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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ㅣ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시인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시인의 눈과 마음으로, 시보다 조금 긴 호흡의 글을 읽노라면
정말로 '시인'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태어난 사람인 거 같다.
창비의 에세이& 시리즈 세 번째 책인 이혜미 시인의 <식탁 위의 고백들>
이 책을 읽으면 흔한(?) 음식 에세이, 요리 에세이도 시인이 쓰면 어떻게 다른지를 단박에 느낄 수 있다.
아보카도, 당근, 달래, 토마토, 복숭아 등 너무도 흔히 보는 것들인데,
이걸 보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27쪽 슬픔에 빠져 주위가 암담할 때 당근을 생각한다. 자신이 화려한 색을 지닌 것도 모른 채 땅속에 잠겨 있는 형광빛의 근채류 식물. 어쩌면 우리가 보는 세계가 이토록 캄캄한 것은 마음 주위를 자전하는 빛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휘황과 광채는 도리어 주위의 캄캄함을 일깨우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우주로부터 지구로 파견 나온 스파이가 된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세계의 비애 속에서 주홍 단검을 손에 쥐고 드리워진 우울을 가르며 가야지. 당근이 깊이를 알 수 없이 두려운 땅 속에서도 은밀하게 자신의 빛을 지키는 것처럼.
57쪽 퍼져나가는 달콤함. 복숭아를 생각하면 조금만 스쳐도 멍들 준비가 된 육체 같고 언제든 손목을 타고 흐를 소문 같아서 극도의 예민함과 자포자기의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가느다란 솜털을 잔뜩 세우고 웅크린 작고 유약한 짐승.
시인은 옥탑에 살면서 허브와 과채류를 직접 키우기도 하고 수확물을 이용해 요리도 하고.
그 식재료와 요리에 대해 쓴 글을 이 책으로 묶었는데.
나는 '라자냐'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라자냐를 지층과 책으로 비유하신 구절도 아주 인상적이다.
66~68쪽 라자냐는 지층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 과학시간에 만났던 빨강과 검정, 노랑과 파랑, 초록과 보라가 차곡차곡 포개져 있던 고무찰흙과도 같은. 그것들을 겹쳐 손아귀에 힘을 주며 뒤틀어지는 지구의 내부를 만들었다. 정합과 부정합. 땅 밑에 어떻게 그처럼 거대한 손이 있어 지층을 누르고 밀고 뒤흔드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어떻게 그처럼 화려한 색깔들이 검고 칙칙한 이 흙 밑에 존재할 수 있는지를. 어긋난 단층을 만들기 위해 색색의 반죽을 칼로 자르면 나타나던 아름답고 기이한 무늬. 그것을 지구의 단면이라 배웠다. 겹겹으로 쌓인 지층은 지구의 일부답게 짙은 석유 냄새를 풍겼다. 그때 나는 세상을 생일 케이크처럼 조각내고 웃던 작은 신이었다.
68~69쪽 라자냐의 페이지들을 생각한다.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책의 두게. 잘 구워져 넘쳐흐르는 글자들을 생각한다. 페이지를 찢어 삼키면 그 의미들이 흡수된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글자에 중독된 자로서, 먹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 직접 썰어 맛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만족을 줄 것인가.
라따뚜이를 보며 강강수월래를 떠올리고,
(79쪽 맞잡아 함께 둥글어지는 순간, 위에서 바라보면 꼭 강강수월래 같다. 원무, 달의 춤. 앞소리에서 뒷소리로 이어지는 물결. 손과 손의 만남. 서로를이해하고 지지하는 비밀스러운 연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동그라미. 빛의 흐름을 만들기 위해 궤도를 도는 일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카레를 만드는 것은 외따로 떨어진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어떻게든 이음새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152쪽)'이라는 표현을 시인의 에세이가 아니면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책에 나오는 요리를 따라해볼까도 싶었지만,
음..... 그건 내 수준을 넘는 듯.ㅋ
내가 이름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식도 있는데, 그런 낯선 요리를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봄을 지나 여름, 가을을 건너 겨울까지...
어느 계절에 무슨 과일과 채소가 나고 어떤 요리를 하는지를 읽으며 자연스레 사계절이 지나는,
리틀 포레스트 같은 자연의 싱그러움과 미장센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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