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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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흔들린다. 흐릿한 시야 저쪽 몇 십미터 앞에 놓여있을 그것, 아니 어쩌면 겨우 몇 미터 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머리 속을 온통 뿌옇게 가려놓은 눅눅한 잡념들을 거둬내며 다시 거리를 가늠해 본다. 찾아내기만 하면, 그게 무엇이든 찾아내기만 하면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우둔함이 가쁜 숨 몰아 쉴 틈도 없이, 다른 곳 돌아볼 여유도 없이 과녁판 정 중앙만을 향해 활시위를 당길 텐데... 때때로 아무런 변화도 없는 내 삶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었음 하고 바래본다. 끝 닿은 절박함은 절실한 필요성을 낳기 마련이니까...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어떻게 할 수조차 없어' 집을 나간 스트릭랜드(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처럼 죽을 것만 같은 강렬한 힘이 이끄는 그 무엇에 대책없이 사로 잡히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객기였을까.
그들을 놓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돌진하게 하는 그 광기는 차라리 행복이다. 무엇을 향해 시위를 당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끝없이 새로운 과녁을 찾아 번민하기보다, 그리고 그 번민조차 감당하지 못해 현실적인 타협에 손 내밀어 종이장보다 얇디 얇은 삶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김득신,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변명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확신에 기대려 하지 않았고, 우왕좌왕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을 지킬 뿐이었다. 용변을 보기도 잊고, 밥 먹기도 잊고, 가족도 잊으며 그는 이미 자신이 수천 번도 더 읽었을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재능이 없어도 가난에 찌들려도 그는 미칠 수 있었기에 이룰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없이 행복했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글쎄, 하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머니의 약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영양실조와 폐병으로 세상을 등진 누이를 두고도 굽히지 않았던 그의 올곧음은 과연 행복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차라리 백리 걸음 힘들더라도/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가 없고/비록 사흘은 굶을지언정/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 없었던' 이덕무의 삶엔 수긍하기 어려우면서도, 내쳐 비판할 수도 없는 치열한 무엇이 있다. 스스로를 '간서치(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할만큼 책을 사랑하여 '풍열로 눈병에 걸려 눈을 뜰 수 없는 중에서도 책을 읽어야만 했던 그'였지만 그토록 아끼던 책을 팔아 밥을 지어먹고 '맹자가 몸소 밥을 지어 먹여주더라'며 껄껄 웃어야 했을 그의 삶을 어떻게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다고 해서 시쳇말로 밥이 나오는 것도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그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천명으로 여겼다 했다. 스트릭랜드가 그랬던 것처럼, 김득신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저버릴 수 없었던 자신으로부터의 부름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보아주지 않아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여러 날을 가까운 벗에게 염치불구하고 돈을 꿔달라면서도 '안회처럼 가난한 삶을 즐기며 벼슬하지 않아 무릎 굽힐 일 없음을 다행스럽게 여긴다'는 연암과 같은 용기가 내게는 없나보다. 허나 한낱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오히려 위안으로 삼으로 현실과 끊임없이 타협할 여지라도 있음에 안도하는 삶이 지루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사무치게 고독하더라도 미지근하고 싱겁기만 한 삶에서 벗어나 가끔이 뜨거워질 그 무엇인가를 꿈꾸는 것, 내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질 긴장감을 기대하는 것, 그것이 팍팍한 일상 속에서 내가 숨쉬는 한 가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쯤 비겁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