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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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벌레가 될 수 있는 영광조차도 나에게는 없었다. 당신께 맹세컨대,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이것은 병이다. 진짜 완전한 병이다.

 

나를 정신없게 만든 이 지하 인간은 도스또예프스끼가 고통스러울 때 만들어진 캐릭터다.

나는 이 지하 생활자의 모습에서 현대인을 본다.

낮은 자존감으로 자격지심에 쩔어서 매사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곁을 주지 못하는 사람.

분노와 증오를 가슴에 품고 자신보다 약한 자들에게는 포악하게 굴면서 정작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노조차 표출하지 못하고 비굴해지는 모습.

 

그는 스스로 자신을 지하에 가두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벌하고, 그 안에서 세상을 벌했다.

그가 이 21세기에서 살게 된다면 그는 온라인 세상에서 댓글 자객이 되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악플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모욕감을 느끼곤 했는가.

 

 

가난함에 대해

볼품없는 외모에 대해

자신감 부족이 만들어 낸 참상이 바로 지하 생활자였다.

 

그는 자신 보다 잘난 친구들 틈에 끼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어려운 책들을 읽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들의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상대방에게 그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은 바로 모멸감 뿐이었으니까.

그것은 스스로 부여한 것이지 그들이 그에게 실제로 모멸감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연히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모든 동료들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경멸했다.

 

 

친절하지 않은 공무원이었지만 뇌물은 받지 않았다.

동료들을 싫어하고 경멸했지만 그럴만한 진짜 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틀을 짜 놓고 그 안에서 세상과 인간을 재단했던 한 인간의 비뚤어진 삶을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닐까?

 

세상 속에서 부딪히며, 사람들 사이에서 유영하며 삶을 살아내기보다는

단절과 고립으로 자신을 벌주기를 택했던 사람의 끝없는 독백이 나를 지치게 했다.

도스또예프스끼 식의 심리 스릴러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어쩌면 묻지 마 살인범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21세기에 살았다면.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 살았고

계급이 있는 시대에 살았으며

그를 피해 가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고립 시키고 책을 읽는다.

 

책이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었고

자격지심에 자양분이 되었으며

사람 대신 소통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주었다.

 

책 속에 쓰인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지하인.

스스로가 잘 못 되었음을 알고 있는 그는 세상에 자신을 내놓기 보다 땅속으로 은둔하기를 선택했다.

그렇지만 자기를 알아달라고 글을 쓴다.

 

언제나 모순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이 답답하다.

남에게 무시당하는 건 못 참아 하면서도 만만해 보이는 사람은 한없이 무시해 버리는 그 태도.

갑자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이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뛰쳐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믿지 못하고

서로를 경멸하며

항상 등질 이유만을 들이대고

나중에 후회하면서도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반목하는 이들.

 

도스또예프스끼는 21세기 미래형 인간을 만들어 냈다.

지하 생활자는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읽기가 힘들었나 보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똑바로 이야기하는 글에는 알레르기가 있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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