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석의 여자 - 뮤리얼 스파크 중단편선
뮤리얼 스파크 지음, 이연지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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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욕을 참지 않아!"

 

 

리제라는 인물은 만나는 순간부터 날 당황케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

너무 많은 색채를 지닌 화려한 옷차림으로 휴가를 떠난 리제.

그녀의 독특함은 그녀의 발길마다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를 뿌려 놓는 것처럼 그녀는 스치는 모든 사람들을 목격자로 만든다.

 

 

내일 아침 그녀는 다수의 자상을 입고 손목은 실크 스카프로, 발목은 남성용 넥타이로 묶인 채, 현재 14번 탑승구에서 탑승 중인 비행기를 타고 도착할 낯선 도시의 공원 안 텅 빈 저택의 장원에서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이 문장에서 모든 것을 짐작한(?) 나.

그러나 상황은 내 예상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리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결국 마지막에서야 깨닫는다.

 

스파크의 세계는 우리의 상식을 저버린 세계라는걸.

 

처음 본 여자에게 친절을 베풀고, 함부로 무릎에 손은 얹고 친한 척하고

아주 젠틀한 척해대는 남자들이 모두 잠재적 범죄자임을 리제는 고발한다.

 

당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설계하는 리제.

어쩜 이미 죽은 뒤의 영혼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 주도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친절한 문장들 틈에서 리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수없이 되풀이되어 공식처럼 느껴지는 스릴러의 현실을 이미 다 알아 버린 여성 여행객의 자신만만한 자기 죽음 알리기

내게 <운전석의 여자>는 그렇게 해석되었다.






<아버지와 딸들>, <관람 개방>

 

아버지의 명성은 사라지고 점점 쪼들려가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었던 도라.

어린 남자와 결혼한 이유는 그 역시 아버지의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죽고 그들은 예전보다 나아진 경제력을 가졌지만 진정한 결혼생활은 끝났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혼해 주지 않는 남편과 아버지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미고 싶은 도라는 몇 년이 지나도 자신들의 계획을 실천하지 못한다.

작가 캐슬메인의 딸과 사위는 그 이름의 그늘 아래서 서서히 변화해 간다.

자신들의 인생을 위해 그들이 택한 방법은 무얼까?

 

<하퍼와 윌턴>

 

당신은 이야기를 내팽개쳤어요. 당신을 찾으러 다닌 지 좀 됐어요. 우리에게 실체를 부여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령으로서 당신을 괴롭히겠어요.

 

 

언젠가 썼던 단편 소설의 주인공들이 갑자기 찾아온다면?

그들에게 옳은 결말을 써주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솜방망이 처분을 받은 사시 청년은 여전히 누구를 바라보는지 모르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핑커튼 양의 대재앙>

 

"여자들이란, 아시잖아요! 언제나 알고 보면 다 여자들 탓이죠. 우리는 술을 몇 잔 했어요."

 

 

모든 게 여자들이 말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조지와 핑커튼 양이 같이 비행접시를 봤어도 핑커튼 양의 말은 좀체 믿어주지 않는 분위기다.

그래서 그녀는 술을 마셨다고 말한다. 그들의 믿음에 굳건함을 주듯이 말한다.

"여자들이란!"

 

<이교의 유대 여인>

 

 

나는 할머니가 너무나 영리했으므로 아름다울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걸 알았다.

 

 

현명한데다 이쁘기까지 하면 반칙이지..

못생겼지만 잘생긴 어린 남자와 결혼에 성공한 할머니의 뚝심.

갑자기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네...

울 외할머니도 못생기셨지만 아주 잘 생기고 연하인 외할아버지와 결혼하셔서 평생을 큰소리 빵빵 치고 사셨다지~

 

11편의 단편들을 읽는 내내 고민스러웠다.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이제까지 읽었던 이야기들과는 결이 달라서 장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장르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지만 그 어디에도 출구가 없었다.

 

무언가를 보았지만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써야 하는 여자.

하지만 이 이야기 속 여자들에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그건 그녀들의 중심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 때문이다.

뮤리얼 스파크의 세계에서 여자들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스파크의 리듬에 맞춰야 한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가혹함을 벗어나려고 맹렬하게 애쓴 작가의 모습이 여기저기에 투영되어 있으니까.

그 시대 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그 시대 그 여인들.

그들의 그 '광기'가 있었음에 지금 우리가 우리로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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