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정여울 지음 / 강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아트 오브 구라'. 아가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다. 언젠가 '미디어 헌터'라는 직함으로 <씨네21>에 발표 되었던 아가씨의 글 제목이다. 영화 <빅 피쉬>에 대한 아가씨의 글을 읽으며 한 편으론 배꼽을 잡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코끝이 찡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영화도 아가씨의 글도 '구라'가 어떻게 하면 '아트'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녀의 글은 '구라'는 거짓말의 속어를 넘어서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들의 범람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가씨의 말처럼 구라는 "사실을 규명하는 데는 무익하지만 벗들의 고단한 일상을 웃음으로 위무하는 일등공신"(269면)인 셈이다.
이번에 아가씨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구라'들을 줄줄이 엮어 우리에게 풍성한 밥상을 선물한다. 그러나 아가씨는 단순히 대중문화에 '탐닉'하고, 그것을 재료 삼아 시시껄렁한 농담을 풀어 놓지는 않는다. 그녀는 미디어 디스토피아의 수렁 속에서 그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한 미시적인 일상의 욕망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다시 재배치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그녀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드라마 <삼순이>를 이종교배하여 '선물'의 철학을 발굴하고, 또한 <홍반장>같은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는 일상의 혁명과 탈주의 철학을 끄집어 낸다. 그러면서 아가씨는 '귀여운' 건방을 떤다. "혁명을 꿈꾸는 감독들이여, 로맨틱 코미디 속에 '향기 나는 폭탄'과 '리본을 단 슬로건'을 장전할 의향은 없으신지."(68면)
이렇듯 그녀는 심각하고 묵직한 철학에, 혹은 너무나 진부한 사랑얘기에조차도 유머와 위트를 첨가하여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 이야기꽃으로 피워낸다. 그래서인지 아가씨의 글은 맛있다. 때론 한정식처럼 앙증맞고 정갈하며 풍성하지만, 때론 된장뚝배기처럼 걸쭉하고 구수한 글맛을 지닌다. 아가씨가 재기발랄하게 구사하는 유머야말로 어쩌면 우리의 삶을 더욱더 강인하게 정련하는 '향기 나는 폭탄'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가씨의 글이 그저 발랄하고 유쾌한 글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이 책은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그녀의 성장배경과 일상을 비빔밥처럼 섞어 놓는다. 그녀는 "더 이상 세상 바깥을 유령처럼 떠돌지"(183면) 않기 위한 몸부림의 끝에서 유머의 힘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아가씨는 "그러나 사랑은, 혹은 우정은 언제나 그 '건너갈 수 없음'과 존재를 걸고 싸우는 일"(190면)이라고 말한다. 아가씨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이제 기꺼이 그녀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곱 살 때 여전히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렸다는 아가씨. 열다섯 살 때에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거라고 다짐했던 아가씨. 추상화처럼 이부자리에 얼룩졌던 그 지도는 아마도 예측할 수도, 그 어떤 제도적인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한없는 자유를 상상하는 아가씨의 영혼이 만들어 낸 '구라의 지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