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인 더 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인...하면
소외, 대화 단절, 물질 만능주의, 온기 하나 없는 메마름, 고독......
이런 말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주입식 교육의 산물일까? 아니면 나말고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감대인걸까? 
                                                                            
뭐, 그런 건 잘 모르겠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처럼 숨 가쁘게 억죄어오는 무거운 일상을 집어치우고,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아갈 베짱 따윈 눈꼽 만큼도 없는 소심하고, 불쌍하며, 평범한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자유를 잃고, 목숨까지 잃게 되어서도, 그래도 행복하다던 징그럽기 짝이 없는 어느 사나이(박완서 ‘마지막 임금님’)가 아닌 다음에야 “난 행복해 죽겠어!”라고 소리 높여 외쳐대긴 어렵겠지... 그냥...그냥 보통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많든 적든 짊어진 삶의 무게에 버거워하며 그나마 고마운 밥벌이 전선에 뛰어드느라, 오늘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올 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뭐가 그렇게 심각해?”라고 어깨라도 한 번 툭 쳐줄 그 누군가가 필요한 건 나뿐인 건가?

그들이 ‘이라부 종합병원 신경과’ 의학박사 이라부 이치로를 찾은 이유도 아마 그런 소박한 지지와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일 거다.


냉정한 얼굴로 짧은 질문 끝에 몇 분 만에 환자를 간단히 진단하고, 며칠동안 복용할 약을 처방해 주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의사들의 모습이라면, 그런 면에서 정신과 의사인 이라부는 우리가 생각해 온 일반적인 의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엉뚱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스토커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믿는 히로미(도우미)나, 자신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로 인해 하루 종일 발기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곤혹스런 상황에 처한 다구치(아, 너무 섰다!), 일종의 워커홀릭 증세를 보이는 카즈오(인더풀), 자기 주변에 친구도 없이 또 따돌림이라도 당할까 걱정 되어 핸드폰 중독 증세를 보이는 고등학생 유타(프렌즈), 그리고 혹시 담뱃불을 끄지 않은 건 아닌가, 가스불을 끄지 않은 건 아닌가 때문에 밖에도 제대로 나갈 수 없는 논픽션 작가 요시오(이러지도 저러지도) 등과 그는.... 전혀 다르지 않다. 강박증을 가진 정신과 환자들에게 커다란 주사 바늘이 달린 주사기로 비타민제를 놓아주고는(때로는 강제적으로까지) 껄껄껄 웃는 괴이한 그 역시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순간 흥분하게 되는 ‘주사 페티쉬즘’이라는 강박증 환자이니까. 게다가 그 간호사는 또 어떻고, 짧디 짧은 치마도 모자라 아예 허벅지 안쪽에 보라고 써 붙여 놓은 노출광이시다. 


이라부는 확실히 의사로서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른다.  책상 앞에 앉아 이성적으로 진단하는 것엔 관심도 없다. 그런 형식과 규칙 따위에 얽매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카운슬러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믿으며 ‘스트레스의 원인을 캐서 그것을 제거 하지도 않겠다’라고 말하는 뻔뻔스러운 괴물이다. 


환자의 병이 무엇 때문인지 책상 앞에 앉아  판단하지 않으며, 환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결점투성이의 의사이지만, 그의 결점은 정말이지,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하다.(^^;)


그에게 단순히 환자로만 취급 받지 않아서, 그에게 그저 흔한 서류상의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아서, 그에게 두 당 얼마 하는 식의 경제적 관념으로만 반겨지지 않아서... 그래서 우리는 따뜻하다.

 

신과 의사인 주제에 강박증 환자이지를 않나, 아버지의 재산만 믿고 하루하루 대충 살아가는 캥거루족이지를 않나, 완전 소중하기는커녕 완전 핵폭탄에, 피터팬증후군 증세까지 보이는 그의 손을 그래서 우리는 마주 잡고 싶다. 온기 없이 차갑기만 한 다른 의사들의 하얀 손보다 꼬질꼬질 손톱에 때가 잔뜩 낀 그 손을 말이다.


가슴이 얼어붙도록 차가운 건.....현실적인 문제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끔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절실히 필요한 건, 내 눈높이만큼의 시선과 내 발걸음만큼의 보폭과 내 어깨높이만큼만 얹어지는 작은 위로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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