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ㅣ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평점 :
작가정신의 새로운 시리즈 '소설, 잇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작품을 한 권에 담아 읽는 시리즈다.
소설, 잇다의 첫 번째는 백신애와 최진영.
백신애의 소설 세 편과 최진영의 소설 한 편과 에세이 한 편이 담긴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네 이놈 하느님아. 에이 빌어먹을 개새끼 같은 하느님아., 네가 분명 하느님이라면 왜 그 악하고 악한 도둑놈의 연놈을 그대로 둔단 말인고. 당장 벼락 천둥을 내려 연놈을 한꺼번에 박살을 시킬 일이지....
1930년대 백신애의 작품을 읽으며 그 시대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백신애의 존재감이 점점이 퍼진다.
<광인 수기>는 폭우가 쏟아지는 다리 밑에서 하늘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미친 여자의 하소연은 비를 뚫고 하늘에 닿을 것만 같다.
열일곱 살에 시집가서 남편이 동경에 유학 가 있는 동안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온갖 구박을 참아낸 여자.
아내 사랑이 지극했던 남편은 일본에서 돌아와 어떤 사상에 빠져서 한참 무슨 주의 활동을 하면서 아내의 속을 태우더니
그 주의를 접고 이제 좀 편히 사나 했으나 여자와 바람이 나버린다. 그것도 광인의 먼 친척뻘 되는 이와.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여자를 병원에 보내고 미친년으로 낙인을 찍어 버려 병원에서 탈출한 여자.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여자.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 있을 거 같은 여자...
백 년을 사이에 두고 선생과 나는 같은 생각을 품고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여성을 비롯하여 소수자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공포.
최진영의 소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백신애의 <아름다운 노을>을 21세기로 가지고 왔다.
백 년 전 정규와 순희는 열여섯 남자와 아들뻘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였다.
백 년 후 정규와 순희는 공부와 알바를 병행하는 20대 여자와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40대 여자로 되살아 났다.
여전히 그들은 이해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주인공들이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아주 흔해빠져서 다 아는 이야기 같은데도 막상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폭력은 노출되기 전까지는 욕도 하고, 성토도 하고, 화를 낼 수도 있고, 신고도 할 수 있지만
폭력이 직접 나에게 가해지면 그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할 수 없게 된다.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러고 산다.
백신애는 시집살이와 남편의 외도, 이혼, 나이차가 많은 나는 사랑을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편하게 읽을 수 없다.
그때는 그랬지..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나를 더 답답하게 했다.
백신애가 살았던 세상의 일을 최진영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답습하는 기분이다.
백 년이라는 시간은 무언가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만 같다.
백신애의 글은 반항기가 첨가된 톡 쏘는 맛이 있다. 그래서 맵다.
이 매운맛을 최진영 작가가 더 시원하게 날려주기를 바랐다.
현대판 '무언가'가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최진영 작가의 스타일을 생각 못 했던 나였다.
백신애의 세상보다는 좀 더 쐐기를 박아 줄 수 있는 최진영의 세상이 되길 바랐다.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백신애의 세상에서 사이다 한 병을 드링킹 하고픈 최진영의 세상이었지만 그것은 그저 '소원'일뿐이었다.
앞으로 나오게 될 '소설, 잇다'의 작가들 라인업이 궁금해졌다.
한 번쯤 선배님들의 작품 속 주인공이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
<아름다운 노을>의 정규와 순희가 21세기에서 환영받는 사이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마크롱 부부의 모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