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 켈리는 누구인가?
로잘리 크넥트 지음, 한지원 옮김 / 딜라일라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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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가 말했듯이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나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두려움 너머의 곳에서 살았던 것 같다. 삶이란 게 불확실하고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그런 곳에서 말이다. 모국에서 살 때도, 나는 레즈비언 바에서 체포되면 직장을 잃을 것이고, 만약 직장을 잃으면 싸구려 여인숙 같은 곳을 전전하게 되리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 출입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생이 마른 쓰레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장르의 책을 오래 읽다 보면 책에 대한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그건 단순하게 책의 재미만이 따져지는 게 아니다.

문체라든가, 표현이라든가, 서사라든가, 생각의 흐름이라던가, 드러내지 않았지만 드러나는 것들. 이 종종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 베라 켈리는 누구인가? 라는 이야기 역시 읽어가는 내내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퀴어 스파이 소설이라는 표현은 시선을 잡아 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저 대목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뭔가 색다르다는 느낌이 온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중반의 시간이 오며 가며 이 이야기에 담겨있다.

과거와 현재.

 

과거의 베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호하지만 알게 되고, 아마도 그것을 눈치 챈 엄마는 딸에게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하고 그 분노의 마음을 손찌검으로 나타내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단 둘이 남은 베라는 학교 성적도 곤두박질치고, 가장 친했던 친구 조앤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점점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가는 베라는 어느 날 엄마와 싸우고 때리는 엄마에 맞서 엄마를 때리고 차를 훔쳐타고 집을 나온다.

 

아마도 50년대 말 그 당시에 딸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엄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 마음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베라가 인지하게 될 자신의 정체였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베라를 신고하고 체포된 베라는 소년원에서 지내게 된다.

그곳에서 개화되기를 바랐던 엄마였겠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베라 켈리는 비행 소녀가 되어 기숙 학교로 보내지고 홀로서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60년대 아르헨티나

앤은 캐나다에서 유학 온 대학생이다.

겉모습은 그렇다.

그녀는 CIA로 캐나다 국적으로 아르헨티나에 잠입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KGB로 의심되는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쿠데타가 일어날 그곳에서 주요인물들을 도청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임무를 맡는다.

위험해지면 빠져나갈 루트를 꿰고 있었고, 그곳의 조력자의 도움도 안정적이라 믿었다.

그녀는 로만이라는 학생을 감시하기 위해 그의 친구들에게 접근하고 로만의 애인 빅토리아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빅토리아 역시 그녀와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엔 모든 것이. 특히 여자는. 더욱더 몸을 사려야 하는 시기였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앤의 조력자는 그녀를 배신한다.

간발의 차로 경찰을 따돌린 앤은 미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외국인의 발이 묶인 아르헨티나에서 탈출구는 없어 보였다.

유학생 신분으로 위장한 CIA 요원.

임무는 끝났지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며 그녀의 탈출을 적극 지원하지 않는 조직.

믿었던 조력자의 배신.

KGB라 믿었던 친구들의 위험한 여정.

그녀는 자신의 정체와 정체성을 숨기며 그곳에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며 숨어 지낸다.

그녀는 과연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탈출할 수 있을까?

세상은 레즈비언들의 밀회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메릴랜드 소년원에서 복역할 정도로 자신의 세게를 이미 충분히 망가뜨린 뒤라면 말이다.

스파이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한 문체다.

마치 문학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스파이 소설을 정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로잘리 크넥트는 마치 50년대에서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 같다.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에게서 나올법한 문체로 베라와 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베라 켈리는 누구인가? 였나 보다.

베라 켈리라는 레즈비언의 독특한 이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이름으로 살면서 사회에서 격리당하고 조직에서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던 소심하고 여린 베라가

앤이 되어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꿔가며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럼에도 앤으로서 살았던 아르헨티나에서의 모험은 그녀가 진정한 베라로 돌아올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자신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딜은 그녀를 쓸모 있을 때까지만 이용하려는 조직에게 받아낼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그녀의 이용 가치가 높아지도록 그녀 스스로 몸값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녀가 스스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베라 켈리로 돌아온 그녀의 삶이 전과는 같지 않겠지만

조용히 베라로 살 거라 생각했겠지만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게 조금 서운하다.

왜냐하면 베라는 제임스 본드 같은 스파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그저 소심하고, 어딘가 독특하지만 수줍음으로 그것을 메워버리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언젠가는 증명하고픈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가 베라의 첫 번째 이야기였기를 바란다.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만이 어떠한 모험 앞에서도 초연해질 수 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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