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 근대의 풍경
유모토 고이치 지음, 연구공간 수유 + 너머 '동아시아 근대 세미나팀' 옮김 / 그린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배탈·설사에는 정로환'. 약국을 좀체 가지 않는 요즘, 정로환이 아직도 판매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렸을 때 정로환과 어머니가 '아까징끼'라고 부르는, 그 본래 이름이 머큐로크롬인 '빨간약'은 일종의 만병통치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러일전쟁을 공부하면서 정로환의 내력을 알게되었다. 정로환, 한자로 쓰면 '正露丸'이다. 대충 풀어서 읽으면, 참이슬로 만든,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알약, 뭐 그 정도 뜻이 아닐까? 약이름 치고는 참 시적이다. 그런데 정로환의 '참 역사'를 알게 되면 아연실색할 만하다. 정로환의 본래 이름은 '征露丸'이다. 이를 100년 전 역사 속에서 풀어 보면, '러시아를 정벌하기 위한 약'이다. 로(露)자는 러시아의 음차표기인 로서아(露西亞)를 상징한다. 러일전쟁 중 일본 병사들의 상비약으로 만들어진 정로환. 그 이름 속에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 야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근대의 풍경>을 보면, 일본이 서구를 통해 받아들인 무수한 풍경과 풍속·문화 그리고 일상의 기호품들에 대한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경제라는 언뜻 보기에도 녹녹치 않은 주제를 비롯하여 명함·연필·소고기 전골에 이르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이 책은 포괄하고 있다.
생각하기에 정치·경제부분의 역사적 탐색은 그렇다 치고, 일상용품에 이르는 지금은 흔하디 흔한 물품들에 대한 기원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저 흥미와 가십거리를 위한, 박학다식한 교양을 쌓기 위한 것일까? 술자리의 안줏감으로, 좀 더 교양 있는 안줏감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근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의적이다. 더욱이 근대란, 이미 프리즘을 투과한 다양한 빛깔과 같다. 그러기에 하나의 소실점으로 환원하기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국의 근대적 기원을 말하는 대다수의 책들은 대부분 정치적·경제적 측면에 집착한다. 정치·경제를 다루면 뭔가 그럴듯하고 대단한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런 책들은 <일본 근대의 풍경>에서 다루는 풍속·사물·음식·복식 등은 좀처럼 다루지 않는다. 너무나 사소하고 하찮아서 그런 것일까?
감히 말하자면, <일본 근대의 풍경>의 핵심은 제1장 정치·경제부분보다는 2장부터 11장까지의 풍경들이다. 당대의 문화와 풍속을 통해 근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어떤 왜곡과 굴절을 거쳐 '지금-여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탐사는 정치·경제사에 대한 연구만큼이나 중요하다. 단순히 어떤 방식이 더 좋고 나쁘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근대를 연구하는데 풍속과 문화가 중요한 것은, 거창한 담론적 패러다임이 무수하게 변하더라도 풍속과 문화만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상의 습속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온 몸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근대의 습속들을 하나 하나 떼어내어 그 기원을 탐색하는 것만큼 새롭고 즐거운 작업이 또 있을까? 나는 <일본 근대의 풍경>을 통해 굴절된 한국의 근대를, 내 몸 속 깊이 각인된 서구 근대의 흔적들을 또렷이 응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권의 책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 말이다. 나는 이 책이 번역서인 까닭에 어려운 일본어를 번역한 역자들의 노고를 먼저 떠올렸다. 그런데 <풍경>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출판사의 부록을 보는 순간 아찔했다. 누군가 그랬다. 한 권의 책은 세상의 친구들과 사귀려는 몸짓이라고. 그 몸짓을 아주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