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올 여름이었다. 특별히 피서를 가지 않는 나는, 가장 일반적인 피서법을 선택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보기. 에어컨이 빵빵한 그곳에서 심야영화를 보는 재미는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본 영화는 스칼렛 요한슨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아일랜드>였다. 그저 미래 사회에 대한 공상과학 영화 정도로 생각했고, 더욱이 마이클 베이가 감독했다기에 오락영화로서 재미는 있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온 몸에 바늘이 돋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을 땐 등골이 오싹하다 못해 연거푸 한숨만 나왔다.

영화 <아일랜드>는 인간복제에 관한 영화다. 단순히 인간복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복제 사회가 만들어낸 디스토피아의 한 극단을 제시한 영화였다. 자신들의 생명연장을 위해 수십억원의 돈을 들여 '클론'을 만들어 내는 갑부들. 그리고 백만장자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불로장생을 미끼로 생명을 상품화하는 기업. 이 둘의 결탁 속에서 생명은 하찮은 '상품'에 불과했다. 복제인간은 자신들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믿으며 살지만, 결코 그들은 인간이 아닌, '바코드'가 새겨진 소모품이었다. 자본과 영생불사에 대한 인간의 욕망 앞에서 '생명윤리'는 고리타분한 얘기일 뿐이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인문학자 도정일과 생물학자 최재천의 '대담집' <대담>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 영화 <아일랜드>는 "기술은 있지만 과학적 사고가 없는"(187면) 세계, "진 클리닉(Gene Clinic)"(254면)이 보편화된 미래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영상화한 것이다. 가끔 공상과학 영화가 현실이 될 때가 있지만, <아일랜드>만은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책 <대담>은 내게 생명윤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작품이다.

이 책은 신화(인문학)와 생물학이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분야의 전문가가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때론 이종격투기처럼 피튀기고, 때론 선승의 선문답처럼 유장하게 흘러가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피상적인 자기기만 속에 갇혀있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생명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진정 생명이란 무엇인지, 윤리란 무엇인지의 문제를 절름발로만 따로따로 물어왔던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과학의 인센티브인 양, 윤리에 대한 이야기는 인문학(특히 종교학)의 특권인 양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인문학적 시선과 윤리의 자연과학적 시선을 한 번도 치밀하고 심도 있게 다루어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즉 생명은 자연과학의 전유물이 아니며 윤리 또한 인문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의 혁명성은 이 두 사람의 '소문난 먹물들'이 전혀 '몸을 사리지 않고' 이 처절한 샅바싸움의 현장에 몸소 뛰어든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밥그릇을 통째로 내놓은 채 언제든 '상대방에게 공박당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한 몸짓으로 대화를 주도해나간다.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은 마치 무림의 고수들이 자신들의 계파를 지키기 위한 칼부림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이 꿈꾸는 미래는 서로 다르지 않다. 도정일이 말하는 '두터운 세계', 즉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564면)는 모순이 공존하는 세계이자 약자를, 소수자를 억압하지 않는 "관용의 윤리학"(564면)이 흘러넘치는 세상이다. 또한 최재천이 꿈꾸는 세계는 왜곡된 사회진화론으로 말미암은 우생학적 사고가 범람하는 곳이 아닌, 인간의 협동과 공생(共生)의 윤리가 발현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바로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공생인간, 즉 "호모 심비우스"(593면)들이 활보하는 사회인 것이다. 앞으로 그런 세상이 공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 오기를,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며 상상해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春) 2005-11-2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심비우스가 공생인간이라던가요? 이 책에 나오는 거 같던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질에 상관없이 가격이 비싸서 계속 고민중인데 ^^

청산나비 2005-12-2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았습니다...대담집 대담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