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말
박정애 지음 / 한겨레출판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마음 깊은 곳에 낡은 책장이 하나 있어 한 살, 두 살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색이 바래져 가고 켜켜이 손때며 세월의 흔적이 쌓여가고 간혹 새로운 이름들이 슬금슬금 비비대며 나타나 간지럼을 태우며 짜투리 공간이라도 내달라 응석을 부리고.. 팽창 또 팽창, 그러다 어느 쨍한 날..

만에 하나라도 먼 훗날 내가 소위 글이라는 걸 쓰게 된다면 김형경처럼 아릿하고 정직한 글을, 박완서처럼 뭉실뭉실 연륜이 넘쳐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말들이 축적되고 축적되었다가 '그래 삶이란 별 거 아니구나' 하는 걸 온생으로 통감하고 관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때라면 글을 써도 좋겠단 막연한 바램이 있었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찮게 박정애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은 인연이다. 그녀의 두번째 소설이라는 <물의 말> 삼분의 일쯤 읽었을 때였던가? 무심히 보아 넘겼던 저자의 약력을 다시 들쳐보았다. 그리고 나의 눈을 붙들어 맨 것은 '70년'이라는 그녀의 출생년도였다. 적어도 마흔 쯤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 시샘하는 맘도 생겨났다.

70년생/74년생.. 우습지. 되지도 않게 샘이 났다. 전혀 새로울 것이란 없다. 그럼에도 참 잘 쓰여졌다. 묘사나 이미지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군데군데 구성의 산만함이 눈에 띄고, 인물들이, 이야기가 넘쳐나는 느낌이 들기도하지만 그럼에도 잘 쓰여졌다. 기본에 충실한 글쓰기 - 탄탄한 구성에 맛깔나게 버무러진 언어들.

내 생에 단 한 번도, 부당한 폭력 앞에 신경이 갈기갈기 찢길 만큼 분노했던 순간에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남성이 되기를 꿈꾸었던 적은 없었다. 윤회를 믿는 건 아니지만,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어 원친 않지만 다시 인간이란 종으로 태어나야 한다면 그 때에도 여성이고 싶었다.

<물의 말>을 읽고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단지 같은 성이라서 더 많은 연민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개의할 바 아니다.

그녀가 보내준 '님이 이모'에게서, 그녀가 엮어준 인연의 실타래 속에서 나이 든다는 것도, 산다는 것도, 운명이니 하는 것 따위도 나쁘고 힘겹기만 한 것은 아니잖아 하는 삶 앞에서 도도해질 수 있는 얼마간의 용기를 훔쳐냈다. 깊은 숨을 쉬고 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