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필요한 일곱 명의 심리학 친구 - 얕고 넓은 관계 속에서 진짜 내 편을 찾고 싶은 딸들을 위한 심리학
이정현 지음 / 센추리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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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딸에게 필요한 일곱 명의 심리학 친구

딸에게 필요한 친구라고는 하지만, 결국 여자에게 필요한 일곱 명의 심리학 친구가 아닐까?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말을 한다. 나의 삶은 반복되지는 않는다. 단지 세대를 통해 삶이 순환되기에, 누군가의 딸이 엄마가 되고 그 엄마가 낳은 자녀가 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딸이라는 말이 연령이라는 한정적인 순간만을 말한다면 딸이라는 표현도 맞겠지만. 책에서는 연령에만 한정하고 있긴 하다.

심리학적인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은 현 시대의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생활적으로는 독립을 원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상황이 그렇고, 다이어트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현실도 그렇고

서두에서 애착의 유형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안정애착, 회피애착, 이중애착, 혼란애착에 따라 아이들이 행동하는 습관과 이런 행동이 생기는 이유 등을 설명한다. 애착관계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형성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어떤 성장 과정을 겪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딸이 엄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다. 앞선 세대에서는 외적 동기로 인해 움직였는데 지금은 내적 동기를 찾아야 해서 더 혼란스럽다고 했다.

결국 딸에게 필요한 친구를 얻으려면(?) 앞선 세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저자가 말하는 스키마인간이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경험을 인지하고 내면화해 이해하는 기준이 되는 정신의 틀이라고 정의했다.

내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 스키마가 된 것이다. 이는 성장과정이고 이 성장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가족이다. 가족 중 부모의 역할을 더 클 것이고. 결국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삶도 이해하라는 뜻이겠지?

큰 강물이 한 순간에 흐르지 않는다. 여러 물줄기가 모여서 강을 이룬다. 이런 여러 물줄기가 경험이라고 본다. 각 물줄기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성장과정이 아닐까? 성장과정이 나만의 성장과정은 아니잖나. 부모는 나보다 더 먼 곳에서 흐르고 흘러 지금에 왔을 테니까.

일곱 명의 심리학 친구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다. SNS가 활발하기 전에는 진정한 친구가 몇 명 있냐고 물으면 한 명은 있었다고 하지만 SNS가 활발해지면서 많은 사람을 안 것 같은데 진정한 친구가 있냐고 물으면 한 명도 없다고 답했단다.

허울에 가려진 인간관계 그리고 그 허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기에 더 많은 공허함이 든 것 같다.

케빈 코스티너의 ‘Dances with Wolves’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뭐 이 영화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다는 거니까.

‘one who carries my sorrows on his back’ 인디언이 친구를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결국 이는 공감이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나의 말에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 한 명만 있으면 그래도 살만하지 않을까?

요즘은 이런 친구 만나기 어렵다. 다들 잘났잖아. 충고질에 잘난척에

힘들 때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친구가 되려면, 나도 그래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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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는 뇌 - 디지털 시대, 정보와 선택 과부하로 뒤엉킨 머릿속과 일상을 정리하는 기술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김성훈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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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정리하는 뇌

때때로 단행본으로 발행된 것이 아쉬운 책이 있는데, 이 책도 살짝쿵 그런 범위에 드는 책이다.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 200 페이지를 조금 넘는 책만 읽었다. 솔직히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이면 이 정도면 됐다 싶었기 때문이다. 300~400 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필요 없는 부분이 많은 책도 있잖나. 실제 읽으려면 이제는 두툼한 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야 저자의 이야기에 중독될 수 있으니까.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은 대부분 저자의 생각을 곱씹었던 책이었다. 오래 읽어야 오래 남는 건 나만의 케이스겠지만, 그래도 뭐 난 이렇게 느낀다.

실제 이 책을 읽을 분들은 알겠지만, 책 제목은 정리하는 뇌인데 난 왜 정리가 안될까? 방대한 이야기가 있어서겠지?

이런 방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려면 멀티테스킹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책에서도 멀티테스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요즘은 휴대폰도 멀티테스킹이 되는데 내 머리는 아직도 2G 폰같다. 멀티테스킹은 이 일이 하기 싫어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이지 않을까? 주의와 집중을 오래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기 뇌가 쉬고 싶어서 멀티테스킹을 시도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내집단과 외집단 편향을 읽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해준 부분이었다. 내집단은 나와 동일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외집단은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뭉뜽그러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보면 아주 적절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소속된 집단이 아니면 상대를 배격하는 부분은 이런 사고에서 발생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최근에야 붉어진 것이라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정확히 집어내는데는 한계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좌우당간 내집단 외집단의 인지편향은 상대방을 배격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만약 우리의 뇌가 이런 생각만으로 가득찼다면, 상대방 또는 상대집단을 존중하는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배려, 이해, 양보는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니면 다른 집단에게는 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까? (이거봐라정리 안되고 있잖나)

책을 읽으면서 꼭 이렇게 지적해야 하나 싶었다. 뇌와 고환은 포도당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걸 갖고 서로 다투는 기관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남자가 뭐? 아니 솔까 남자, 여자 둘 중 한 쪽의 성이 없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종족번식을 할 수 있나? 뭐 무성 생식하는 아메바야?

뇌의 기능에 필요한 성분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표현해야 하나 싶었다. 식물은 뇌가 없다. 그러나 생존은 한다. 그렇다면 생존에 필요한 부분이 뇌인가? 생식기관인가?

좌우당간 정리 잘 안 되는 뇌를 갖고 정리하는 뇌라는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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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 꽉 막힌 세상, 문사철에서 길을 찾다
최효찬 지음 / 와이즈베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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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인문학 책 참 많이 나온다. 사람에 대해서 묻고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분야가 인문학이라고 들었다.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생각과 고민이 있다면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더 척박한 세상으로 변해가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말처럼 책을 읽고 사색하기는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책을 읽고 요약하고 내가 궁금했던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책은 그냥 읽은 책일 뿐이다. .. 읽었었나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책 말이다.

올림픽공원에는 나 홀로 나무가 있다. 가서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경을 위해서 또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멋을 위해서 저렇게 나무 하나만 심었겠지조경을 한 입장을 그대로 시민은 받아들였다. 누구든지 올림픽공원에 가면 나 홀로 나무의 사진을 찍으니까.

여기서 저자가 인용한 데미안과 나 홀로 나무와 비슷한 면을 발견했다. 요즘 데미안이 하도 인기다보니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문장.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 한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이 문장을 곱씹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은 전체 세계의 일부분이다. 알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알 그 자체로 이미 이 세상에 있는 것이었다. 단지 알의 껍질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가령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야외로 나왔을 때, 그 사람이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하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껍질을 다른 세상과 만나는 통로로 인식했던 것 같지만 글쎄

나 홀로 나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큰 나무는 넓은 그늘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너무 크다보면 주변에 새로운 나무가 자랄 수 없다. 사람 관계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박학다식하거나 어느 분야에 권위자이라면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의지하지 홀로 성장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홀로 나무처럼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자란 나무는 튼튼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데미안과 나 홀로 나무는 곧 세상과 인간이 아닐까? 저자가 말하는 사색이 있듯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생각한다. 생각에 옳고 그르다는 없을 것이다. 단지 저자가 여러 이야기를 하듯이 여러 방향의 생각이 있고 거기서 나에게 영감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사색의 깊이는 깊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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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턱 - SNS 시대 맷집 좋은 기업 만들기
에릭 데젠홀 지음, 이진원 옮김 / 더난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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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유리턱

뭐라고 해야 할까? 리뷰를 쓸려니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우린 정보검색의 부랑자가 되었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출퇴근시에도 그리고 어느 이동 중에도 우리는 항상 스마트 폰으로 필요도 없는 정보를 검색하고 댓글을 단다.

스마트 폰과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정보의 전달력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다. 정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보를 처음 접하기에 이 정보로 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선물옵션 등 소위 말하는 투자전문가들은 전세계의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하지만 정보를 먼저 접한다고 그들이 돈을 버나? 그렇지는 않다. 그냥 접한 것이 먼저이다. 투자 시장처럼 비 이성적인 시장도 드물 것이지만.

여튼 유리턱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이 책은 넓게 보면 인터넷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는 각종 카더라 통신무분별하게 확산되는 소식들에 대항하는 기업의 이야기라고 할까?

얼마 전 모 치킨회사의 페이스북에 요상한 글이 올라왔다. 그런데 그 기업의 사과는 여느 기업과 다르지 않았다. 난 모른다. 저기 저 애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 조사할 테니까 기둘려봐라. 뭐 항상 어느 기업이던 딴식이었지만.

먹고 살려고 누구나 회사에 다닌다. 그럼 각자 회사에는 위기대응 매뉴얼이 존재한다. 각 회사에 맞게 이렇게 대응하라고 써 있다. 그런데 그렇게 대응하는 회사가 있던가? 각 담당자 또는 임원의 입김에 의해 그들의 요구대로 대응한다. 우린 이미 잘 보았지 않은가? 땅콩항공의 대응을. 그리고 회사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여튼 이 책에서는 번번히 오용되는 사과의 8가지를 말하고 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업들의 사과다. 논란을 사전에 막고, 즉각 대응하고, 자백하고,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위기는 기회라는 생각과 화재를 바꾸는 뭐 이런 과정과 함께 이해관계자를 교육하라는그리고 마지막의 사과라는 해결책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저자의 논조는 많이 직설적이다. 좀 과장해서아니 많이 과장해서 이런 것 다 필요 없고 살아남는 기업이어야 한다고 했다. 고객보다는 언론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 같다.

기업에게 윤리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기업이 좋은 기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도 결론을 낼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만 늘어 놓기도 싫기 때문이다. 적당히 윤리적이고 적당히 사익을 챙기는 기업이 좋은 기업일까?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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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히가시다 나오키 지음, 김난주 옮김 / 흐름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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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난 편견이 심한 사람이다. 심각해도 아주 심각하다. 말로는 나와 다른 사람도 같은 사람이기에 존중해줘야 한다고 입으로만 말하지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아주 가끔 친절한 마음이 들 때가 생기면 약간의 선행을 하는 정도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너도 사람이면 나도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지은이는 7살에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출판사 관계자와 인터뷰 중간 중간 다른 소리를 내는 장면이 서술되었다. 왜 그런 소리를 내냐고 물어보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다름이 무엇인지는 깊숙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우월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쓰잘데기 없는 잡담만 늘어놓는다. 내가 상대방보다 우월적 또는 더 낳은 존재라는 생각은 넌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배려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자만의 극치다.

저자는 나와 다르다. 역설적이게도 나 역시 그와 다르다. 다른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에는 무척 힘들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겠는가? 결국 남성과 여성이 다르고, 어른과 아이가 다르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른 것이다. ‘누구 vs 누구의 대결 구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 사회라고 한다면, 다름을 정말 진지하게 인정해야 한다. 다른데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말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는 순간 순간 나 역시 저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자폐증에 걸린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해? 정말 이럴 수 있어? 라는 생각에 책에 밑줄을 긋고 나의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저자가 우리가 말하는 평범한 청년이었고 한 편의 에세이였다면 이 책에 나에게 다르게 읽혔을까? 그냥 평범한 에세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심적인, 신체적인, 정신적인 병을 진단할 수 있는 의료인의 절대적인 권력이 우리 스스로에게 다름, ‘차별을 용인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용인이라는 느낌은 의료권력을 우리가 인정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플라시보 효과 역시 이 의료권력으로 인해 생기는 정신적 치유의 하나이라고 생각하기 보단, 의료권력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메르스 치료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의료인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정신에 대해서 너는 병이 있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이 무섭다는 것일 뿐이다.

책에는 저자의 여러 생각을 표현했다. 그 생각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고, 더 심도 깊은 고민이 녹아있었다. 방금 문장에서 그 생각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고라는 표현을 했다. 정신적인 병이 있다고 진단을 받은 저자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병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은 같은데 몸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에 대해서 병이 있다라고 하는 것일까?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병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런 범죄조차 용인하지 않나? 범죄의 용인이라는 말을 한 것은 범죄의 경중을 두고 한 말이다. 예를 들어 생계형 범죄와 강력 범죄 사이에서 우리는 범죄를 일정 정도 (각 개인의 기준) 용인한다. ‘그 정도의 범죄는 용서해야지하면서.

그렇다면 정신에 병이 있음을 그리고 없음을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일탈행동을 한다. 그럼 이 상태에 대해서도 용인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난 부분들을 적어봤다. 이 책은 선입견으로 접근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잘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선입견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글일지도 모르겠다.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로 작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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