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권정현 외 지음 / 샘터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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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세상은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

국가나 법, 혹은 경제력 같은 권력이 보이는 힘으로 정의된다면 보이지 않는 힘은 권위주위와 계급  등 수직적인 관계를 말할 것이다.

수직의 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행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휩쓸려  인생을 살아간다.

상사로부터 하달 받는 불합리한 지시에서부터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억압을 통해 우리는 잊었던 ‘분노’를 서서히 끄집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 너무도 잘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이성이란 놈은 분노를 통제하고 스스로에게 ‘이래선 않되’라는 주문을 걸어 즉각 감성모드를 해체 시켜버리기 일수다.  


‘우리는 분노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라는 자문으로 시작된 소설 동인 [작업]의 두 번째 소설집은 ‘분노’라는 모티브를 주제로 한 공동작업이다.

현재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에 길들여지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문제를 담은 주제의식에는 세상의 허위를 거부하자는 작가들의 의지가 깔려 있다.


허와 위선으로 구성된 가족사, 일탈적 저항조차 꿈꾸지 못하는 서민들, 현실이라는 허구가 더 그럴듯해 보이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잠재된 욕망에 짓눌려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열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대부분 역시 현실을 인내하는 사람들이다.

‘독립의 자유를 꿈꾸면서도 끊임없이 기성의 안정과 소통을 갈망하는’ 주인공(봉덕동에 가다)이나 고갈된 인간성에 회의를 느끼는 동성애자인 외계인(환상의 바이킹) 그리고 ‘도저히 수궁할 수 없는 비루한 삶의 내압과 폭력을 견뎌내야 하는 주인공(광화문 그 사내)들은 한번쯤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해 봤지만 결국 괴리감과 비애감이라는 설움을 맛본 사람들이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는 감추어진 분노를 토해내는 인물도 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곧 돌아오겠다는 엄마의 말을 믿고 풍선을 파는 아저씨의 자전거 꽁무리를 따라 갔던 청년은 ‘엄마가 나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설움 때문에 수년간 잠재된 분노를 안고 살았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청년을 만난 주인공은 직장 상사이기도한 후배의 개인주의에 휘말려 퇴직을 했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며 그 분노를 삭이는 캐릭터다.

이야기 도중 청년은 반지가 사라졌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는 주인공을 향해 묻어두었던 분노를 토해낸다. 어리둥절한 주인공은 그로 인해 경찰서까지 가는 모욕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그 흔한 ‘욕’마저 내뱉지 못하는 캐릭터다. 그의 억울함이 분노로 변환되지 못한 까닭은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청년의 분노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 청년의 어린 시절을 동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억울한 반지 도둑의 누명이 씌워져도, 그 청년의 손아귀에 반기가 들려있음을 알아챘어도 그는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서러워 부인에게 “나 좀 데려가 달라”며 엉엉 울뿐이다.(광화문 그 사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절망들과 엉켜 살아가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분노들을 이해하고 있을까?  어제의 동지가 바로 내일의 적이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그때그때 마다 분노를 표출한다면 우리는 유치장을 집 삼아 지내거나 정신병동에 장기 체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타당한 이유에도 분노를 삭이며 살아가야하는 현대인들의 비극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는 있어도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동성애자인 외계인은 어떠한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는데도 지구인들은 그에게 모멸감을 안겨줬다. 살아갈 용기를 주는 이라고는 아직 동심이 가시지 않은 아이들뿐이다. 유원지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를 통해 외계인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분노를 잊어간다. 아이의 천진함은 그의 정신세계를 정화한다.

소설 속에서 그는 외계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실상은 ‘외국인 노동자’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도 상관없을 것이다. 억압과 소외를 받는 모든 이는 이 땅에서 이방인이며 다른 행성의 생명체인 것이다.

외계인이 만난 소녀는 예닐곱 살이 되어 보이는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러나 소녀는 동심과 천진난만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이는 어른의 사고와 행동을 일삼고 있다.

그는 실망감으로 인해 좌절한다. ‘너는 나를 정말 시켰어’라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외계인의 제어할 수 없는 분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노는 외계인보다도 소녀가 느껴야할 감정이었다.

이미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기를 나이가 지나버린 그녀는 단지 몸이 자라지 않는 병에 걸렸을 뿐이다. 이 아이 역시 장애인 이라하는 이름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만들어가야 했던 그녀의 인생은 얼마나 많은 분노들로 들어차있었을까?

오해로 인해 비롯된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또 얼마나 깊은 분노를 전이 시킬까?

땅에 닿아 죽기도 전, 그녀는 역류하는 분노로 인해 먼저 숨이 끊어졌지 않았을까?.

광화문 사내처럼 타인의 울분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이해했다면 외계인는 관대해질 수 있었을까?


타인과 차별된 삶을 살고 있는 어그러진 나를 보거나(봉덕동에 가다), 분노가 전이된 부조리한 가족사 속에서(지붕 위의 날들) 타인이 나를 제멋대로 조명해서 힐책할 때(환상의 바이킹), 상대방의 분노에 대응하여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어젯밤에 우리아빠가) 분노의 표출은 ‘너’와 ‘나’라는 ‘우리’가 사라진 공백의 여파일 것이다.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나와 결합된 개인적인 일에는 쉽게 분노하는 까닭은 우리가 너무 병약하거나 겁 많은 집단 속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명의 젊은 작가들은 그 연약한 사회에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사오 신’ 38구경 시큐리티 식스 리볼버의 총구를 디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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