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평점 :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살다 보면 정말 이 문장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영혼의 떨림, 본능, 예감, 무의식의 경고.
그러나 대부분 그것을 현실로 묵살하고 살아간다.
그레고리우스는 그 순간을 낚아챘다.
모든 걸 뒤로하고 그는 리스본행 열차를 탔으니까...
파스칼 메르시어의 글은 처음인데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순간과 찰나의 감정을 묘사할 수 있을까? 신기해하며 읽었다.
언젠가 떠올랐던 생각, 어느 날 느꼈던 느낌, 그때 가졌던 감정, 그 순간에 스쳤던 단상들이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다.
내가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활자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레고리우스가 그 옛날 돈을 훔쳐서 엄마에게 바다를 보여줬더라면 그의 인생은 어땠을까?
그레고리우스가 궁금해했듯 나도 궁금했다.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가끔 생각해 본다. 그 상상에서의 나는 현실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웃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이 이따금씩 찾아온다. 그래서 요즘은 멀티 유니버스 세상에서 또 다른 나는 그 선택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레고리우스가 반평생을 뒤로하고 무작정 떠났던 그 용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았던 거 같다.
언어의 연금술사.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포르투갈의 작가가 쓴 책 한 권이 나온다.
책 속의 책.
나는 이 책에 빠졌다. 사람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글 때문에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제목이 타당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를 찾아 나선 이유가 그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현실을 살면서 늘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지만 말로도 글로도 표현하지 못한 느낌들이 글이 되어 내 앞에 펼쳐졌을 때의 기분. 내가 느낀 기분을 그레고리우스도 느꼈으리라...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리 두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정체불명의 '당연함'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화실 하게 알려주는 '명료함'으로 바뀌어야 했다.
언어의 연금술사가 바로 그 '명료함'이었다.
낯선 도시
낯선 말
낯선 사람들
그 낯섬에서 느끼는 오롯한 자신...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거리에서 가끔 낯선 여자를 마주칠 때가 있다.
나 자신이 낯설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당황할 때가 있다.
'당연한' 삶을 살다 보면 나 자신의 변화를 알아채기 어렵다. 내가 아는 나는 오래전에 멈췄고, 낯선 나만 계속 끌려오는 중이다.
그레고리우스와 푸라두 두 사람의 인생을 읽으며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계속 이렇게 나 자신을 외면하고 살 것인지, 정신을 차리고 나를 위해 살 것인지.
그레고리우스가 푸라두를 찾아가는 여정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걸 읽는 나 자신도 나를 찾아가고 있었으니까...
"아무 때나 전화하세요. 낮이든 밤이든. 그리고 보조 안경 가져가는 것 잊지 마시고요."
그레고리우스의 홀연한 떠남과 그 떠남을 지지해 주는 독시아데스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용기를 주는 일이니까.
그러고 보면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엔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 그것 역시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좋은 이유다.
그의 본질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내 마음도 다독여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정받는 것보다 이해받기를 더 갈구하나 보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를 이해했고, 그를 찾아 나서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에게 받는 이해처럼 나를 달뜨게 하는 게 있을까...
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는 책은 그 이유가 있다.
책을 통해 얻는 게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부딪히며 깨닫게 되는 감정들은 어떻게든 상처를 남긴다.
책을 통한 간접 경험들은 상대의 마음도 내 마음도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남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내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떠올려보게 해주었다.
언젠가 나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일상을 등지고 무작정 떠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리도 또 다른 나는 그런 나를 걱정 반 부러움 반으로 지켜볼 것이다.
떠나는 게 날지, 지켜보는 게 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해진 건.
나는 보여주는 삶보다는 보여지지 않아도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반평생을 고치 안에서 살다가 화려한 나비가 되어 날아 오른 그레고리우스가 찾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