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절기. 갑작스럽게 아침저녁 공기가 쌀쌀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집을 나설 때 제법 든든히 입는다. 호흡기관이 약한 나는 매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독감 예방 주사를 맞는다. 올해에는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돌아다니니, 독감의 손길에 잡힐 확률이 높지는 않다. 그래도 예방 주사는 맞아야 한다. 감기 바이러스와 기저질환인 천식이 연합전선을 펼치면, 나로선 속수무책 당할 게 분명하니까. 게다가 혹시라도 코로나바이러스까지 겹친다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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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차가운 날씨 때문에 운동을 제대로 못 하게 되었다. 의사의 권유로 음식도 가려먹고 운동도 꾸준히 해야 하는데 말이다. 운동을 위해 새벽에 가까운 공원에 가려고 하면, 독감이 두려워졌다. 반대로 방안에서 책이나 유튜브에 빠지려고 하면, 운동 부족이 걱정되었다. 고민 끝에 차선책으로 실내 운동을 하기로 했다. 신발장 앞에서 거실 끝까지 빠르게 걷거나 가볍게 달리기. 층간 소음 문제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삼 층인 우리 집 바로 아래층은 일종의 통로로 뻥 뚫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옆집의 경우 아래층에 사람이 산다. 우리 집 아래층만 텅빈 공간(길목)이다. 우리 집은 실제로는 삼 층이 아니라 이 층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 아파트 복도를 따라 옆집의 옆집의 옆집으로 이동하면 그 집은 어느새 삼 층이다. 즉, 그 집 아래로는 두 채의 집이 있다. 경사진 언덕에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이런 이상한 구조가 된 것 같다. 어쨌든 덕분에 내가 새벽마다 집안에서 달리기를 과감하게 거행해도 층간 소음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닌 셈이다.


30분 정도 거실 달리기를 하다가, 다시 30분 동안 거실 걷기를 한다. 그런데 그냥 걷기가 아깝다. 그래서 책을 한 권 들고 읽으며 걷는다. 읽는 동시에 걷는 건, 독서와 운동을 겸하려는 내 나름의 처방이지만, 솔직히 애나 번스의 장편소설 <밀크맨>의 영향을 받은 탓도 없지는 않다. <밀크맨>에서는 화자인 주인공 소녀가 걸어다니며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사회에서 ‘문제’로 인식된다. 밀크맨이 저지르는 스토킹이라는 범죄 행위도, 밀크맨의 잘못만이 아니라, 마치 책을 읽으며 걷는 소녀가 자초한 일인 것마냥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어쨌든 그 대목이 내게는 꽤나 흥미롭고 인상 깊었다.



어느날 내가 <아이반호>를 읽으며 걷는데, 그 사람이 차를 타고 다가왔다. 나는 자주 걸어다니면서 책을 읽었다. 나는 그게 뭐가 잘못인지 몰랐는데 그게 나중에는 나를 향한 비난의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걸으면서 책을 읽는다’가 확실히 그 근거 목록에 들어 있었다.

...


형부가 말했다. “내가 말한 것처럼 처제는 걸어다니면서 책을 읽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경계를 안 하니 당연하잖아. 지난주 수요일 밤에 처제가 물밑의 힘과 영향을 전혀 인지 못 하고 위험스럽게 그 지역에 들어가는 사회적으로 미친 행동을 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조그만 독서등을 켜고 가더라. 그러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건 마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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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형부가 형부답지 않게 책 문제를 다시 꺼내며 나를 나무랐다. “그래, 책 말야. 그렇게 걸어다니는 거하고.” 그러고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나무랐다.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어둠의 끝까지 쫓겨나고 추방당하고 공동체의 상도를 벗어난 사람이 되어 배척당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걸으면서 책을 읽는 애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고 경고했다. 말도 안 돼, 나는 생각했다. 형부가 과장하고 상상을 보태서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책 읽으면서 걷는 것을 관두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그만 독서등을 달고 다니는 것도 관두고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오른쪽으로 보고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다시 보면 행복해질 거라는 말이죠?” “행복하고는 상관없어.” 셋째 형부가 말했는데 그 말은 그때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내가 들어본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이었다.
















<밀크맨>의 영향으로, 나도 걸으며 책 읽기를 한 번 해보자, 했다. 그래서 날씨가 덥기만 하던 몇 달 전부터 휴일마다 관악산 둘레길 등을 걸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방안에서 읽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데버러 러츠의 <브론테 자매 평전>,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등을 산책길에 들고가서도 읽었다. 길이 평탄하고 자동차나 자전거가 없는 장소라면, 읽기와 걷기를 쉽게 겸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출근하여 여의도 공원과 한강 강변을 거닐며 숀 캐럴의 <다세계>를 읽기도 했다. 이 책은 다소 난해하기에 걸으며 읽기에 적당한 책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양자역학에 대해 상당히 우아하고 흥미로운 설명이 많고, 그런 대목에서는 걷기를 멈추고 벤치나 간이의자에 앉아 읽기에 몰두했다. 조용하고 선선한 강변의 아침 독서는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또다른 나를 만난 것처럼 신기한 기분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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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부터는 트리시 홀의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아침에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읽었고, 저녁에는 버스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 읽기도 했다. 이 책은 작법을 논하기보다, 글쓰기와 편집에 관한 저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에세이에 가깝다. 그럼에도 일반 작법 책보다 유용하고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조언들이 많다. 심지어 살짝 감동적일 때도 있다. 저자는, 논픽션을 쓸 때에도 개인적인 아픔이나 상처 같은 지극히 사적인 내용을 더할 때, 스토리가 강력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 스스로가 그런 식으로 글을 쓴다. 서점에서 아래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심장이 잠깐 멈춘 듯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을 구입하지 않고선 도저히 서점을 벗어날 수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 이들은 자신이 작가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느낀다. ‘운명’이라고 해서 더 나은 글을 쓴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남보다 일찍 깨닫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글의 세계에 더 빨리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 바로 내 경우가 그랬다.

우 비교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대다수가 말하는 과거의 삶이 그렇듯, 나 또한 끔찍할 때가 많았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었다. 펜실베이니아 주 동북부의 어느 비포장도로 위에 내 부모가 직접 지은 단층 주택에서 책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빠가 길 건너편에 살던 내 친구 프레드의 엄마와 캘리포니아 주로 떠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내가 여덟 살 무렵까지는 그곳에 살았으니 분명 그 집에서도 책을 읽긴 했을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 후 우리는 약 8킬로미터 떨어진 외할머니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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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시간, 직장 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는 것마냥 덜컹거린다. 그리고 너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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