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는 자유자재로 인간의 몸을 취해 나타난다.
아냥우는 스스로 어떤 생명체로도 변신을 할 수 있다.
같은 거 같은데 다르다.
도로가 변신을 하기 위해서는 살인이 필요하고
아냥우가 변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의 구조를 바꿀 뿐이다.
도로는 모든 폭력과 그 위에 세워지는 질서를 대표한다.
자기 잣대로 만든 질서.
그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속박하는 질서.
자신에게 복종하게끔 만드는 질서.
그래야만 그 질서 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자유로운 거 같지만 결국 억압받고 구속되는 인간사다.
아냥우는 치유와 사랑 안에서 자신의 일족을 만들어 간다.
신뢰와 사랑과 화합으로 만들어진 질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준다.
도로의 등장으로 어지럽혀지던 아냥우의 질서는 그대로 사라질까?
흑인의 이야기로만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 같다. 내겐.
도로의 생명은 죽음 위에서 탄생한다.
아냥우의 생명은 생존에 최적화되게끔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결과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도로는 그저 교배용으로만 본다.
아냥우는 사람 그 자체로 이해하고 보듬는다.
이 이야기가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라면 폭력과 죽음을 치유와 화합의 손길로 아우를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서로 간의 협약을 맺었으니까.
그것이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필요악일 테니.
흑인의 고된 역사 이야기에서 이토록 멋진 판타지가 나올 수 있다니.
그것도 1980년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