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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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이반 일리치, 현암사(2016)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작가는 원래 사제였으나 교회를 비판하여 교황청과 마찰을 겪는다. 그리고 사제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이런 지혜로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지혜로운 책이라고? 맞긴 맞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H2O와 망각의 강>으로 처음 이 작가를 접했다. 그런데 상당히 어려워서 다 읽지 못했다. 심지어 곧 이사하기 위해 책을 좀 정리할 때, 처분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알라딘중고서점에다 팔아버릴 책더미에 던져두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텍스트의 포도밭>에 접하게 되었다.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이라는 책 소개가 눈길을 끈 것이다. 온라인 알라딘 서점에서 미리보기로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어느 책을 사기로 하면 당장 사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서 검색했다. 절판되기 직전인지 뭔지, 아무튼 종각 영풍과 강남 교보문고에 각 1권씩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운동하러 나간다고 뻥치고 강남으로 가서 책을 구입했다. (책 사러 간다고 하면 아내는 기겁한다. 집에 책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이사하는데, 책을 처분해야지, 뭘 또 산다고?!)


음, 옆길로 너무 샜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오면, 아무튼 이 책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에 대한 설명이 뭔가 내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휴대폰과 유튜브 등 전자 미디어 시대의 읽기에 대한 회의감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오랜 직장생활에서 자주 느꼈던 점이 하나 있다. The Less is More이다. 이 말을 독서와 연결한다면 “책을 많이 읽을수록 얻는 것은 더 적을 것이다”라고나. 혹은 “더 적게 읽을수록 더 많이 얻을 것이다”라고나. 이것저것 너무 많이 욕심내어 읽기 보다는 좋은 책을 골라 정독하고 묵독하고 되풀이하여 읽는 것이 더욱더 지혜로운 독서법이다. 그런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막연히 느끼고 있던 점을 이 책은 확실히 집어준다. 12세기 수도사 성 빅토르의 후고가 1128년에 쓴 최초의 독서법 <디다스칼리콘>이라는 책에 대한 설명서이기도 하다. 생소한 라틴어를 마구 건네는 저자의 글쓰기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잡고 정독하니, 내가 지닌 약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준다. 여러 면에서 생각할 것들을 던져 준 책.


특히 책(혹은 문자)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 인상 깊다. 페이지라는 거울을 통해 자아를 새로 발견한다는 것이다. 읽기는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독하고 기억을 위해 되풀이하여 씹어 삼키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오늘날 우리는 빠르게 읽고 핵심만 간추려 따로 메모하는 정도만으로 읽기를 다했다고 여긴다. 반면 12세기 수도사들은 온 몸으로 읽고 기억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머릿속에 건설하고자 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여 온전한 지식 세계를 자기나름대로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 날의 독서를 모두 이런 방식으로 전환해야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짧은 문장 이외에는 전혀 읽지 않는 21세기 현대에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책의 3분의 1이 넘는 각주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읽어 볼 만하다. 각주에서 문득 깨달은 것 하나 - 우리는 엄청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류 최고의 테크놀로지는 역시 "문자"라는 것! 그런데, 문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문자를 경계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지식을 체득하지 않고 그저 문자 형태로 저장만 한다면 무척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믿었던 것 같다. 저자 Mr. 일리치는 이러한 문자의 양면성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앞으로 여러번 따져봐야 할 주제인 듯.)


책을 읽다가 중간에 벌떡 일어났다. 팔아버릴 책더미에다 던져두었던 <H2O와 망각의 강>을 되찾아 서재에 가져와 다시 꽂았다. 나중에 다시 도전해야지.


책 제목 <텍스트의 포도밭>은 의미심장하다. 눈으로만 바쁘게 읽기보다는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포도알 하나하나 씹어 삼키듯이. 문장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새겨두어할 독서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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