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지음, 허진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여기에서 죽은 언니에 대해 온갖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화내는 것이 더 쉽다. 화내기를 멈추면 내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한 뭉텅이의 뜨뜻한 살 무더기가 될까 봐 무섭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듯 토사물 같은 말을 사방으로 내뱉는 훌리아는 언니 올가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과 함께 강항 압박을 느낀다.

어느 날 언니방에서 야한 속옷과 호텔 룸 키를 발견한 훌리아는 언니에게 비밀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다정하고, 얌전하고, 엄마와 아빠에게 좋은 딸이었던 올가의 이중생활은 혼자 남겨진 훌리아에겐 배신과도 같았다.

한창 사춘기를 겪는 중인 훌리아에게 올가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가 꺼진 것과도 같다.

 

"자기를 너무 미워하면 안 돼.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여도 누구나 엉망진창이야."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미국 땅을 밟은 부모님.

그들은 국경을 건너자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채로 버려졌다.

거의 죽기 직전에 구출되어 미국에 정착했지만 그들은 불법 체류자 신세였다.

항상 그들에게 든든한 딸이었던 올가와는 다르게 훌리아는 사사건건 반항하고, 자기 생각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딸이었다.

 

부모님과 훌리아 사이의 안전지대였던 올가가 사고로 죽으면서 이 가족은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친구 같은 딸을 잃은 엄마는 하나뿐인 훌리아마저 잃을까 걱정하지만 그 관심이 훌리아에겐 견딜 수 없는 족쇄와 같다.

훌리아는 엄마처럼도 언니처럼도 살고 싶지 않다. 빨리 독립해서 자기만의 삶을 살고 싶은 소녀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비밀로 가득 차 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이민자 가정으로만 생각했었던 훌리아의 가족은 각자 비밀을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올가가 아니고, 올가처럼 되지도 않을 거예요. 난 엄마를 사랑하지만 다르게 살고 싶어요. 집을 지키기는 싫어요. 결혼이 하고 싶은지, 아이를 갖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학교에 가고 싶고 세상을 보고 싶어요. 난 너무 많은 것을 원해서 가끔은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폭발할 것 같아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아이에게 멕시코식 생활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옳은 걸까?

이것은 모든 이민 가정이 겪는 문제이다.

부모는 자신들이 어떤 고통을 감수하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자식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미국에 살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고향에 있고, 그러면서도 고향으로 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티고 서 있다.

불법체류자일망정 그들의 고향보다는 미국이 자신들과 자식들에게 더 안전하고 더 많은 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것은 말로 들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에서 올가가 과연 부모님의 비밀이자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아이처럼 보이게 살았을까? 자신을 위한 또 다른 비밀을 만들면서?

모든 것을 알아버린 훌리아는 언제까지 비밀을 지키면서 살게 될까?

어쩜 적절한 순간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와 훌리아가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고 이해할 시간이 반드시 있을 거라 믿는다.

아마는 훌리아를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고, 훌리아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음으로..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가족관계.

이 간극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쩌면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방법을 안다면.

소통과 이해 그리고 배려와 존중이 함께 한다면 두 가지 문화가 접목된 시너지를 누릴 수도 있다.

 

아마에게 훌리아는 완고한 아이다.

하지만 외할머니에게 아마도 완고한 아이였다.

같은 성질은 부딪히게 마련이다.

아마가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떠났듯이 훌리아도 아마의 걱정을 무릅쓰고 뉴욕으로 떠난다.

두 사람의 여정은 다른 듯 같다.

 

세대 차이, 이민자 가정, 인종차별, 성소수자, 불륜, 강간, 낙태, 불법체류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생활과 대화 속에서 오고 간다.

그래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지도 모르는 문제들이 쓱~ 담겨있다.

철없는 사춘기 소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훌리아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누군가가 지정해 준 삶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는 삶.

그래서 훌리아를 응원하고 싶다.

더불어 아파(아빠)가 다시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고, 아마(엄마)가 좀 더 자신의 삶을 누렸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가열차게 응원해 주고 싶다.

다들 열심히 그리고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사춘기 소녀의 성장소설에서 미스터리한 장르소설로 전환되었다가 훈훈한 가족소설로 마무리된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이민자 가족이 겪는 가치관의 충돌과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춘기 소녀의 갈망과 어두운 과거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자의 걱정이 비밀처럼 스며있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