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일찍이 젊은 날에 문학 기행의 형식을 통해 작가와 우리 산하와의 관계를 천착해 온 저널리스트 김훈이 이제 자신의 몸으로 우리 산하를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글로 풀어 냈다. 저널리스트 특유의 단정하고 건조한 문장이 인문학적 상상력의 세례를 받아 단아하면서도 명징한 이미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아름다운 문장을 빚어 낸다.

그의 글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한줄 한줄이 버겹게 느껴질지 몰라도 어느 정도 참고 견디어 내면 현기증 날 정도로 돌진하는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나 생태학과 지리학과 역사학과 인류학과 종교학을 종횡으로 넘나드는 그의 서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아니 느낀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 산하와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정어린 글들은 세속 도시에서 때묻은 일상에 절어 살아가는 우리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파문은 곧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며 커져 가 종래는 우리 가슴에 우리 삶의 근원을 향한 끝간데를 모를 그리움의 상처를 남길 것이다.

여행은 결국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떠남이다. 더군다나 그 여행이 우리 산하를 순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문명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이 땅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며, 그들이 남겨 놓은 우리 문명의 실마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무등산에서 담양으로 가는 길 곳곳에 남겨진 오래 된 정자들(식영정, 소쇄원, 취가정 등)을 보며 김훈은 말한다. '정자의 위치는 세상을 깔보지도 않고, 세상을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정자의 내부 구조와 원림 내의 공간 배치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지도 않고, 세상을 정면으로 대하지도 않는다. 정자와 세상과의 관계의 본질은 서늘함이다.'

또한 도산 서당을 둘러보며 김훈은 말한다. '도산 서당의 위치는 인간세와 차단된 격절의 공간도 아니고 인간세에 매몰된 오탁의 공간도 아니다. 그 자리는 인간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한 굽이를 돌아서 있는 위치이며, 인간의 세상과 아름다운 거리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인간의 세상과 쉴새없이 통로를 개설하는 위치이다.'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산하 곳곳에 남겨진 우리 조상들의 흔적들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눈이 있는 자는 볼 것이고 귀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그 흔적들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입을 열어 대답할 것이다.

그의 여행이 단지 옛것과 대화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자연에 대해 쉴새없이 풀어내는 그의 예찬은 콘크리트 벽과 아스팔트 길 위에서 하루를 보내는 우리들에게 신선한 공기와 그리운 풍경을 제공한다. 또한 이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엿보게 하기 보다는 그들의 생명력에 주목하게 만든다. 김훈의 말처럼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김훈은 책 머리에 자신의 글이 가진 운명을 예감한다.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일이 얼마나 버겁고 힘든 것인지. 종국에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힘겨운 싸움임을 토로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돌아서거나 싸움은 애초부터 필요하지도 않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지 않는가.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인 시지프스의 신화 앞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불사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누리어라.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영역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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