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
이번 주 나온 가장 눈에 띄는 신간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이다. 출간 소식은 이미 이달초부터 접했고 '물건'이 나오기만을 고대하던 참이었다.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에 이어서 근 1년만에 가라타니의 책이 출간된 것인데, 출판사에서는 연이어 그의 책들은 낼 모양이다(표지에서 큼지막한 '1'자가 뜻하는 바이다). 이번 타이틀이 '세계공화국'인데, 그의 비평은 막바로 '비평의 세계화'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국내 비평집들이 초판을 소화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유독 그의 비평집들만이 독자들로부터 환대와 환영을 받아온 탓이다. '비평'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그간에 불철저했던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책은 내일 역자에게 받기로 했는데, 그 전에 리뷰 먼저 읽어둔다. 마침 오늘자 한겨레의 '책과 생각'의 1면을 다 책임지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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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7. 06. 09) 국경을 지워라, 느린 혁명으로
가라타니 고진(66)은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비평가다. 1970년대까지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가 누렸던 지위를 1980년대 이후 가라타니가 대체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마루야마가 ‘사상계의 천황’이었다면, 가라타니는 그 천황의 자리를 뒤엎은 전복자다. 그는 무리를 거느리지 않은 단독자다. 그는 자객처럼 지배적 사상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심장을 겨냥한다. 그의 무기는 전방위로 뻗친 지식과 불온한 비판성이다. 문학에서부터 철학·경제학·역사학·언어학, 심지어 건축학과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르네상스적 지식의 힘으로 그는 현실이라는 괴물의 딱딱한 외피를 뚫고 탄환처럼 그 속살을 관통한다. 그의 최근 작업은 그 괴물이 고꾸라지고 난 뒤에 열리는 시야를 보여준다. 그의 2006년 저작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그 시야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1845년 카를 마르크스가 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세계공화국으로>를 쓴 가라타니의 경우에 정확히 대응한다. 이제까지 그의 작업이 불온성을 내장한 해석이자 비판이었다면, <세계공화국으로>는 명백히 ‘변혁’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책은 마르크스가 ‘테제’를 쓰고 3년 뒤 작심하고 집필한 <공산당 선언>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 말하자면 이 책은 팸플릿이고 선언문이며 새 세계를 향한 이행 전략론이다. 팸플릿 성격이 강한 만큼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다른 책들이 무수한 전문용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지만, 이 책은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은이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일반인이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당대의 여러 사회주의 조류와 대결했듯이, 가라타니도 이 선언문에서 기존 이념과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의 대결 지점은 마르크스와 이마누엘 칸트다. 기존의 변혁 운동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논거로 마르크스가 동원된다면, 칸트는 마르크스를 넘어 세계 변혁의 방향과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다. 칸트의 한계를 마르크스가 뛰어넘었다는 전통적 견해를 거의 정반대로 뒤엎은 꼴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마르크스 이론의 치명적 약점은 ‘국가론’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분석에서는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지만, ‘국가’에 관한 한 시종일관 프루동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국가 없는 세상을 꿈꾼 근대 아나키즘의 시발점이다. 프루동은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뒤엎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 곧 생산자 협동조합 체제를 만들면 국가가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하는 외부적 장치일 뿐이므로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면 국가라는 껍데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생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프롤레타리아가 연합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무너뜨리면 국가는 사라진다고 믿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면,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일시적 국가기구를 상정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독재론은 혁명의 구체적 상황에서는 국가기구를 일시적으로 틀어쥐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지, 국가의 자연스런 소멸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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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는 프루동-마르크스가 국가 안에서 국가를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고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국가란 다른 국가에 대항해서 존립한다. 국가를 내부의 힘으로 해체한다고 해도, 다른 국가들이 먹어치워 더 큰 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다른 국가들이 있는 한 국가는 해체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프루동의 아나키즘은 순진한 사상이다. 그렇다면, 세계동시혁명으로 일거에 모든 국가를 철거해 버리면 되지 않는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에서 그런 가능성을 내비쳤는데, 가라타니는 단호하게 이 책의 주장을 부정한다. <제국>은 1990년 이후 세계가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제국이 됐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수많은 국민국가들의 갈등과 경합 체제다. 다중의 반란이 제국의 그물을 찢어낼 것이라는 전망도 가라타니가 보기엔 환상이다. 다중의 반란은 세계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개별 국민국가만 더욱 강화시키고 말 것이 틀림없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프루동-마르크스를 그대로 이어받은 ‘국가론 없는 아나키즘’이다.
그렇다면 변혁의 전망은 없는 것인가. 여기서 가라타니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주목한다. 개별 국민국가들의 팽창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외부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국가 내부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것대로 계속해야 하지만, 인류적 차원의 집합적 힘으로 국민국가의 준동을 억누르고 궁극적으로 그 국가를 소멸시켜야만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총체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 칸트는 그런 외적 장치로서 ‘세계공화국’이란 이념을 내놓았다. 현재의 국제연합(유엔)이 장래의 세계공화국 모태라 할 수 있다. 그 실천의 첫발은 국민국가들의 군사 주권을 국제연합으로 넘기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세계공화국은 먼 미래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변혁이라기보다는 점진적 이행에 가깝다. 그러나 이 점진성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의 경로다. 인류를 이끌어주는 이념 또는 이상 아래서 오늘의 현실과 싸우는 것, 가라타니가 그의 선언문에서 밝히는 전략이다.(고명섭 기자)
삐딱이는 나의 힘!
가라타니, 주류에 끊임없이 저항…‘퇴물 공산주의’ 부활 나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에서 이력을 시작한 사람이다. 1969년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에 관한 글로 비평계에 입문한 뒤 1972년 첫 비평집 <불안에 떠는 인간>을 출간했다. 문학비평가로서 그의 이력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2005년 <근대문학의 종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비평가라는 규정은 가라타니라는 지식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의 삶을 일관하는 것은 ‘주류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일본 지식계에 프랑스 탈구조주의 운동을 소개하고 퍼뜨린 사람이었다. 뭉뚱그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 흐름을 앞장서서 받아들인 것인데, 그것은 근대주의적 억압 질서에 대한 지적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 시절에 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그 저항의 학문적 결과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서 그는 미셸 푸코의 고고학 방법을 원용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파고들어갔다. 근대적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 국민문학이 성립됐을 거라는 상식적 믿음을 깨뜨리고, 제도로서 형성 중이던 근대문학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했다. 국민이라는 관념이 성립한 것이 최근의 일임을 문학 연구로 보여준 것이다.
1978년 출간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도 시대 흐름을 삐딱하게 보는 그의 반골 정신이 밴 작품이다. 그 시절 일본 지식계에서 ‘마르크스’ 하면 퇴물 취급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마르크스를 혁신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내려 했다. 1980년대까지 프랑스 철학의 영향 아래 ‘해체주의’를 실천하던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비평적 태도에 깊숙한 변화를 겪었다.
해체주의란 사실상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그 이념의 억압성을 고발하는 것인데, 그 사회주의가 파산해버린 것이다. 일본 안에서도 사회당과 공산당이 몰락하고 좌파가 궤멸했다.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에도 계속되는 해체주의란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바지가 될 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가라타니는 모두들 ‘공산주의는 끝났다’며 돌아선 지점에서 다시 ‘코뮤니즘’을 되살리는 작업에 나섰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변화시키는 이론”이 필요함을 절감한 것이다. 10년 가까운 작업 끝에 내놓은 <트랜스크리틱>이 그의 새로운 관점을 담은 책이다. <트랜스크리틱>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과정에서 칸트를 만났다. 내가 하려고 한 것은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었다.”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런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트랜스크리틱>의 후속 작업으로 그가 하고 있는 것이 <트랜스크리틱 2> 저술인데, 이 저술을 대중적 문체로 풀어내 미리 보여준 것이 이번에 출간된 <세계공화국으로>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보면 오히려 아나키스트 쪽”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아나키즘을 비판한 <세계공화국으로>는 일종의 자기비판인 셈이다. 그 자기비판으로써 가라타니는 새로운 세계전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7. 06.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