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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idow for One Year (Hardcover)
Irving, John / Modern Library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영어소설을 읽은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 동안 이런 영어 쓰는 이야기꾼을 만나보진 못했다. 끝없는 이야기의 실타래 실타래 실타래..
미국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읽기 시작해서 몇일전 겨우 마지막 한장을 아껴 읽을 때까지..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빽빽한 페이퍼백.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쓰려면 작가의 상상력은 어느 정도나 되어야 할까.
이 책엔 몇 명의 소설가가 나오는데 주인공인 Ruth Cole의 소설에 대한 철학은, 절대로 경험담을 쓰면 안된다, 는 거다. 소설가의 생명은 상상력이라는 거다. 과부가 되어보기도 전에 과부의 이야기를 써서, 소위 " 니가 과부 심정을 알아? " 라는 요지로 진짜 과부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했던 그녀가, 마지막 작품(소설 속에서의 마지막)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쓴다. 네덜란드의 매춘부거리에서 우연히 목격하게 된 살인사건. 목격자지만 유명한 여류작가이기도 하기에 목격자로서의 진술도 하지 못한채 미국으로 돌아와버리지만 몇 년 후 나온 소설 작품속의 그 창녀 방에 대한 묘사 때문에 훗날 남편이 될 경찰에게 자신이 목격자라는 심증을 심어주게 된다.
한편 자신의 경험만을 소설로 쓴 Eddie라는 인물. Ruth의 엄마 Marion과 열 여섯의 나이에 사랑에 빠져, 거의 40년이 흐른 후 재회할 때까지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 살아가는 우유부단한 남자 소설가.
사실 이 소설은 그게 다가 아니다.
1부와 2부.
1부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1958년의 여름, Ruth가 네 살 되던 해의 이야기이다. 사고로 십대의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은 Ted와 Marion부부, 아들의 사고 이후 태어난 Ruth, 그리고 summer job을 찾아 Ted의 조수로 오게 된 Eddie의 이야기. Ted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지만 지독한 바람둥이이고 주로 그닥 행복하지 않은 엄마들을 유혹해 작업실로 끌어들이는, 골때리는 남편이다. 아들을 잃고 아픔만으로 살아온 아름다운 Marion은 Ted를 떠날 생각을 하고 이를 눈치챈 Ted가 교활하게도 Eddie를 이용해 Ruth의 양육권을 빼앗으려고 한다. 하지만 Marion은 애초부터 딸을 양육할 생각이 없었고, 차곡차곡 계획을 세워 이들 가족을 떠나버린다. 딸을 버린 비정한 엄마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아들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딸까지 잃을까봐, 그래서 딸을 사랑하는 것조차 두려웠다는 게 마음아프기도 하다.
2부는 유명한 소설가로 성장한 Ruth와 그닥 이름을 날리지 못한 Eddie, 그리고 주변인물들과 그들의 소설작품에 대한 이야기. 아마 우리나라 번역본에서는 1부 2부가 낱권으로 나와있지 싶다.(정확한 정보는 아님)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추릴 수는 없고, 다만 내가 잊을 수 없었던 몇 장면은 기록해두고 싶다. 사실은 마치 그 상황, 그 장면, 그 감정과 배우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것같은 착각마저 든다.
정말 코믹했던 장면으로 Ted가 Mrs.Vaughn과 바람을 피우다가 차버렸을 때 그 부인(뭐라 읽어야할지 모르겠음)의 무시무시한 추적씬.. 눈에 보이는 듯한 현실감과 배꼽잡게 만드는 유머감각이 동시에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하필 그 날은 Marion이 떠나는 날이었고 Ruth가 손가락의 실밥을 풀고, 액자집에 가서 소중한 사진을 찾는 날이었고, Eddie가 그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복잡한 날이었는데, 그 사건들을 얽힘없이, 논리적으로, 또한 상징적으로,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처음으로 와, 이 작가 대단하다, 하고 느낀 대목이다.
그리고 1장의 "the leg"라는 절. 그 유머러스하던 작가는 여기서 너무도 잔인해진다. 두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Eddie에게 설명해주는 동화작가 Ted.
피도 눈물도 없이 느껴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을 "Ted"라 지칭함으로써 듣는이로 하여금 말하는 이의 크나큰 마음의 상처와 어쩌면 잔인하기까지 한 자신의 상처를 핧는 방식에 대해 진저리치게 만든다. 다리.. 아들의 다리..둘째 아들의 신발이 널부러진 걸 보고 그 신발을 신겨주기 위해 살아있는 줄로 알았던 아들에게 다가간 엄마가 본 것..
그 잔인성은 참 이중적인 면이 있는데, 어쩜 저리 남의 이야기 하듯 할까, 하면서도 그 자신은 "남 얘기"를 하듯 말함으로써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애쓰는 것인지, 오히려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엉엉 우는 것보다 더 처절한 면이 있다는 점이다.
그 잔인함은 훗날 Ruth에게 운전을 가르치면서 한번 더 발휘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길에서 시선을 떼지 말아라, 조수석을 바라보지 말아라, 눈물이 흐른다던지, 화가 난다던지 해서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계속 가지 말고 반드시 차를 옆길에 대도록 해라.. 이게 Ted가 딸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었고 이를 테스트하기 위해 그 동안 Ruth가 궁금해하던 오빠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Eddie에게 말했던 방식 그대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운전하던 딸이 흥분하고 눈물을 흘려도 오로지 앞을 바라보며 운전하게끔, 참으로 잔인한 테스트였다.
(또 훗날, Ted에 대한 Ruth의 복수도 비슷한 방법으로 실행된다. 복수라기엔 뭐하지만, 아빠가 무척이나 상처입을만한 이야기를 3인칭 시점에서 담담하게 이야기해내려간다. 물론, 아빠한테 운전 시켜놓고. 그 애비에 그 딸 ㅋㅋ--이게 웃을일만은 아닌게, 아빠가 자살해버린다. ㅜㅜ)
약 30년이 지난 후 만난 Ruth와 Eddie, Ruth가 1958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걸 도와주는 Eddie. 두 아들의 맨발과 함께 찍힌 Marion의 사진에 얽힌 Eddie의 사연과, 그 액자 유리에 베인 Ruth의 손가락 상처..여기서도 작가의 이야기솜씨가 빛을 발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아깝도록 재미있고 감동이었다.
이 책 속에는 또 다른 책들이 몇권 숨어있다. Ruth와 Eddie의 소설들, 그리고 Ted의 어린이를 위한 작품들인데, 그 중에 한 권은 정말로 출판된 것인지 책 뒤에 한페이지짜리 광고도 눈에 띈다. 사실, 진심으로 그 책 갖고 싶다. 제목이 A Sound Like Someone Trying Not to Make a Sound인데 물론 Ted Cole이 아니라 John Irvin의 작품이다. 이 책의 내용이 소설 속에서 소개되는데 어린이 동화라지만 나조차도 가슴이 두근두근, 스릴이 느껴지는 게 과연 소설 속에서 말하던, 어른이 되어도 갖고 싶은 책인거다. 미리 읽었더라면 미국에서 사왔을텐데, 아쉽다.
간만에 길게길게 리뷰를 남기게끔 만드는 책을 만났다. 쓰고 싶은 말은 굴뚝같은데, 너무 두서없고 애 보면서 쓰느라 2박3일이 걸리는 통에 그 때의 감동과 느낌은 반은 날아가버렸다. 그래도 처음 이 책을 샀을 때의 느낌, 어디서 불법 제본한 것처럼 허름한 표지와 디자인(헌책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에 실망한 것 치고는, 굉장한 만족감이다. 권해주고 싶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