는 ‘그럴듯한 교양주의자’인 것인지?).

(*)쿤데라님의 긴 서평을 길게 인용한 것은 <근대 개인주의 신화>를 한번쯤 읽어보시라는 뜻에서이다(나는 서울에 돌아가서야 읽게 되겠지만). “그럴듯한 교양을 축적하기는 최상의 책”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책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 독일어권 교양서 <교양>만큼 팔려나갈/읽힐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더불어 이언 와트의 출세작 <소설의 발생>도 재출간되었으면 한다. 하긴 거기에서 다뤄지는 책들이 먼저 번역/소개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책의 서두에 나오는 리처드슨의 <파멜라>을 원서를 조금 읽다가 만 경험이 있다(가끔 그토록 많은 영문학도들이 다 어디에 소용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절판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도 굳이 헌책방을 순례하지 않아도 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처지는 “실제작품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품을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더 많다. 왜? 없으니까!.. 이어서 발마스님의 서평(이건 길지 않다).

-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북한에는 세 종류가? 서두에서 알 수 있는 바이지만, 발마스님의 서평은 지젝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이다. 그것도 ‘취향’이긴 하지만, 나로선 그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 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그러니까 발마스님은 ‘문화산업’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지젝은 ‘문화산업’과 아주 궁합이 잘 맞는 관계로 좀 의심스럽다, 라는 게 발마스님의 견해인 듯하다. 그러나 정말로? 지젝이 정말로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으로 너나없이 읽히고 있는지? 그런 소비대상으로라면 지젝을 뺨치고도 한참 남아도는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등은?)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내가 알기로 <잉여쾌락의 시대>의 저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어떤 ‘학자들’이 더 있는 것인지? 사실 지젝을 흉내내는 이들보다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게 우리의 ‘학계’가 아닌가? ‘데리다’까지도 그저 쓸데없이 ‘난해한 철학자’ 정도로 치부되는 게 우리의 ‘학계’ 아닌가?),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지젝 따라하기’ 정도로 “남한의 문화산업”이 전도가 양양하다면, 이건 국가정책적으로 추진할 만한 일이다. 지젝의 책 몇 권이 번역되고, 방한해서 초빙강연 몇 번하고, 일부에서 ‘아, 지젝!”하는 현상과 남한의 문화산업이 어떤 관련성을 갖는다는 건지 나로선 헤아리기 어렵다. 문화계나 문화산업 관련업계 종사자들이 지젝을 읽기라도 한다는 건지?).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발마스님은 알튀세르의 토포스에 대해서는 정말로 지긋지긋해하면서 지젝에 대한 토포스에 대해서는 환호해마지 않는다. “브라보!” 그리하여, 지젝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는 이제 지젝의 독자들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로 전이되었는데, 나는 그런 식의 ‘무의미한’, 더불어 ‘감정적인’ 문제제기가 왜 필요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이데올로기가>의 지젝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말은 맞다. 그렇다면 그 ‘원형’이란 무엇인가? 이하의 내용에 따라면 (1)(헤겔과 라캉에 통달한) 전문학자로서의 지젝, (2)(이데올로기) 이론가로서의 지젝, (3)(대중문화) 분석가로서의 지젝, 세 가지이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는 세 가지 모습의 지젝이 모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셋의 총합이 지젝이다. 비록 ‘전문학자’와 지젝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그런데, 발마스님에 따르면 이 셋의 만남은 좀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건 조금 뒤에 결론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 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약간의 착오가 있는데, 지젝은 헤겔이 아니라 하이데거로 철학학위를 했다. 비록 그가 언제나 들먹이는 건 헤겔이지만. 그리고 두 가지 학위를 하는 게 ‘보기 드문 인내심’의 결과인지? 발마스님도 내용을 알 만한데, 지젝은 철학박사 학위를 하고서 ‘백수’로 있다가 슬로베니아로 초빙강연을 온 밀레의 초청을 받아서 파리로 건너간다. 자신의 고백대로, 바로 ‘취직’되었다면 ‘보기 드문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밀레와 지젝의 사이가 어떤지 나로선 알지 못하며 크게 궁금하지도 않지만, 밀레의 총서에 지젝의 논문이 출간되지 않는다는 것과 ‘전문학자’ 지젝 사이에는 어떤 관련(혹은 결락)이 있다는 것인지? 밀레가 지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미심쩍은 지젝?)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즉, 지젝이 알튀세르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은 아닌 줄 알면서 하는 비판, 일종의 ‘연기’라는 것. 그러니 역시나 미심쩍은 지젝?)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이런 비판은 데리다 ‘전문가’로서의 발마스님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론과 사례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젝은 인기를 얻었다? 논리와 수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리다는? 데리다도 그래서 인기를 얻은 것인가? 해서, 이론가는 향유자와 다른 존재이며 각방을 쓰는 존재인 것인지?).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지젝을 읽는 게 지젝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라면, 알튀세르를 읽는 건 알튀세르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스피노자를 읽는 건 스피노자에 동일화되는 과정인가? 그렇다면, 지젝에 ‘동일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발마스님은 아직 지젝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닌가?).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이데올로기의 유령>은 내가 알기론 책이 아니라 논문이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야 지젝에 대한 발마스님의 ‘(악)감정’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지젝이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지젝이 빌미를 제공한 셈. 발마스님이 지젝의 저작들을 다 탐독하고서 이러한 결론(불만)에 이르렀다면, 둘 중의 하나이겠다. 지젝이 불충분하게 말했거나, 지젝 자신은 충분하게 말했다고 믿지만, 발마스님이 보기엔 전혀 충분하지 않거나. 나는 현재로선 어느 쪽이 실상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없다. 로베르트 팔러도 안 읽었기 때문에.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일단 대중문화와 급진정치의 ‘엄격한’ 구별이 발마스님의 기본적인 입장인 듯하다. 그리고 급진정치란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조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중독’으로부터도. 거꾸로 말하면, 지젝이 라캉의 ‘말씀’과 ‘대중문화’에 갇혀 있는 한, 그에게선 급진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라캉과 대중문화를 빼면, 지젝은 없다. 그러니 급진정치여, 지젝없이 진군하도록!..



발마스님의 서평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지젝이나 그의 책이 아니라 발마스님 자신이다(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서평은 ‘불친절한’ 서평이다). 발마스님의 서재에 곧잘 들르는 내가 언젠가 특이하게 생각하면서 더불어 약간의 소외감(?)을 느낀 것은 ‘만화’ 얘기들이 오고 갈 때였다(나는 영화는 좋아하지만, 만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학습만화조차도 즐겨보지 않는다). 발마스님은 만화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제7의 예술’로서의 만화를 폄하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지만, 만화와 급진정치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히치콕 영화와 비판이론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보다 나로선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요즘은 간혹 영화제 광고들도 서재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영화에도 ‘급진정치적 영화’와 (쓰레기 같은) ‘대중영화’들이 있는 것인지, 그런 구별을 발마스님이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한국의 두 젊은 ‘공산주의자’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자본당선언: 만국의 자본가여 단결하라!> 같은 게 ‘급진정치’의 사례일까?).

지젝에 대한 발마스님의 취향이나 감정에 대해서까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다만, <이데올로기>에 대한 서평에서 내가 아는/상상하는 ‘발마스님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을 발견했기에 당혹스러웠을 뿐이다(서평은 너무 ‘정념적’이며 그다지 공정하지도 않다). 어쨌거나, 지젝에게서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에 대한 정교한 해명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발마스님으로서도 크게 유감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지젝을 넘어선 지점에서 발마스님의 몫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발마스님의 ‘라캉과 알튀세르’론 또한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가 기대하는 것은 앞으로 도래할, 발마스님의 ‘이데올로기론’과 ‘급진정치론’이다. 우린 어쩌면, 따로 번역/오역할 필요 없이 우리말로 (지젝을 넘어선) 이론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04. 10. 30./ 06.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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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비공개 리뷰로 분류했던 글을 페이퍼로 옮겨놓는다. <문학과사회>(2006년 가을호)에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대한 서평으로 게재되었던 것이다. 분량 제한 때문에 '들뢰즈와 헤겔'에 관한 내용만 간추렸는데, 사실 책은 한편으로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론으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최근에 에이젠슈테인론을 대학원 수업시간에 읽다가 <신체 없는 기관>을 다시금 떠올리게 됐다). 하지만, 그걸 다 음미하기도 전에 지젝은 서너 권의 책을 더 써낼 것이다!..

우리 영화 <왕의 남자>의 끝장면에서 광대 장생은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재담을 늘어놓는다. “아, 이놈이 기생들 요분질이 시시해지니까 이번에는 사내놈하고 붙어먹는 짓도 서슴지 않는데, 그 비역질이 보통 비역질과 달라서 밥이 나오고 비단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그런데, 이 비역질이 비단 절대권력자만의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것이기도 하다면 어쩔텐가? 철학사가 바로 그러한 비역질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이 ‘비역질의 철학’이 ‘순진무구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주특기였다면?

들뢰즈 자신이 한 대담에서 밝혀놓은 터라 특별한 비밀도 아닌 이 사실을 “들뢰즈를 다루는 라캉주의적 책”(p.10)의 저자가 놓칠 리 없다. 지젝이 인용하는바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사를 일조의 비역, 혹은 같은 얘기지만, 무염시태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지.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그 아이가 괴물 같다는 사실 역시 필수적인 것이었지.”(p.98)
 


 

 

 

 

 

 

 

그리고 이러한 ‘비역질의 철학적 실천’을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요컨대 우리가 들뢰즈 자신 뒤에 달라붙는 행위를 감행하고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이라는 실천에 관여하는 것이 왜 안되겠는가?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pp.101-2)


사실 ‘기관 없는 신체’라는 들뢰즈의 상용구를 ‘신체 없는 기관’으로 뒤집은 표제 자체가 들뢰즈의 뒤에 달라붙으려는 지젝의 전략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화(dialogue)가 아닌 조우(encounter)'라고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할 때 그 ‘조우’의 장면으로 우리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것은 ‘뒤에 달라붙는’ 장면이다. 즉, 지젝을 따라읽으며 우리가 이 ‘소책자'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들뢰즈의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이다(지젝은 자신의 책을 'booklet'이라고 지칭했는데, 번역본의 분량은 본문 400쪽이지만 원서는 213쪽이다). 들뢰즈 자신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들뢰즈’ 말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인가? 그건 지젝 자신이 짚어주고 있는 바대로, 최근 10년간 그가 “현대 철학의 중심적 준거점”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참고로, 지젝이 보는 현대철학의 3항 구도는 '들뢰즈-데리다-라캉'이며, 이것은 '스피노자-칸트-헤겔'이라는 근대철학적 구도의 반복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언제부턴가 ‘저항하는 다중’ ‘유목적 주체성’ ‘반-오이디푸스’ 같은 들뢰즈식 개념들이 마치 ‘공통 통화’처럼, 진보와 저항의 이론적 근거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는 이렇듯 ‘유행하는 들뢰즈 이미지’, 곧 반-헤겔적, 반-정신분석적 들뢰즈의 이면에서 훨씬 더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들뢰즈를 읽어낼 수 있다(이때의 들뢰즈는 헤겔적/라캉적 들뢰즈이다!). 다시 말해서, 지젝이 도입하는 것은 ‘들뢰즈 대 들뢰즈’, ‘들뢰즈에 대립하는 들뢰즈’의 구도이고 그 긴장이다.


지젝에 따르면, 들뢰즈의 최고의 책 <의미의 논리>와 최악의 책 <안티-오이디푸스> 사이에는, 곧 “의미-사건의 비물질적 생성의 불모성과 관련된 들뢰즈”와 “존재의 물화된 질서에 맞서 생성의 생산적 다수성을 찬미한 들뢰즈” 사이에는 양립불가능한,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놓여 있다(지젝은 들뢰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청산하고 쓴 <시네마>를 통해서 <의미의 논리>에서의 들뢰즈, 본래의 들뢰즈로 회귀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아예 들뢰즈가 자신의 이전의 입장이 처한 곤궁으로부터 쉬운 도피처를 가타리에게서 찾은 것이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한다(철학사에서 그러한 도피/회피의 사례는 드물지 않다면서).


‘잠재적인 것’(잠재태)과 ‘현행적인 것’(현실태) 사이의 대립을 ‘생산'과 '재현'의 대립, ‘생성’과 ‘존재’의 대립과 동일시함으로써 들뢰즈는 유물론으로부터 관념론으로 퇴행한다. 그럴 경우 “생산의 고유한 현장은 잠재적 공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공간에서 구성된 현실로의 바로 그 이행”이고 “생산은 근본적으로 잠재성들의 열린 공간에 대한 제한이며, 잠재적 다수성에 대한 규정이자 부정”(p.49)이라는 ‘의미의 논리’의 결과를 간과하게 된다.  . 


사실 “들뢰즈의 위대한 반헤겔적 모티브는 절대적 긍정성, 즉 부정성에 대한 그의 철저한 배격”(p.108)에 놓여 있다. 그때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들뢰즈가 상정하는 헤겔은 ‘순진무구한’ 헤겔이다. 즉 “헤겔은 존재의 순수 긍정성에 부정성을 도입하며 또한 헤겔은 분화를 긍정적 일자의 종속적/지양가능한 계기로 환원하기 위해 부정성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지젝의 반격은 “헤겔이 궁극적으로 부정성에 대해 행하는 것은 전례 없는 부정성 그 자체에 대한 ‘긍정화’가 아닌가?”(p.108)란 반문이다


헤겔에 대한 들뢰즈의 단순화는 “칸트에 맞선 혹은 칸트를 넘어선 헤겔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간과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헤겔을 그답지 않게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읽는다(마치 헤겔의 뒤에 달라붙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래서, “헤겔은 칸트로부터, 자기투명하고 완전히 현행화된 존재의 논리적 구조를 표명하는 절대적 형이상학으로 회귀한 자”(p.118)란 이미지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통찰이야말로 들뢰즈적인 것이다.“하지만 헤겔이 칸트에게 여하한 긍정적인 내용도 덧붙이지 않는다면, [칸트적 체계의] 간극을 채우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헤겔의 ‘절대지’는 ‘모든 것을 아는’ 터무니 없는 입장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경로가 어떻게 이미 진리 그 자체인지에 대한 통찰, 절대자가 어떻게 정확히 -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자면 - 자기 현행화의 영원한 과정의 잠재성인지에 대한 통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pp.118-9)


들뢰즈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독해, 혹은 달라붙기가 산출해내는 것은 헤겔=들뢰즈=라캉의 ‘기이한 등가계열’이다(지젝은 들뢰즈=라캉의 테마에 대해서도 ‘오이디푸스-되기’ ‘환상’ ‘남근’ 등의 모티브를 통해서 입증한다). 이것이 어쩌면 “참을 수 없는 괴물”(p.103)이어서 들뢰즈는 헤겔을 자기 특유의 비역질, 혹은 ‘자유간접화법’에 의해 전유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로 고양시켜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은 들뢰즈가 꺼려 했던 바로 그 일이다.   


“들뢰즈는 헤겔이다”라는 일종의 무한판단, 바로 그것이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보통의 비역질과는 다른 ‘비상한 비역질’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광대-철학자 지젝이 얻어내는 결과이다. 그리고 책의 2부에서는 그 결과의 ‘결과들’을 과학, 예술(영화),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영역들에서 차출해낸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흔히 말해지는 ‘들뢰즈적 정치’의 곤궁과 불능을 드러내는 대목들인데, 지젝이 단언적으로 미리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혁명적 전복에 관한 그 어떤 가능한 관념이라도 ‘반-오이디푸스적 반란’이라는 문제틀과 총제적으로 단절해야 한다.”(p.199)


지젝이 이 책을 헌정하고 있는 조운 콥젝은 “이제부터 들뢰즈에 대한 모든 독해는 이 중요한(필수적이기까지 한) 책을 통해 우회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무조건적 존경을 빗대어 지젝은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p.72)라고 반문하는데, 그 반문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지젝을 읽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06. 08. 05./ 07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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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퍼온글] *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급진적 정치철학으로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급진적 정치철학으로

 

[연대대학원신문 153호]기획서평

 

이병주 경희대 신문방송학 강사 lbj72@khu.ac.kr

 

● 야니 스타브라카키스,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
● Judith Butler/Ernesto Laclau/Slavoj Zizek,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Verso, 2000)


왜 정신분석학인가

   
 
▲ 은행나무 펴냄
 
스타브라카키스의 저서 『라캉과 정치』의 영어판 부제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기(thinking the political)’이지만 보다 더 정확한 부제를 달면 ‘라클라우와 라캉’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 저서는 라클라우를 정신분석화하고 있으며, 탈구나 헤게모니와 같은 라클라우의 개념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철학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시도만이 유일한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인가?’ ‘왜 정신분석학인가?’ 왜냐하면 푸코의 권력이론이나 들뢰즈·가따리의 정치이론과 같이 정신분석학에 근거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 저서를 이론과 정치의 공간에서 맥락화하며 그 맥락화 속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 저서가 담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과 관련된 논쟁의 결절점을 제공해주는 (곧 도서출판b에서 번역 출간될)『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공저자인 라클라우와 버틀러, 지젝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왜 정신분석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버틀러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으며, 『라캉과 정치』가 제시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라클라우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들은 라클라우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라캉과 정치』 안에서 다시 반향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라캉과 정치』를 맥락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논의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스타브라카키스와 지젝의 대립을 보여주는 두 언급을 보자.

급진적 민주주의와 라캉의 윤리

스타브라카키스는 민주주의의 역설로서 ‘동유럽과 남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의 성공’과 서구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침울한 실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지젝은 동유럽에서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근본적인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면으로서 불러냈다고 지적한다. 이 서로 다른 지적은 두 이론가의 주장 모두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 정치는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그는 환상과 증상의 변증법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와 대타자는 모두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결핍을 메움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를 라클라우의 용어로 번역하면 적대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사회적 환상을 통해 부인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적대의 한 담지자는 완전한 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그렇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증상)로 환상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탈린의 굴락과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유토피아 정치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렇다면 이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통과하면서도 급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스타브라카키스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라고 대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급진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적대와 그로 인한 사회적 탈구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유일한 정치기획이며,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정치기획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윤리적 행위가 환상의 가로지르기라면, 급진적 민주주의의 토대는 바로 이 윤리학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윤리적 행위란 유토피아적인 조화의 윤리학을 넘어선 사회적 결핍의 제도화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로 하자면 민주주의 혁명으로 창출된 권력의 공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정치의 유일한 이름은 오로지 라클라우와 무페 식의 헤게모니 투쟁이다.

   
 
▲ 도서출판 b 펴낼 예정
 
지젝은 이와 같은 논의는 정치를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버리고 진정한 행위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라캉의 윤리적 차원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스타브라카키스의 행위란 실재 앞에서의 항상 실패한 행위라는 것이다. 지젝은 행위를 ‘발생한 불가능’으로서 정의한다. 여기에서 불가능성이란 불가능성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좌표 내부’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지젝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과가 돌아가는 마이너스 성장률’과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행위란 사회-상징적 질서의 재정의 과정이다. 이러한 지젝의 논의는 어떤 점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와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성(historicity)과 비역사적인 중핵 간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의 제시를 통해서 지젝은 라클라우와 버틀러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보편성’ 개념이다.

텅 빈 보편성과 근본적 불가능성의 문제

라클라우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항상 어떤 특정한 내용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 장소는 헤게모니라는 우연성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계급본질주의와 같은 정치적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버틀러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역사적인 배제/포함의 과정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특히 비역사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성차의 구별이라는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즉 성차란 섹슈얼리티라는 본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젠더라는 수행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본질주의를 넘어선 성차의 정치이다.

여기에서 지젝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들이 말하는 보편성 그 자체가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성차의 우연성이든 정치의 우연성이든 이 모두는 특정한 역사적 형식이며, 이 형식이 출현하기 위해서 원초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둘은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하는 특수한 내용을 분석할 뿐 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 두 가지 관계를 적대와 차이에 종속된 적대(또는 무페의 용어로는 대항의 논리로 번역된 적대)의 변증법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근본적인 성적 적대란 ‘실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즉 외상적인 것)이며, 이 실재적 불가능성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을 통해 남/녀의 성차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또는 이 불가능성의 원초적인 억압을 통해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지젝의 논점은 정치적 적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이 둘이 누락한 문제는 바로 이 (불)가능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즉 사회적인 것을 구조화하는 전체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억압된 역사적 유물론의 회귀?

흥미롭게도 지젝의 행위 개념과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이 지젝의 논의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근대 민주주의가 전근대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조직화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정초적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젝은 이 근대 민주주의(의 출현의 조건)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와 동일한 논리로 라클라우와 무페의 다양한 주체성에 기반한 포스트모던 정치를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지젝은 계급투쟁을 라클라우적 용어로 차이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적대로 재개념화하며, 이러한 계급적대에 대한 분석의 누락은 포스트모던 정치가 자본주의를 탈정치화하는 징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지젝은 반자본주의적인 행위를 기존의 상징적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유토피아(u-topic)를 열어나가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러나 아직 지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교한 이론화 작업을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만약 지젝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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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프로메테우스의 모험: 현대 과학기술의 철학적 의미

 

  월간 [사회운동]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혹시 공적으로 인용하거나 논의하시고 싶다면,

[사회운동] 3월호를 기준으로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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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부터 3개월 가까이 나라 전체를 뒤흔든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굴절시키고 증폭ㆍ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인터넷 여론이나 신문 방송이 더 이상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법적인 처리가 이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해결책의 모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우석 팀의 논문 조작과 언론 플레이,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천박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엄정한 책임 추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1) 황우석 스캔들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품고 있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르쿠르의 책은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 전체를 정확히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생명공학의 철학적ㆍ윤리적 함의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1944-)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사상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나 피에르 마슈레와 함께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사람이다. 발리바르가 역사유물론과 정치철학 분야를 담당하고 마슈레가 문예이론과 철학사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 르쿠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또는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2)

 

  특히 그는 약관 20대에 바슐라르에서 시작하여 캉귈렘을 거쳐, 푸코와 알튀세르로 이어진 프랑스의 인식론 전통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이 작업이 알튀세르의 초기 문제설정에 따라 역사유물론의 한 분과로서 인식론을 체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로 뒤에 출간된 󰡔하나의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입장에 대한 시론󰡕4)이나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5) 같은 저작들은 “이론 안의 계급투쟁”이라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과학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쟁점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질서와 유희L'ordre et les jeux󰡕6)에서는 논리실증주의와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과잉유물론Surmatérialisme”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7)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는 철학에 관한 이중의 테제, 곧 변증법(방법)에 대한 유물론(존재론)의 우위, 역사유물론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우위라는 테제 대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근거를 둔) 철학의 새로운 실천에서 찾으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개념이다.8)  

 

  알튀세르가 공적인 이론 무대에서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르쿠르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과학철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빼어난 저작들을 산출했다9). 90년대 이후 그는 주로 생명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 데 몰두하고 있다. 󰡔공포에 반대하여󰡕나 󰡔다윈과 성경 사이에 있는 미국󰡕 또는 󰡔생명윤리와 자유󰡕 등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책들이다. 이러한 저작들 이외에도 그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사전󰡕이나 󰡔의학사상사전󰡕 같은 집단 저작을 감수했는데10), 이 책들은 200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11)

 

  20여권에 이르는 르쿠르의 저작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것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백의, 1996), 󰡔진보의 미래󰡕(동문선, 2001) 정도니까, 충분히 소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2) 이런 상황에서 르쿠르의 최근의 이론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인간복제논쟁󰡕은 독자들의 아쉬움을 얼마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복제논쟁󰡕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으로13), 국내에서는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지만 르쿠르의 이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원서로는 불과 150쪽 정도이고, 여백이 여유 있게 편집된 번역본으로도 180쪽 남짓한 이 책은 분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여럿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철학적ㆍ윤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국역본 제목이 시사하듯이(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인간 복제’라는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체 복제”,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되, 이러한 현상이 함축하는 철학적ㆍ정치적ㆍ윤리적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르쿠르가 제시하는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과학과 연루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르쿠르는 첨단과학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열광은 사실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두 극단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점과 규범의 절대적 기초로서 인간 본성이라는 관점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입장에 따라 형성된 관념들을 자명한 사실로, 또는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오인하게 만듦으로써, 과학 및 기술의 역할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셋째, 현대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오용이 낳는 윤리적ㆍ정치적 폐해를 막기 위해 적절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하는 일이다. 르쿠르는 관개체론(貫個體論)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1. 현대의 기술신학: 생명 파멸론과 기술 낙관론


  서론격인 「프롤로그」와 유나바머에 관한 부록 이외에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중의 비판적인 목표, 이중의 투쟁 전선을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이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점이 곧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생명 파멸론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묵시록적인 관점에서 현대 생명공학은 결국 인간 본성을 파괴할 파멸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고발한다. 이들은 심지어 생명공학 연구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생겨난 “반인륜적 범죄”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극단적인 비판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이들이 생명공학, 특히 인간 복제 연구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한 연구가 자연적인 생명의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복제할 수 있는 사물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인간 복제는 한 개인과 동일한 사본, 동일한 클론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톨릭 교회나 다양한 분파의 생태론자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보수적인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심지어 하버마스 같은 비판 철학자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생명공학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파멸적인 결과들에 관한 공포의 담론을 조장하면서,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를 통해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에는 “기술 낙관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공 지능 연구자들이나 로봇 공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생명 파멸론과는 정반대로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컴퓨터와 로봇 공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과 우리 육신에서 비롯되는 죽음”(78쪽)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정한 본질인 지능에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수학적으로 정의된 가상적인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는 인공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공 생명 연구자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 자신을 조직화하고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주위 환경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포스트 휴먼”으로서 로봇 종(種)을 만들어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결국 2099년에 이르면 ‘인간의 사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능을 가진 기계의 세계와 융합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심각하게 변화할 것이다.’”(82쪽)    

 

  이 두 가지 관점은 인간의 장래에 대해 정면으로 대립하는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혀 상이한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쿠르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관점은 실제로는 동일한 한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 전통, 더욱이 천년 왕국설에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신학적 운동이다. 생명 파멸론이 생명공학에서 신의 고유한 권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오만”(hybris)를 발견한다면14), 기술 낙관론은 오히려 신의 영광의 표현 및 원초적인 낙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통 종교와 무관해 보이는 첨단 과학들이 실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의 이데올로기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이 책이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다. 


2. 두 가지 쟁점: 기술과 인간 본성


  이 두 가지 관점이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활용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기술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를 이루는 두 가지 통념, 곧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통념에 대한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 도구로서의 기술 대 구성적 조건으로서의 기술


  르쿠르는 이러한 기술 신학은 기술에 대한 특정한 관점, 곧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9세기의 실증주의 이래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외재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이 지닌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응용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수단 내지 도구로서의 기술은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지만, 생명공학(및 정보공학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변형하고 파괴할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15)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술의 반란, 도구의 반역을 저지하기 위한 반테크놀로지 혁명을 수행하는 길이다.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실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부록」) 르쿠르는 유나바머 사건은 증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기술 신학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 잘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를 둔 이러한 기술 신학이 또다른 종교적 극단,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르쿠르는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맞서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 곧 기술은 인간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3장). 사실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은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같은 기술철학의 대가들이 제창한 이래 장 클로드 본(Jean-Claude Beaune)이나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등과 같은 기술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그리고 강력한) 전통 중 하나다.16)

 

  르쿠르가 본론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발생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및 인간과 기술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개체화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 의해 뒷받침된다. 르루아-구랑이 체계화한 고고학적 논의에 따르면 호미니드(hominid)가 유인원에서 분화하고 다시 호미니드에서 현생인류(homo sapiens)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이후 인류의 문화가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17) 다른 한편으로 질베르 시몽동은 개체화 이론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구성적 관계를 보여준다. 곧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미리 형성된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작용에 의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이러한 교섭에서 기술은 인간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술적인 대상 역시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화 양식을 지니게 된다.18) 요컨대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이미 기술적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술과 더불어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이 인간과 기술의 외재성을 상정하는 도구적 관점만이 아니라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 역시 거부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인간 본성론인가 관개체론인가


  또한 기술 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 또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의 자명성을 전제하고 있다. 생명 파멸론이든 기술 낙관론이든 간에, 기술신학은 기술의 발전을 인간 본성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전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방치될 경우에는) 인간 본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후자는 인간 본성의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양자는 과학기술을 평가하기 위한 본질적인 척도로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실 인간 복제 기술에 대한 비판가들, 특히 생명 파멸론자들의 역설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에 입각하여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과 동일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인간의 동일성을 치명적으로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복제 기술로 생겨난 사본이 원래의 인간과 정말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유전적인 정보로 식별되는 한 개인의 유전적인 동일성이 그의 인간적인 동일성 전체를 규정한다는 점(또는 양자가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돌리의 탄생 이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을 복제한다거나 죽은 가족의 성원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이러한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19)

 

  기술 낙관론자들 역시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 따라서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념을 가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침팬지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99%가 똑같다”. 좀더 세련된 형태의 환원론은 사유를 컴퓨터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두뇌의 모든 기능을 수학적 모델에 따라 원하는 정도의 과학적 정확성으로 설명하고, 이를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인공 지능 이론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과 침팬지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유전적으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과 침팬지는 그토록 다른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생명공학 및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쟁점들을 정확히 다루는 데 장애를 이룰 뿐이다. 다시 말해 이 개념에 의거할 경우 한편으로 인간 본성을 인간 종에게 부여된 선험적 자질로 간주하든가 아니면 이를 유전적 동일성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르쿠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 본성이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며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지닌 자명한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전형적인 근대적 개념으로서, 중세의 신학적 기초를 대신하여 인간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 개념이 인간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20) 가치나 규범에 대한 절대주의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르쿠르는 생명윤리에 관한 담론들이 부정적이고 규제적인 방향 일변도로 진행되는 근본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고 있다.21) 

 

  이러한 관점에 맞서 르쿠르는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관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22) 사실 기술에 대한 구성적 관점은 개인 또는 개체 일반에 관한 관개체론적 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관개체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개체는 개체화 과정 이전에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항상 개체화 과정의 (잠정적인) 결과로서 실존할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본성을 인공적인 또다른 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없다.

 

  (2) 개체는 그의 환경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동일성을 갖춘 개체로 성립하며, 바로 이 때문에 타자들을 자신의 동일성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타자들은 반드시 인간 타자들로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적인 타자들이나 심지어 인공적인 타자들, 곧 기술적인 존재자들도 포함된다.

 

  (3) 가치 규범들은 환경과 교섭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규준/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규준은 선험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교섭 과정에 따라 변화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이해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인간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인간에 대한 정의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불변적인 인간 본성을 가정하고 있는 기술 신학적인 관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위치를 개념화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선험적이거나 절대적인 가치 규범(예컨대 선의지라든가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첨단 과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규범적 대응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도 관개체론적인 관점의 강점 중 하나다.


3. 생명공학 시대의 윤리


  관개체론에서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때의 욕망은 선험적인 인간 본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발하듯이 탐욕이나 이기주의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실존하고 진화해가는 인간의 특성을 가리킨다. 르쿠르는 드니 디드로 대학(파리 7대학) 교수답게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디드로(Denis Diderot)의 사상에서 이러한 형태의 인간관을 발견하지만, 사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관점이다.

 

  스피노자가 모든 자연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로, 그리고 특히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로 정의한 것은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등이 주장하듯이 일종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이는 들뢰즈/가타리가 1970년대에 제안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의 영향 아래 일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지닌 능동적 역량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욕망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환경과 분리하여,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맺고 있는 구성적인 관계와 분리하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곧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간주되든 능동적인 역량의 표현으로 해석되든 간에 두 가지 관점에서 욕망은 정의상 개인의 욕망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를 비롯한 최근의 스피노자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23), 스피노자의 욕망에 대한 정의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관점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정의된다면, 이는 우선 본질 개념에 대한, 그리고 개체의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에서 탈피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경우 욕망은 인간이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인간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로 말한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실재,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변용되며affici”(영향받고), 또한 이러한 변용되기를 바탕으로 환경을 “변용한다afficere”(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변용되기/변용하기의 관계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affectio)의 관계는 욕망과 기쁨,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공포 등과 같은 정서들(affectus)로 변이되며, 이를 통해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개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존재론적 개체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변용 관계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또는 관개체적인 본성을 지니게 되며, 더 나아가 항상 이미 타인들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정서적 관계망(누구도 혼자서 기뻐하고 혼자서 슬퍼할 수 없으며, 더욱이 혼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희망하거나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 내지 개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모습에서도 타인의 흔적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의거하여 생명 공학의 발전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거나 그것이 기존의 본성을 전혀 새로운 인공적 본성으로 대체시켜 줄 것이라고 환호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르쿠르는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존의 생명윤리 대신 관개체론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관점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 곧 “자신이 고유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능력”(64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그가 제안하는 규범의 발명이라는 주장은 자의적으로 이런저런 윤리적 규범들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윤리적, 사회적 규범들이란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규준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준의 변화에 맞춰 변화될 수밖에 없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점이 생명 공학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초를 둔 일방적인 윤리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개체론적인 관점에 따를 경우 인간 개인은 항상 이미 자기 안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의상 양가성을 띠고 있다. 곧 이것은 인간에게 해롭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유용하고 선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윤리적 규범과 가치 판단의 문제는 외부 대상에 대한 규제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각각의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요소, 악의 요소를 어떻게 규제하고, 또 유용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 자체와 동연적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제대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없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또는 폭력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규범의 발명이라는 테제는 생명공학이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경계하고 대비하도록 요구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의 특성 및 규범의 문제를 좀더 자연적이고, 좀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 복제 및 인공 지능 또는 인공 생명의 과학적 전망이 제시되는 시기에 이러한 관점은 과학기술과 윤리의 내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을 만하다.  


4. 이론적 과제와 전망


  내가 볼 때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양의 기술ㆍ과학적 발전의 과정 속에 위치시켜 고찰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고찰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생명 복제나 인간 복제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들은 현재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피상적인 현상 기술에 그치든가 아니면 맹목적인 편들기(가령 생명공학은 과학기술 발전의 신기원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가, 또는 본래적인 자유의지를 갖는가, 배아는 인격체인가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존재일 뿐인가 인격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가 등)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책은 넓은 역사적 시야와 신선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로 문제를 조망하면서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 오래된 신학적ㆍ철학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이 문제를 적절한 방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익숙한 관념들이 개조되어야 하고 특히  윤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물론 내가 볼 때) 보여주고 있다. 생명윤리에 대한 대개의 논의가 이러한 존재론적ㆍ인간학적 기초에 대한 검토 없이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 의거하여 규제적이거나 금지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르쿠르의 제안이 얼마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이를 윤리적ㆍ정치적 문제와 결부시켜 사고해온 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못했던 프랑스 과학철학 및 기술철학의 한 가지 관점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또다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에게 기술의 문제는 그동안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외론 또는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경제사회학이나 경제사 분야의 부차적인 논의 주제로 간주되어 왔다.24) 가령 과학기술혁명(이른바 “극소전자혁명”)이 생산구조와 노동자 계급의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같은 것이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구성적 기술론에 입각하여25) 기술이 사회구조 및 인간의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좀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르쿠르 책은 (적은 분량의 저작에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공백을 남겨놓고 있다. 우선 󰡔인간 복제 논쟁󰡕에는, 한 논평자가 지적하듯이,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사회 경제적 조건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26)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특허권을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거대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며, 이에 따른 자본에 대한 과학연구의 예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될 공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백은 단순한 부주의로 보기는 어려우며, 좀더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또다른 공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근대 과학기술에 고유한 발전(또는 “진화”)의 동역학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동역학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과학기술은 대개 생산력의 일부로 간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발전 내지 진화의 메커니즘을 갖춘 체계로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의 구성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고 인간의 진화 과정과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서 함께 진화되어 왔다면, 기술은 단순히 도구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의 종속 변수 내지 생산력의 일부로 치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메커니즘과 자본주의 경제의 동역학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분명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또한 과학과 기술, 경제가 맺고 있는 상호연관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27) 

 

  또한 르쿠르의 작업은 생체정치(biopolitique)의 문제설정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르쿠르는 이 책을 명시적으로 생체정치 또는 생체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키고 있지만(26쪽), 이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고 있다. 푸코가 자신의 후기 작업, 특히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 발전시킨 생체권력28) 개념은 규율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대중으로서의 인구 또는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체권력 또는 생체정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규율권력의 실행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종의) 거시권력으로 볼 수도 있다. 생체정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들의 생명을 규제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로 삼는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나 공중위생 같은 보건복지 및 의료정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인구조사 및 출산율과 사망률, 평균 수명 등과 같은 인구정책 전반이 생체정치의 주요 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공학의 문제가 함축하는 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은 생체정치의 문제설정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적한 이러한 공백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쟁점들이며,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들의 문제를 좀더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상호 연관성 속에서 취급되어야 할 문제들이다.29) 이렇게 볼 때 르쿠르의 책은 좀더 진전된 연구를 위한 일종의 “서론”으로 읽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이 지니는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좀더 폭넓은 역사적ㆍ철학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인간 복제 논쟁󰡕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조만간 좀더 많은 르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고 그의 연구가 앞으로 좀더 체계화되길 기대하는 것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1) 󰡔진보평론󰡕 26호(2005년 겨울)는 황우석 스캔들의 초기 쟁점이었던 난자제공의 윤리적 문제와 연구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민중운동의 새로운 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인물과 사상󰡕은 “한국 사회를 발가벗긴 황우석 신화”라는 제목 아래 PD수첩 보도를 통해 드러난 한국 언론의 과학보도 관행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있다. 

2) 1983년 사망한 미셸 페쇠는 담론 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La vérité de la Palice, Maspero, 1975; (avec François Gadet), La langue introuvable, Maspero, 1983. 

3) 이 연구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박기순 옮김, 새길, 1995 참조. 그 외에도 그는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시학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해명하고 있는 󰡔바슐라르, 낮과 밤Bachelard, le jour et la nuit󰡕, Grasset, 1974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4) Une crise et son enjeu: Essai sur la position de Lenine en philosophie, Maspero, 1973; 국역본은 󰡔유물론ㆍ반영론ㆍ리얼리즘󰡕 이성훈 편역, 백의, 1996의 1부에 수록되어 있다.

5)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

6) Grasset, 1980. 

7) 여기서 “과잉sur-”은 교의나 이론으로 고착화된 종래의 철학적 실천에 맞서 이론(으로서의 유물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대체보충이다. 이 개념은 또한 바슐라르의 “surrationalisme”, 곧 “과잉합리주의”에 준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관념론적 한계를 정정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8) D. Lecourt, “Pour une philosophie sans feinte(Vers le sur-matérialisme)”, in L'ordre et les jeux; P. Macherey, “Sur l'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siderée comme lutte des tendances”, in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7; 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9)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37쪽 참조.

10) Dictionnaire d'histoire et philosophie des sciences, PUF, 1999; Dictionnaire de la pensée médicale, PUF, 2004.  

11) 그 외에 르쿠르는 “디드로 포럼Forum Diderot”이라는 대중교양강좌를 주재하면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생명과학 분야의 쟁점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Faut-il vraiment cloner l'homme?, PUF, 1998; La bioéthique est-elle de mauvaise foi?, PUF, 1999; Les médecins doivent-ils prescrire des drogues?, PUF 2000 등 참조. 

12)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최악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엉망인 책이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13) 이 책의 원제는 “Humain, posthumain: La technique et la vie”이고, 르쿠르 자신이 감수하는 “과학, 역사, 사회Science, Histoire et Société”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출간되었다.

14) 이는 17세기 이래 또는 19세기 말이래 과학-기술 복합체를 형성해온 근대 과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비판이다. 르쿠르는 이전 저작에서 파우스트(악마와의 계약)와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발명)이라는 문학적 형상을 통해 과학에 대한 공포의 상상적인 기초를 검토한 바 있다. D. Lecourt, Prométhée, Faust, Frankenstein, Synthélabo, 1996 참조.      

15) 기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도구적 이성” 개념을 발전시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16) 이들의 저작은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데리다와 스티글러의 대담집에서 이러한 기술철학 전통의 면모를 약간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참조. 르루아-구랑의 연구는 초기 데리다의 작업, 특히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 André Leroi-Gourhan, Le Geste et la Parole, tome 1-2, Albin Michel, 1964-65; B.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tome 1, Galilée, 1994 참조.

18)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Aubier, 2001 참조.   

19) 이러한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는 르원틴의 글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리처드 르원틴, 「복제에 관한 혼동」, 그레고리 펜스 엮음, 󰡔인간 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류지한 외 옮김, 울력, 2002. 

20)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 과학들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이러한 괴리의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 󰡔인간 복제 논쟁󰡕에서는 “규제하고 금지하는 규율”로 이해된 생명 윤리의 불모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으나, 2004년에 출간된 악셀 칸과의 대담집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부연하고 있다.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PUF, 2004 참조.

22) 시몽동에서 유래한 “관개체론”(transindividualisme)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참조.  

23) 발리바르, 앞의 글 참조. 우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스피노자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참조. 

24) 그러나 미국의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펜버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프랑스 기술철학의 전통(특히 시몽동의 작업)을 접목시키려는 흥미있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Andrew Feenberg, Critical Theory of Techn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등 참조.  

25) 이는 80년대 이후 프랑스 출신의 브뤼노 라투르나 미셸 칼롱 및 영미의 과학/기술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시된 이른바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ism)과는 약간 다른 입장(양자가 대립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이다.

26)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op. cit., p. 51.   

27)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베르나르 스티글러다. 특히 B. Stiegler, De la misère symbolique, tome 1-2, Galilée, 2004; Mécréance et discrédit: tome 1, La décadence des démocraties industrielles, Galilée, 2005 참조.   

28)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Seuil, 2004;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Seuil, 2004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특히 Jean-Claude Zancarini ed., Lectures de Michel Foucault, ENS Editions, 2000 참조.

29) 또는 역으로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만 생체정치의 문제설정 내에 존재하는 이단점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기술(적 진화)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생체정치와 관련된 아감벤 작업의 이론적 한계 내지 공백 중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를 철학적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G.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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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리센코, 황우석 그리고 국가

'리센코'란 이름을 검색하면 한달쯤 전 칼럼들이 몇 개 뜬다. 지난 12월 중순, 그러니까 황우석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치달을 무렵에 씌어진 칼럼들이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T. D. Lysenko; 1898-1976)는 스탈린시대 러시아의 농생물학자로서 멘델의 유전학설을 비판하고 소위 '리센코학설'(리센코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이 유전자라는 입자적인 것만으로 유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환경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생물체 내의 물질대사형을 변화시키고 이것이 유전성을 변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이해하기론 용불용설 같은 것이어서 환경조건에 따른 개체 변이가 유전된다는 식인 듯하다(이른바 획득형질 유전론). 문제는 그의 이 유사-과학이 멘델의 유전학 같은 '부르주아 과학'에 대항하여 스탈린시대에 '프롤레타리아 과학'으로 공인받았다는 것.

물론 이후에 그의 '정치적' 과학은 농업생산 분야에서의 부진으로 인하여 신뢰를 상실하게 되며 스탈린 사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모스크바 유전학연구소장 직에서 완전히 사임하게 되는 것은 흐루시초프시대인 1965년). 하지만, 그의 유사-과학은 유전학 분야에서 러시아가 서구에 최소한 10여 년 이상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게 20세기 과학사의 최대 스캔들의 하나인 소위 '리센코 어페어'이다.  

개인적으론 대학원 시절 언젠가 이를 풍자한 러시아 현대소설을 읽을 일이 있어서 리센코주의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기도 해서(비록 거기에 대해 글을 쓰는 기획은 엎어졌었지만) '리센코'란 이름이 친숙한데, 그때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사, 1996)의 저자이자 얼마전 <인간복제논쟁>(지식의풍경, 2005)이 번역/소개된 도미니크 르쿠르의 <리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였다(이 책은 얼마전에 지인의 도움으로 영역본을 구했다). <인간복제논쟁>의 부제는 '인간 복제 이후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이며 원제는 "Humain, Posthumain"(2003), 즉 '인간과 포스트인간'이다. 이미 '인간복제'의 기술적 가능성과 문제점에 관한 책들은 여러 권 출간돼 있으므로 이 책과 더불어 '테마 독서'를 해봄직하다.

 

 

 

 

흥미로운 건 르쿠르의 책 부록으로 '유나바머'론이 포함돼 있다는 것(*최근에 <산업사회와 그 미래>(박영률출판사, 2006)로 다시 출간됐다). 유나바머? 시사상식인데, 본명이 시어도르 카진스키인 그는 하버드대 출신의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를 지낸 인물이다. 극단적인 문명혐오주의자로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난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회에 걸쳐서 과학기술 관련인사들에게 우편물 폭탄테러를 감행해왔다. 초기에 주로 대학과 항공사를 공격해 대학(University), 항공사(Airline)와 폭파범(Boomber)의 Un+A+Bomber 를 조합, '유나바머'로 불렸다. 그는 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유나바머 선언문) 게재를 요구함에 따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3만5000자의 논문이 실렸다. 동생의 제보에 따라 96년 4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이른바 '유나바머 어페어'이다. 르쿠르가 인간복제문제와 유나바머 문제를 어떻게 접속시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하에서 옮겨오는 칼럼들은 그런 궁금중과는 무관하며 (아마도 21세기 전반기 과학계 최대 스캔들로 기록될) '황우석 어페어'에 촉발되어 '리센코 어페어'를 상기시켜주고 있는 글들이다. 첫번째 칼럼은 한겨레신문(2005. 12. 13)에 실렸던 김환석 교수의 칼럼 "'영웅만들기'의 함정;이고, 두번째 칼럼은 동아일보(2005. 12. 12)에 실렸던 소설가 복거일의 칼럼 '과학윤리기준 과학자에 맡겨야'이다(복거일은 대표적인 보수주의 논객이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

섀튼의 결별선언 이후 한 달 동안 전국을 폭풍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서울대의 조사위원회로 공이 넘어갔다. 따지고 보면 한 과학자의 연구논문에 대한 논란일 뿐인데, 이렇게 ‘핵폭풍’에 비유될 만큼 국가적 재앙의 위기에 몰려 정부와 온 국민이 하루하루 불안과 조바심에 떨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게 정상적인 나라에서 일어날 법한 일인가?  

정상적인 나라라면 과학계 내부의 자정 메커니즘으로 쉽게 처리되었을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는 이 지경으로 사회적인 대혼란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황우석 교수가 단지 한 과학자가 아니라 이른바 ‘국민적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엠에프(IMF) 사태 이후 깊은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계층과 지역과 성별과 세대 그리고 지지정당의 차이를 뛰어넘어 미래 과학한국의 비전을 또렷이 보여주며 나라의 발전을 이끌고 갈 어떤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그는 가난한 농촌 출신이지만 복제와 줄기세포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업적을 나타낸 과학영웅일 뿐 아니라,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그의 발언이 표상하듯 진한 애국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더구나 여기에 전세계 난치병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라는 인류애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위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황우석 교수가 이렇게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업적과 자질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부와 언론이 손을 맞잡고 이끌어 온 ‘황우석 영웅 만들기’의 결과 때문이다. 그는 원래 생명공학에서는 주변적 분야에 속하는 동물복제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초기에 그는 복제 소 ‘영롱이’의 성공으로 갑자기 생명공학의 스타로 떠올랐고, 심지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복제한 백두산 호랑이 새끼를 대통령이 북쪽에 선물할 계획(결국 실패하였지만)에 관여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는 박기영 보좌관과 정동영 장관 등 청와대와 정부 및 여당의 전폭적 지원 아래 배아줄기세포 분야로 그의 영역을 확장하여 마침내 한국의 생명공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세계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과학자를 국민영웅으로 만들려고 국가가 기획하고 개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행한 결과만을 낳았다.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기존의 유전학을 비판하고 획득형질 유전과 이를 이용한 농업증산을 주장하여 ‘사회주의 과학’의 영웅으로 떠받들던 리센코, 북한에서 1960년대 초 원자물리학적 방법으로 경락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주장하여 ‘주체과학’의 영웅으로 한때 칭송받았던 김봉한 등이 좋은 예이다. 이들은 모두 과학적 연구성과가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당하게 부풀려져 과학계에서 제대로 검증받을 기회를 못가졌던 것이 치명적 문제였다. ‘영웅 만들기’의 폐해는 또한 특정한 과학자 내지 그의 분야에 국가의 연구자원이 집중되어 과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큰 부작용을 초래한다.  

인위적인 ‘영웅 만들기’를 통해 과학을 키우겠다는 국가의 야심은 잘못된 것이다. 과학자 스스로도 과학계의 검증보다 국가의 지원을 통해 영웅이 되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과학에서는 위대한 발견 못지 않게 조작과 사기 논란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처럼 온 나라를 뒤흔들지는 않는다. ‘영웅 만들기’는 과학과 국가의 잘못된 결합이고 결국 핵폭풍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

김환석/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

현대사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충돌을 배경으로 삼아 나왔다. 종교와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서 다르다. 종교는 믿음에 의지한다. 과학은 검증에 의존한다. 믿음이 종교가 의지하는 방법론이므로 경전에 계시된 진리를 반박하는 사실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그것들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검증에 의존하고 이론들 사이의 경쟁을 허용하므로 과학은 꾸준히 나아간다.

과학의 성취는 필연적으로 종교의 토대를 허물었다. 종교는 과학에 거세게 저항했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 이후 과학적 지식에 의해 자신의 신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불행하게도 과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과학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를 줄곧 줄였다. 과학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임을 보여 주었다. 이어 태양 또한 은하계의 뭇별 가운데 하나이고 다시 우리 은하 역시 수많은 은하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냈다.

반면에 종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만큼 중요한 존재며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남는다고 안심시킨다. 과학의 성과들을 누리면서도 사람들이 결정적 순간엔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그래서 이상하지 않다.

이번 줄기세포 논란에도 사람의 왜소화가 포함되었다. 진화생물학은 모든 생명체가 첫 생명체의 후손이고 외양에서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를 많이 공유하며 그런 뜻에서 혈연을 지녔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밝혀냈다. 이런 발견은 사람은 다른 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우리의 통념과 어긋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구호로 흔히 포장되는 이런 통념은 모든 종교의 가장 근본적 신조다. 여기서 다시 종교와 과학은 부딪친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이 과학적 연구를 인도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그것이 환상임을 지적하면서 현대의 윤리는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이런 주장은 과학적 연구를 인도할 윤리는 과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필요한 지식들은 과학자들만이 지녔기 때문이다. 과학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고 전문화가 가속되므로 윤리적 판단에 필요한 지식들을 일반 시민들이 지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과학이 경쟁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점이다. 검증을 통해서 이론들의 우열이 가려지므로 과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경쟁이 치열하다. 자연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내용이 허술한 연구나 이론은 이내 밀려난다. 반면에 종교는 경쟁을 거부한다. 배교나 이단을 허용하는 종교는 아직 나온 적이 없다. 10여 년 전 미국 생물학자들이 황 교수의 연구에 선행적인 배자분할 실험에 성공했을 때 교황청 기관지는 ‘광기의 터널로 들어서는’ 과학자들을 규제하라고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역사를 살피면 우리는 권력이 잘못 작용하면 과학이 사악하게 쓰인다는 사실을 만난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의 생체실험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교훈적인 사례는 공산주의 러시아에서 트로핌 리센코의 학설이 초래한 비극이다. 스탈린 시대의 농업생물학자인 리센코는 멘델의 법칙에 입각한 유전학설을 비판하며, 환경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생물학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자연과학마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바라보던 스탈린 시대의 광풍(狂風)에 힘입어 “채소를 교육시킬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공식 이론으로서 지위를 차지했지만 이로 인한 농업 실패로 수많은 농민이 굶어죽었다. 권력이 개입해 이론 사이의 경쟁을 배제하고 특정 이론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면 이런 폐해가 생겨난다.

소비자의 이익을 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나오는 경쟁이다. 이런 이치는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 등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부가 나서서 인간 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윤리적 규정을 만든다면 걱정스럽다. 어떤 윤리나 법도 과학의 빠른 발전을 따라갈 수 없으므로 그런 규정들은 윤리를 지키기보다는 과학의 발목을 잡는다. 그저 경쟁하게 하라. 기업가들이든, 과학자들이든.

복거일/소설가

 

 

 

 

두 사람 모두 황우석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 개입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초점은 약간 다르다. 김환석 교수가 "과학과 국가의 잘못된 결합"을 문제삼고 있다면, 복거일씨의 경우는 '국가권력의 개입' 자체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유가 특이한데, 국가는 종교 등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그런 연장선상에서라면 복거일의 본격적인 '종교비판론'을 기대해봄직하다! 더 나아가 지극히 종교 정향적인 미국식 정치 마인드에 대한 비판도!). 여하튼 나는 '인용'만 하며,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06. 01. 09.

P.S. '리센코 어페어'에 대한 참고자료로 '맑스 코뮤날레'에서 발표됐던 논문 "혁명기의 러시아 과학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를 옮겨놓는다(복거일과는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비록 '노동자-농민'이 이런 문제에서도 '해결사'가 되어줄 거란 전망에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필자는 김해민(노동자의 힘 회원)님이다.

리센코 사건
1936년, 소련의 과학기술계에서는 특별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의 레닌 농학아카데미에서 발표된 "유전학에서의 두경향"이라는 논문에서 리센코(T. D. Lysenko)는 환경적 조작과 접목에 의해 유전이 변형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주류였던 멘델과 모건의 유전학을 반진화론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견해가 진정한 다윈주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발표는 과학기술계의 논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8년에 개최된 같은 회의 에서 우크라이나 농부의 아들인 리센코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멘델의 과학을 "반동적이면서 퇴폐적이다"고 규정하고 그들의 과학을 추종하는 자를 "소비에트 인민의 적이다"라고 공격하며 자신들의 학설을 사회주의 생물학 중 하나로 당이 공식적으로 채택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은 이를 승인함으로써 과학기술계의 논쟁은 일단락 되었지만 비극은 시작되었다. 이 여파로 유전학 과목은 폐강되고 관련 연구소는 폐쇄되었다. 과학기술자들 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당의 결정을 찬양하는 공개적인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은 사람은 내쫓기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당시 곡류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통해 현대 식물 육종학에 대한 기초를 세운 과학자 바빌로프도 이 과정에서 실각되고 볼가강 중류의 사하로프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맹위를 떨치던 리센코주의도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인해 사라지는 운명에 처해 버렸다. 맑스주의 내에서도 리센코 학설은 '맑스주의와 정반대 되는 것' 혹은 '과학적 특성이 결코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아울러 소련의 사회주의 과학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급진과학운동은, 소련의 폐쇄적인 흐름과는 다르게 다양한 논의를 바탕으로 운동의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과학운동은 무려 10여 년 간의 소강상태에 빠져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물론 단편적인 사건으로 혁명기 러시아의 과학기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스탈린시기에 과학기술은 매우 큰 발전을 이룩한 것 또한 사실이다. 냉전이 살벌한 시기에도 미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소련의 과학기술 수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자본주의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해주는 사건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숙련노동자의 조직된 힘을 분쇄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도입해 왔고,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로 줄곧 노동자들을 소외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혁명기 러시아에서 그것도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소련에서 무엇 때문에 이러한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것도 20년이나 지속되었을까?

1917년 혁명 후 볼셰비키 혁명 정부 앞에 놓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레닌은 자국의 정세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연합군을 탈퇴하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연합국측의 간섭전쟁과 국내 반-볼셰비키세력들에 의한 격렬한 내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내전은 혁명을 더욱 힘들게 했다. 산업 생산량은 극도로 하락하였고,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이 시기 볼셰비키 정부는 소련의 낙후된 생산력 복구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레닌은 생산력의 복구를 위해 내전동안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산업경영권을 중앙집권화하고 자주적 '노동자 관리'기구를 강제 폐지시켜 버렸다. 또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발전된 과학기술 중에서 선진적인 부분 채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과학적 관리 기법이라는 테일러 시스템을 도입시켰다. "근로인민 자신들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고 현명하게 적용된다면 테일러시스템은 전 근로인민의 필요노동일을 훨씬 절감시키는 믿음직한 수단이 될 것이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른바 이 '소비에트 테일러시스템'은 스탈린 시대까지 이어졌다. 1921년 3월 제10차 전당대회에서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완전히 폐지하였으나 노동부에서 차등임금제와 식량배급량 차별제, 노동카드와 성과급제 및 반-볼셰비키 성향의 부르주아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당과 국가의 여러 정책들을 주도하는 핵심적인 위치로 상승하게 되었고 이들은 대개 산업행정, 고등기술교육, 연구 기관, 기획기관에서 최고의 기술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영향력을 근거로 정책 결정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고, 이러한 면들이 기술관료주의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24년 레닌이 죽은 후,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레닌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급격한 산업화를 주장하였다. 1929년에 스탈린은 집단농장화를 실시하고 대규모 산업화 정책에 착수하게 되었다. 스탈린 시대에는 과학을 생산력이라기보다는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로 인식하였다. 모든 과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재편할 것을 요구하였고 과학과 철학 모두에 대한 당성의 우위를 강조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기술관료들은 공산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붉은 전문가'로 교체되었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형식상으로 남아 있던 산업의 집단적 관리 원칙과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하는 노조의 마지막 권한을 모두 폐지해 버렸다.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까지 흘러온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은 혁명기 러시아가 리센코주의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었다. 레닌과 스탈린 모두 소련의 낙후된 생산력을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박한 과제로 다가왔다. 레닌은 과학을 생산력으로 주요하게 파악했고, 부르주아의 선진 과학을 수용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간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과학기술에서 자본주의적 이용만 제거하면 순수한 기술만 남아 이를 사회주의적으로 이용하면 된다는 기술 중립론적 시각으로 비판받고 있다. 스탈린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낙후된 경제의 복원과 반-볼셰비키 성향의 기술관료의 관료주의 폐지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고, 당시 거의 쿠데타적 권력 쟁탈과정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과학을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로 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스탈린처럼 과학기술을 이데올로기로 보는 관점은 과학기술과 사회관계를 잘 설명해 주기는 하지만 과학기술의 내재적 발전 경향을 지나치게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단지 누가 이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아무리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과학기술혁명이 수준 높은 생산력으로 되어 인민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인간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과학기술 생산과정/이용과정(노동과정)속에서 주체와의 관계와 사회관계속에서 판단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즉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소유관계의 문제와 아울러 과학기술 생산과정에서의 기술적 조직적 생산관계와 개발 생산단위들 간의 경제운영관계의 문제 그리고 사회관계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사고 해야한다. 결국, 당시 급박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공산당의 잘못된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은 소유문제가 해결된 사회주의국가에서도 과학기술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혁명기 러시아라면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어떻게 과학기술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까? 맑스는 이러한 질문에 한가지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맑스에 따르면 진리를 파악하는 자는 관념적 몽상가들이나 학자가 아니라 가장 실천적인 계급, 즉 이론적인 수준에 한정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서 실천적 수준에서 진실을 증명코자 하는 계급, 즉 대다수 노동자 계급과 그 노동자 전위세력으로 파악하였다. 맑스는 인식에 있어 실천의 중요성, 그리고 가장 실천적인 계급적 관점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한번 상상해 보자. 레닌이 자주적 노동자관리기구를 폐지시키지 않고, 노동자-농민의 자주성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진행했다면, 그리고 스탈린이 그나마 남아있던 노동자들의 마지막 자주권을 박탈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노동자-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장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민주적 의사 통로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실천적 주체인 노동자들은 테일러 주의를 사회주의에 적용하면서 테일러 주의의 문제점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폐기시키지 않았을까? 그래서 새롭게 사회주의적 노동과정을 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농민들은 리센코주의의 과학을 집단 농장에 적용하면서 리센코주의의 진실성을 적어도 20년보다는 빨리 확인할 수 있지 않았을까?(강조는 나의 것) 

 

 

 

 

P.S.2. 이너파벨님이 알려주셨는데, 하인리히 야곱의 <빵의 역사>(우물이있는집, 2005)에도 리센코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아마도 '러시아의 빵 - 1917년'이란 절에서인 모양이다. 재인용하자면, 가혹한 기후를 견뎌낼 수 있는 최상의 품종의 밀을 찾아내 육종을 통해 종자로 공급하려는 계획을 가진 바빌로프에게 리센코의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 

"식물학은 시간이 남아돌지 모르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우리는 여기, 러시아에서 혁명 과업을 완수했다. 거만하게도 인종적 특성과 불변하는 성질을 내세우는 멘델의 과학 따위는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렇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살아있는 생명체를 변화시키는데 몇 세대가 걸린다고 믿을 수 없다. 다윈과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명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환경이다. 새로운 조건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인간을 통해 관찰한 바 있다. 과연 식물이 인간보다 더 반동적인지 살펴보자." 그러자 바빌로프가 응수한다: "만일 환경만으로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아마 리센코는 아무 씨앗이나 집어들고 시베리아의 툰드라지대로 가지고가서 심은 뒤 씨앗이 얼지 않도록 평원 전체를 데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 분명 새로운 조건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새로운 물적 토대는 새로운 인간을 형성해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그 새로운 조건이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조건 없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인간'은 어디서 굴러떨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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