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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평점 :
가난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함께 가난을 나누면 된다는데
산다는 것은 남몰래 울어보는 것인지
밤이 오는 서울의 산동네마다
피다 만 오랑캐꽃들이 울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이름을 들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싯구가 있다.
[울지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대표적인 시 '수선화'가 정호승 시인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읽고 난 지금은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
1973년 [첨성대]로 신춘문예에 당선돼 데뷔한 정호승 시인은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
이 책에는 50년간 작품 활동을 해온 정호승 시인의 대표작 275편의 시가 담겨 있다.
총 7부로 나누어진 시집엔 시대적 상황과 함께 개인의 삶이 담겨있는 시대와 인생을 관통하는 시들이 모여있다.
1부의 시들은 아득한 느낌 속에서 삶의 불공평함이 엿보인다.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이 시어를 통해 그려진다.
산업화 시대에 앞만 보고 달리던 그들의 모습이 애처로운 시선으로 담겼다.
남들은 다들 배우러 간다는데
원수놈의 돈을 벌어보겠다고
이른 새벽 종짓불 밝혀서 쑥국밥을 먹고
네가 고향을 떠나던 날
웬놈의 진눈깨비는 그렇게 뿌렸는지
마지막 편지
고향을 떠나 미싱사 보조로 일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딸이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않을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이 마음을 얼얼하게 만든다.
낳은 아이를 키우지 못하고 해외로 입양 보내야 하는 누이와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별을 나눠주기 위해 구두를 닦듯이 별을 닦는 구두닦이.
전쟁통에 태어난 혼혈아들과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어 버린 맹인 부부. 이들은 모두 과거에 있을 거 같지만 어느 시대에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시인은 말한다.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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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2부의 시들에선 최루가스가 날리고 여기저기 죽음이 흩날린다.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라' 다짐하는 겨울강에서 '내 인생도 곧 끝나는 거 같다'고 편지를 쓴다.
'새벽 술국을 먹으며 사북을 떠난다' 폐광의 설움을 뒤로하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광부의 심정으로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하늘과 가까워져 / 이제는 새벽이슬이 내리는 사람' 전태일을 기린다.
'서러운 네 무덤가에도 봄은 오느냐'고 외치는 아들 잃은 어머니의 울부짖음 앞에서 시인은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한다.
1, 2부가 시대를 관통한 삶을 그렸다면 3부부터는 우리가 익히 안다고 생각하는 정호승 표 시들이 담겨있다.
그동안 정호승 시인의 삶과 사랑에 관한 주제들의 시들만 읽다가 이렇듯 시대를 이야기하는 시들을 대하니 절로 마음이 다잡아진다.
과격하지도 울분으로 가득한 시가 아님에도 그래서 더 절절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느끼게 해주는 시어들이 슬프게 아름답다.
시를 자주 읽는 편이 아니지만
가끔 일부러라도 찾아 읽는 시 앞에서 나는 복잡한 그 무언가가 스스로 정리되는 기분을 느낀다.
함축된 시어들 사이에서 복잡한 말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그 순간이 좋아서 시를 읽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누군가의 50년 세월을 함께 살아낸 기분이다.
인간사와 사랑과 종교와 생활이 모두 함께 담겨 있는 이 함축적인 인생은 시어가 그려내는 풍경 앞에서 그 세월을 음미하게 만든다.
고요하면서도 서정적인 말들은 잊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되살려 낸다.
날선 글과 직설적인 언어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서 잔잔하게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추는 물그림자 같은 시어들이 나를 다독여 준다.
좋은 글은
사람들에게 더 나아진 기분을 같게 한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음미하면서 내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아진 어른이 된 거 같다.
8월이 그렇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