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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을 입학한지, 달리 표현하자면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시민권을 획득한지, 사회에서 인정하는 어른기준의 나이를 채운지, 담배를 피고 술을 마셔도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싫은 소리 들을 일이 없어진지,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해보지 못한 일 중 가장 아쉬운 것은 이 구질구질한 "대한민국"을 떠나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에서 할 수 있는 일 중 거의 모든 것을 해보았고, 못한 것 중 아쉬움이 남는게 별로 없는데, 해외 경험이 없다는 점만은 안타까운 일이다.(그리고 두고두고 안타까울 것이다. 아.. 덧붙여.. 뭐 온갖 종류의 '자원봉사'가 있는데, 그것도 못해봤지만 그건 별로 아쉽지 않다. 나의 귀차니즘과 이기심 앞에 자원봉사류의 경험은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졸지에, 별안간 선물로 내 손에 들려진 이 책은, 나에게 다음에 읽을 책으로 낙점지어졌다.
사실 이 책은 여행 얘기를 담고 있지만 그저그런 배낭여행기가 아니라, 약 3년이라는 시간을 해외에서 체류하면서 쓴 에세이이다. 그래서 그저 스치면서 가질법한 느낌의 편린들이 나열된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타국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얘기이다. 당연히 외국생활이니 배낭여행기에서 실릴만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가을까지 만 3년 간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일과 주위 지역을 여행하면서 가졌던 느낌들이 이 책의 내용인 것이다.
그저 상상 속에서만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에 코발트빛 드넓은 지중해, 그리고 친절하고 여유있고 다정다감할 것 같은 사람들,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견뎌낸 시간만큼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도시와 유적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파란 초원이 하늘과 맞닿아있고 초원에서 한가로이 양떼나 가축을 방목하면서 생활을 이어나갈 것 같은 그리스, 이탈리아를 상상했다면, 그리고 그런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책을 통해 만나고 싶다면...
절/대/로/이/책/을/읽/어/선/안/된/다.
역시 영화나 사진, 그림으로만 만나는 두 나라는 실제 그 속에서 생활해 본 하루키의 경험에 따르면 너무나도 아니올시다 였다는 것이다. 물론, 하루키가 머물렀던 기간이 198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적잖은 시간일 흘렀기 때문에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리스의 척박한 기후야 하늘이 선사한 어쩔수 없는 환경이 똑같은 것이라 생각이 되지만, 그 엉터리 투성인 이탈리아는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으리라.(하지만 이탈리아에 좀도둑이 많다는 얘기는 여전히 들리고 있으니!)
그리스는 상상보다 기후가 매우 매서운 곳이라고 한다. 그리스에서 맑은 날을 볼 기회는 그렇게 만지 않고, 날씨가 극단적이라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 때면 더없이 좋은 날씨지만,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바람과 장마철을 연상케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지중해라는 환상(?)에 속기 쉽지만 도쿄와 같은 위도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겨울이면 엄청난 추위를 겪어야 한다. 이탈리아는 모든 것이 엉터리라서...여기서 다 밝히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하루키가 제일 불만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상시적으로 일본과 연락을 해야되는 상황상, 그 우편제도가 제일 불편했던 것 같다. 한때 1차 세계대전 당시 썼던 편지가 1960년대에 도착하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가 생각하기엔 그야말로 해외토픽감이고 어찌보면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이탈리아 사람에게는 그게 그럴수도 있는 일이란 것이다. 그 정도로 이탈리아의 우편제도는 무지막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그리는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모습은, 그의 글쓰기 능력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인도하는 묘한 매력을 주고 있다. 지금은 정말로,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여행하는 것은 단순히 여행이 주는 흥미진진함 이상의 그 무언가를 줄것같은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