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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삐에로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내가 처음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이다. 읽기 전에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들을 먼저 수집했는데, 결론은 "이 사람 스타일이 어떤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였다. 리뷰들을 읽어보면 하나같이 "재미있고" "경쾌하고" "감동적이다"는 식으로 호평 일색이라는 것은 확인되지만, 아아 아마도 이런 스타일의 글을 쓰겠구나 하는 그림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적어도 내 독서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꽤 참신한 스타일을 갖추고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랬다. 깜짝 놀랄 만큼 신선했다. 특히, 피와 불과 가족애와 복수와 권선징악이라는 너무나도 고전적인 소재를 새롭게 가공하려는 의도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천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결론적으로 신선한 만큼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피와 불의 이야기이다──라고 말하면 역시 너무 무겁다. 피와 불이라는 뭔가 인간을 초월한 듯이 엄숙한 단어에서 무게를 덜어내서, '유전자'와 '방화'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화자인 형 이즈미는 유전자정보 회사 '진리치'에서 근무하고, 동생 하루는 강간범의 유전자를 이어받았다. 방화사건의 수수께끼에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하루다. 형제가 거주하는 센다이 시 일대에 일어나는 연쇄방화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방화지역 근처에는 반드시 기묘한 메시지를 품은 그래피티 아트가 있다. 그 규칙을 하루가 알아낸 것이다. 이즈미는 하루가 혹시 방화사건과 연루된 것은 아닌지, 어딘가 정신이 불안정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나름대로 사건의 진상을 향해 다가간다.
── 라는 식의 요약은 사실 이 이야기의 중심을 간단히 비껴나가 버리고 말지만,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진상을 이런 데서 밝힐 수도 없는 일. 이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만약에 완벽히 분리시킬 수 있다면, 아마 내용 자체는 엄청나게 식상할 수도 있겠다. 앞서 말했듯이 깜짝 놀랄 정도로 '고전적인'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소재들이 구성의 기발함에 도움받아 아주 좋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본격 미스터리처럼 강박적인 정교함을 무기로 삼는 것은 아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예컨대 고등수학 문제풀이에 비유한다면, 이 책은 말 그대로 퍼즐놀이다. 교묘한 미스리딩은 없지만 가벼운 서술트릭과 곳곳에 배치된 복선들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대화나 독백이 미스터리의 진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아마 쉽게 눈치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치채도 상관 없다. 이상하게도 트릭과 복선을 눈치채 버려도 소설을 읽는 재미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중력 삐에로] 한 권으로는 지나친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의 스타일은 이렇게 요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는 하이브리드. 미스터리와 스토리텔링, 캐릭터-드리븐(?), 시나리오적인 구성 등등 작법상의 혼합이나 각기 다른 영역에서 쓰이는 소재들의 혼합, 그냥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의 혼합성 등. 둘째는 책 제목이 드러내고 있는,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전하는' 태도.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력이 없는 듯 '붕붕 날아다니는', 슬픈 분장을 하고 관객을 웃기는 '중력의 삐에로'는 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야기꾼으로서의 이사카 코타로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 와 '불' 의 이야기에서 무게를 덜어내는 삐에로의 손이야말로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의 최강점이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