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니아의 검은 거인, 반투 스티브 비코
도널드 우즈 지음, 최호정 옮김 / 그린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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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이가, 친구 아이가'. 한때 전국을 강타했던 영화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우정을 만들어 냈던 것은 다름 아닌 특정한 지역성과 언어적 동질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 자신도 저런 친구와의 '우정'이 있었다며 술잔을 부딪치곤 했다. 하지만 난 수긍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우정은 폭력을 미화한, 과거로만 소급되는 불구적 우정이다. 거기엔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린비에서 출판된 {비코}는 저널리스트 도널드 우즈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의식운동 창시자이자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 반투 스티브 비코의 삶을 재조명한 전기이다. 이 책은 30세의 젊은 나이로 치안당국의 폭력에 의해 '차가운 돌바닥 위에 깔린 깔개 위에서 알몸으로 비참하고 외롭게 죽어간' 비코의 비극적인 일생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비코}를 읽어가다 보면, 암울했던 한국의 근현대사와 만나게 된다. 비코와 우즈가 살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어느덧 우리의 현실과 포개지면서 두 가지 단상을 떠올리게 한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국가권력에 의해 피 흘리며 세상을 등진 젊은 청년들의 모습과 얼마 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발길질을 하던 관공서 직원의 모습이 그것이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 신고 기간에 펼쳐진 관공서 직원들의 활극은 {비코}에서 기술되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의 흑인을 향한 폭력과 너무나 닮았다.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폭력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백인들과 무의식적으로 닮아 가는 우리. 우리의 맨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내 가슴을 울린 것은 인종차별정책에 유린당하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처참한 삶도, 이를 통해 되살아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통에 매우 익숙합니다'라는 비코의 말과 도널드 우즈와의 아름다운 '우정의 역사'였다.
비코, 아니 남아프리카 흑인들은 고통에 매우 익숙해 있다. 남아프리카 흑인들은 일상 그 자체가 고통이다. 고통이 너무나 빈번하고 일상화된 나머지 흑인들은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를 찾지 못하고 고통 그 자체를 '숙명'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비코는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코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고통은 숙명이 아니라 백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제 재갈물린 입을 열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외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코는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다. 비코는 흑인해방운동의 '슬로건식 표현을 경멸'했다. 그는 구호와 슬로건을 통해 민중을 선동하고 폭력을 사용하여 국가를 전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코가 바라는 것은 '대화'를 통한, 흑인과 백인의 평등한 공존의 관계이자 왜곡된 흑인의 정체성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이런 비코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이 바로 도널드 우즈이다. 백인 기득권 계층이었던 우즈와 비코의 운명적 만남. 인종차별정책이 법적으로 공식화된 나라에서 백인인 우즈가 비코와 깊은 우정을 나눈 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즈와 비코와의 우정은 무수한 인종적 장벽들을 뛰어 넘는 것이었으며, 흑인과 백인의 만남이 아닌 '인간' 간의 만남이었다. '목숨'을 건 그들의 우정이 있었기에 경찰에 의해 비명횡사한 비코의 삶이 올바르게 평가될 수 있었으며 남아프리카의 모순들이 전 세계로 알려질 수 있었다. 그들의 우정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열매를 품고 있었다.

마이클 잭슨이 생각난다. 'Black or White'를 열창했던 그의 모습에서 백인 주도의 미국 상류사회에 편입하려는 욕망을 느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광을 체현하려는 잭슨의 욕망은 자신의 피부색을 인위적으로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따사로운 봄볕조차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문드러져 가는 얼굴뿐이다. 잭슨은 과연 아자니아(해방된 남아프리카)를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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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1-0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지금 막 저도 리뷰 올리려는 참인데... 기가 팍팍 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