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래의 미학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황윤정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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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정 작가의 [갈래의 미학]은 단편 소설 2개만 수록된 83쪽에 불과하지만, 표지 디자인이 곱고 종이 재질이 고급스럽고 활자는 우아하다. 아이스크림이나 작은 케이크처럼 느껴진다. 수록작은 <갈래의 미학>과 <보름>이다. 소설가 위수정의 해설도 수록되어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한국소설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우선 황윤정 작가의 담백한 문장이 눈길을 끈다. 우리가 보통 소설가의 문장이나 문체를 언급할 때에는 대개 미문인 경우가 많다. 또는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문장인 경우이다. 그런데, 황윤정 작가의 문장은 미문이라고 할 만한 게 없고 개성을 드러내는 문체라고 할 것도 딱히 없다. 상당히 정제된 문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렇다고 문장이 단순하거나 평이한 것도 아니다. 보석 세공처럼 절제되고 우아하다. 동시에 자연스럽다. 비문이 없고 정확한 표현과 어휘 선택이 돋보인다. 멋을 부리지 않는다는 게 큰 장점이다. 근래 뜨는 몇 명 작가들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끝까지 읽어내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감성적인 문체가 오히려 읽기 힘들게 하고 은근히 멋을 부리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황윤정 작가의 문장은 딱히 걸리는 게 없고 고요하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한다. 끝까지 읽게 된다. 문체를 크게 드러내지 않고 삶의 본질과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가라고 평하고 싶다.


표제작 단편 <갈래의 미학>은 오랜만에 접하는 소설의 미학이었다. 순수 소설은 서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키는 무언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었을 때 잔잔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화자인 나는, 절친 세라와 미국 여행을 떠난다. 평생 오빠만 챙기는 엄마 때문에, 그리고 피곤한 직장 생활 때문에, 느닷없이 세라의 제안을 수용하고 함께 미국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은 인생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가 된다. 라이트모티프 란 악극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심 악상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전조' 같은 것이다.


세라는 말했다. 이제는 연극이나 문학 등에도 쓰이는 개념인 라이트모티프가 우리의 인생 속에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무심코 겪는 사소한 에피소드부터 심각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순간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종의 중심 악상일지도 모른다고. 세라는 가면 갈수록 그런 믿음에 완전히 심취한 것처럼 보였다. 계절보다 빨리 피어난 꽃을 발견했다든지, 첫사랑이었던 선배의 결혼식 날 구두 밑창이 뜯어졌다든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를 위반한 자동차에 발을 밝혔다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세라는 씩 웃으며 마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전조를 느끼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작품 <갈래의 미학>은 화자인 '나'가 절친인 세라와의 미국 여행을 계기로 (우정과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 때문에) 멀어지게 되는 이야기다. 가슴 아프고 미묘한 라이트모티프 순간을 보여준다. 단편 소설의 미학을 간직한 이 작품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두 번째 작품 <보름>은 우리 사회에 자주 문제가 되는 폭력적인 이슈를 다룬 작품이다. <갈래의 미학>에서는 화자가 여성이고 일인칭 시점이다. <보름>에서는 화자가 남성이고 삼인칭 시점이다. 그런데 어색한 구석이 없다. 소설가는 작품의 화자를 남성으로 하든 여성으로 하든 독자에게 어색함을 주면 안 된다. 남자 주인공인데 어딘지 모르게 여성스럽네, 작가가 여자라서 그런가 봐. 이런 의문을 남기면 안 된다. 황윤정 작가는 인물의 성별과 시점을 바꾸어도 그런 의문이나 미숙함을 드러내지 않고 아주 효과적으로 쓸 줄 아는 작가다. 절제된 문장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성(性)을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지녔기 때문인 것 같다. 부러운 재능이다. <보름>의 마지막 문장은 폭력적인 우리 사회에서도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막연한 바람은 희망이 아니다. 작은 실천의 첫걸음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


작가의 말도 인상 깊다. 작가는 자동차 접촉 사고를 당한 뒤에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긴 심호흡 끝에 다시 운전할 수 있었다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되뇌던 한 문장 덕분이었다고 한다.

또하나의 극복해야 할 무언가를 만났다.


작가는 상대하기 벅찬 벽을 마주할 때면 그렇게 중얼거리곤 한다고.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회복 탄력성을 가지게 된 것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소설을 쓰면서 예전보다 제법 단단하고 옹골진 자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계속 쓰고 있고, 계속 써야만 한다고 다짐하는 작가에게,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엄마를 요양원에 다시 데려다주고 난 뒤에 버스 안에서 우연히 세라의 딸 재이를 만났을 때 나는 이것이 어쩌면 내 인생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사고의 패턴이 지극히 세라스럽다고 느꼈고, 한편으로는 세라와 한창 어울려 지내던 이십대 중반 무렵까지는 한 번도 세라스럽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내심 놀라고 말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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