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연찮게 오래 전 낙서들을 발견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간만에 대청소를 해 보리라 작정하고 덤빈 날일 수도 있고,
이사를 앞두고 버릴 것들을 걸러내기 위해 묵은 짐들을 뒤적이다 넋 놓고 앉은 오후일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어쩜 이리도 여전할까 싶은 글귀들에서부터
과연 이걸 내가 쓴 게 맞나 싶게 낯선 글귀들에 이르기까지
그런 순간들이면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다 헝클어지고 난 한결 말랑말랑해진다.

그리고,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는 쉽게 읽혀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코멘트를 달아 놓았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마지막 책장을 넘긴 이후에도, 한동안 섬뜩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던 책이다.
또한 내가 참 이기적이고 나쁜 인간이란 것을 자각하게끔 했던 책이기도 하다.

흐르는 세월에도 조금도 무르익지 못함인가.
애석하게도 3년 전의 감상이나 지금이나 대략 거기서 거기다.
가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도 여전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함이 없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해리엇과 데이빗은 ‘이상적인 가족 만들기’란 원대한 꿈을 안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만류가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고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꿈은 실현가능할 것도 같았다.
교외의 널찍한 집과 사랑스런 아이들.. 경제적인 부담이 있긴 했지만 당당하게 주위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다섯 째 아이 벤이 잉태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그 꿈은 빈번하게 시험대 위에 올라가게 되고 결국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벤, 그의 존재는 사랑으로 품어 안을 수 있으리라 믿는 가족들의 노력을 번번이 수포로 돌려가며 점차 집안을 잠식해 들어가는 괴물 같은 아이로 커 간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사람으로 인해 다른 여섯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이 한 집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아주 잔인한 물음이다.
결국 데이빗과 형제들은 벤을 버렸지만, 엘리엇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관하고 있다.
벤이 스스로 떠나갈 날을 내심 기다리면서.
난 줄곧 데이빗 편이었고 엘리엇이 그만 벤을 놓아버리기를 바랬었다.
만약 엘리엇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난 지금과는 달리 벤을 동정하고 비정한 가족들을 비난했을런지도 모른다.
앨리엇이 위태위태하게라도 버팅기고 있기에 난 가벼운 맘으로 데이빗과 그 형제들을 두둔할 수 있는지도..

그런데 왜 엘리엇일까? 왜 데이빗이 아니라 앨리엇이냐구?
엘리엇이 데이빗 보다 윤리적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참 모르겠다.


소위 자의식이란 것을 가지게 된 이후, 나의 가장 큰 바람은 빨리 어른이 되는 거였다.
관계를 통해 정의되고 불려지고 제약을 당하고 하는 것들이 어린 마음에도 상처가 되었다.
완벽하게 자립적인 존재이고 싶었고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의 온전한 나이고 싶었다.

때로 가족이란 서로를 독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영원한 내 편이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내 유년시절의 기억들과 그 안의 상처들은 모두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발생하고 키워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품을 수가 없는데 버릴 수도 없다는 무력함은 평생을 지고 갈 짐이자 두고두고 남을 회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