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은 억압받고 잊혔던 것들의 귀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제야 포스트모던의 시작이 일어나고 있는 거 같다.
이제야 다양성에 대해 이해하려 하고, 다원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조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과 유신독재와 쿠데타를 한꺼번에 겪으며 성장한 탓에 획일화된 교육만 받았던 세대들의 자녀들은 과도기의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다양한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습득할 수 있는 세대로 넘어왔다.
그들의 다양성의 시각을 획일화된 시각만 가진 노년층은 이해하기 어렵고, 그분들을 젊은 사람들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닫혀 있던 세계에서 열려있는 세계로 향한 과도기적 시대를 살아온 나같이 낀 세대는 고달프다.
양쪽을 이해하지만 그들에게 이해받고 싶기도 하니까 말이다.
철학은 언제나 알 거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분야였다.
이 책을 읽고 요약을 하였지만 역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좀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과학에서 서로 다른 두 이론이 존재할 때, 논리적으로 더 간결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진실에 가깝다는 오컴의 면도날이 인상적이었다.
원래부터 과학은 별 관심도 없고, 잘 하지도 못한 분야였지만 이렇게 한 번 정리해 주고 가니 그닥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
예술은 진화를 거듭해서 현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거의 모든 제약 없이 넓은 의미로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예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현재 이 세상에서 3대 종교를 거의 기독교의 바탕이 차지하고 있어서 놀랐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이렇게 세 가지 종교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슬람에 대한 상식이 전무했는데 이 책을 통해 가닥을 잡았다.
신비에선 죽음 이후에 대한 세계를 이야기한다.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를 읽으며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결이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후 세계는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곳이다.
죽음 역시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미래를 그리는 SF 소설을 읽다 보면 미래의 죽음은 인간의 기계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에 흡수된 인간의 뇌는 그렇게 영원히 기계 안에서 살아가며 스스로 영생을 느낀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죽음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터미네이터라는 영화는 결코 영화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니체의 영원회귀는 윤회보다 끔찍하다.
만약 그렇다면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수박 겉만 핥았지만 뭔가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가닥을 잡아간다는 데서 이 책에 의미를 부여해본다.
다음 편 0(제로)에서 다루어질 이야기들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식이라고 하니 기다려진다.
이 시리즈를 다 읽고 나면 나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지.
눈에 띄는 변화는 없겠지만 생각하는 면에서 달라진 어떤 부분이 내 나머지 삶에도 영향을 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