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하여 : 1979~2020 살아있는 한국사
김영춘 지음 / 이소노미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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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은 '민주'도 '정의'도 없는 정당이었다.

우리의 현대사를 알고 싶다는 바람은 있었지만 그것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왔지만 단편적인 기억들 사이로 숨겨진 이야기들의 진위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저자 김영춘은 학생 운동이 정점을 찍을 당시 대학생으로 현장에 있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지런히 담긴 책 한 권은

책배면을 금박으로 칠했다.

마치 금빛처럼 찬란하게 빛나기를 염원하는 것처럼.

암흑 속에서 지금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찬란하게 빛나서 모두에게 널리 사심 없이 알려져야 한다는 뜻처럼 보인다.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이 예상하지 못한 거리 항쟁이었다. 그러나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전두환 신군부가 철저하게 기획하고 결심한 학살이었다. 부산 시민을 쓰러트린 개머리판이 이제는 광주 시민을 찌르고 쏴죽이는 총검으로 바뀌었다.

문학소년이 꿈이었는데 시대를 잘 못(?) 만나 책 대신 운동권(?)이 되어야 했던 그 시대의 청년.

그의 시선으로 본 8~90년대는 매일이 최루탄과의 전쟁이었다.

나는 언니 오빠들이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데모만 한다고 생각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암흑이 씻겨 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들의 젊음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최루가스에 승화되었다는 걸 안다.

딱딱한 역사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멋스러운 이야기로 듣는 우리의 현대사는 이제까지 읽은 책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다.





진실을 왜곡해서 거짓이 판치게 만들고, 정직하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정치에서 쉬 밀려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나 혼자서 다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은 증거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남는 걸 두려워했던 저자의 모습은 그의 글 보다 이소노미아의 참맛인 편집 뒷담화에서 더 잘 알게 되었다.

왜 출판사가 정치 이야기를 기획하면서 이분을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알고 나서 이 책이 또다시 다르게 보였다.

계파정치를 안 하는 사람이다 보니 편가르기를 하지 않고, 소위 '정치공학적으로'인위적인 프레임을 만드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조직 내에서 퇴출되기 십상인데 그럼에도 지금껏 여전히 정치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저력은 마담쿠가 이야기한 것처럼 저자가 지닌 영리함과 젠틀함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두 편집자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글을 읽다 보면 문학 작품 속에서 현대사를 읽는 기분이 든다.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물결에 부딪혀서 자그락자그락 소리로 이야기해 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덜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덜 고통스러운 마음은 희망을 느끼기에 최적화된다.


암울하고, 기약 없이 우리에겐 언제 좋은 정치인이 생길까?라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미 그런 정치인을 한 명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어려서, 정치를 알지 못해서, 역사의 흐름 속에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현대사를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현역으로 역사를 관통해 온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 고통의 시간을 괴롭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했다.

항상 이분법에 휘둘리다 이렇게 양쪽의 경계를 디디고 선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니 뭔가 균형이 생기는 기분이 든다.


영리함과 젠틀함을 탑재한 정치인의 글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

지나 온 시간이 고통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덜 고통스럽게 직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쪽의 시선을 강요당하지 않고

고른 시선으로 현대사를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나와서 기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치 있는 글담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는 정치를 체험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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