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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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일본이 어떻게 나라를 재건하는가. 다양한 현장에서 지켜보고 싶다. 그 안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다. 탄광은 그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만주국 건국대학을 졸업한 모토로이 하야타는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오른다.

아무 역에서 내려 걷던 그에게 한 남자가 접근한다.

자신의 광산에서 일하면 좋은 대우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로 그를 호객한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을 따라가던 하야타는 점점 불안한 심정이 싹트고 자신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벗어나기에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하야타에게 누군가 말을 건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이자토 미노루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 덕에 무사히 호객꾼에서 벗어난 하야타는 그 역시 광부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를 따라 그의 탄광에 취직하게 된다.

자신이 알던 조선인 정남선이 생각나서 하야타를 도왔다는 아이자토는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다.

얼굴에 상처가 있는 그는 예전에 조선반도에서 광부를 모집하던 탄광회사의 직원이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감언이설에 속아 탄광으로 왔거나 길거리에서 무작정 끌려왔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면서 조선인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환경의 탄광에서 더 모진 대접을 받으며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아이자토에게 정남선은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주지 못했던 약속이었다.


하야토 역시 건국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조국이 저지르는 낯 뜨거운 거짓을 확인하며 혼자만의 속죄를 감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삶으로 발걸음을 한 터였다.


옛날부터 탄광 일은 밑바닥 노동이라 멸시받으면서도 시대마다 국가의산업과 경제를 훌륭히 지탱해왔다. 그런 일을 하면 전쟁중에 잃어버린 일본인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중반까지도 아이자토와 하야타를 통해 전쟁 이후의 일부 지식인들의 고뇌를 다룬 이야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로 앞부분에 깔린 수많은 복선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미쓰다 신조가 미스터리와 추리물을 다루는 작가라는 걸 내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백여우님' 혹은 '백신님'으로 모시는 여우신은 풍요의 신이다. 농촌과 산촌에서는 결실과 수확을 의미하는데 탄광에서는 당연히 채굴량 증가로 연결된다. '흑여우님' 혹은 '흑신님' 으로 두려워하는 여우신은 흉작의 신이다. 여기서는 갱내에서의 모든 사고를 의미했다.




백여우신과 흑여우신 두 신을 섬기는 넨네 탄광.

매일 3교대로 일하는 탄광의 고달픔은 전쟁 전과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고된 일의 연속이다.

그곳에서 하야타는 난게쓰라는 사람과 친해진다. 그는 자신의 사수가 사고로 죽자 그의 아내와 딸과 가족을 이루며 사는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야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함과 동시에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나 매일 무사고를 기원하며 갱내로 들어가는 시간들에 익숙해질 무렵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모두 빠져나왔지만 아이자토가 갱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연달아 신사에 걸려있던 금줄로 자살처럼 보이게 꾸며놓은 살인이 벌어진다.


처음엔 자살로 마무리 되었만 연달아 계속 같은 사건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검은 여우신의 저주라 믿는다.

밀실에서 금줄로 목을 맨 시체.


사람들은 모두 검은 여우신의 소행이라 수군대고 실제로 검은 여우신을 목격한 아이들도 있었다.

탄광회사는 얼버무리듯 사건을 처리하려 하고, 하야타는 죽은 이들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추리를 시작한다.

하지만 추리를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생기고 아이자토의 배다른 형제가 그곳을 찾아온다.


사건을 자살로 마무리하려는 탄광회사 측 경찰과 탐정이라는 비아냥을 받으며 나름 사건을 추리하는 하야타.

그리고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노무과장 스이모리는 입을 다문다.

연쇄 자살 사건이 발생하자 스이모리는 아이자토의 구조를 결정한다.

회사의 허가도 없이 단독으로 팀을 꾸려 갱내로 들어가 아이자토의 시체를 수습해 온다.

모두 아이자토가 갱내 사고로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아이자토의 목에도 금줄이 걸려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죽은 이들은 모두 무슨 일에 연루되어 있는 걸까?


미쓰다 신조는 탄광이라는 곳에서 자행되던 일들로 일본의 민낯을 일부 보여준다.

거기에 검은 여우신을 등장시켜서 공포감을 고조시킨다.

그래서 다 읽을 때까지 이 이야기가 추리소설인지 호러인지 알 수 없다.


모토로이 하야타는 미쓰다 신조가 새로운 시리즈를 위해 만든 캐릭터이다.

패전 이후의 일본을 배경으로 활약할 하야타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일본인의 시선으로 본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일본의 전쟁이며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다. 조선반도가 식민지화되어서 우리도 일본인이 되었다면,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도 주었으면 한다.

다만 지금 시기에 일본 국민이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정남선의 수기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생각은 또 다른 일본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만주국의 건국대와 탄광에 끌려온 정남선을 통해 과연 자신들이 한 짓이 정당한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정부에서 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보통 일본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야타와 아이자토라는 지식인을 통해 바라본 일본의 전쟁은 그들조차도 자신들의 조국이 벌이는 참상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뿐이다.

아파서 하루 쉬고 싶다고 말했다고 죽도록 얻어맞은 장씨에게 몰래 주먹밥을 만들어 준 식당 아줌마처럼

이유 없이 모진 학대를 받는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여준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렇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만.


어쩜 미쓰다 신조는 하야타를 통해 패전 후의 일본의 재건과 더불어 일본의 속죄를 위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기획을 한 것이 아닐까?

검은 얼굴의 여우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탄광에 끌려와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일했던 조선인들의 모습과 복수를 시작으로 일본이 현재 부정하고 있는 것들을 소재로 하야타의 탐정놀이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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