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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크 캐스터.사이먼 정 지음 / 현암사 / 2012년 9월
평점 :
"국기를 태우는 것은 국가 모독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예술과 외설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성의 삶과 태아의 생명, 누구의 권리가 먼저인가? 자살과 안락사는 개인의 권리일까? 범죄 용의자의 권익은 어디까지 보호 받아야 하는가? 초과 근무는 개인의 선택인가, 고용주의 횡포인가?"
법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우리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은 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이끈다. 이 분명하지 않은 화두들은 현대의 한국사회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임과 동시에 미국 연방대법원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들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사법부 최고 기관으로 각 주의 지방 법원, 항소 법원 등을 거쳐 올라온 사건들을 헌법에 비추어 판단하고 최종 판결을 내리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선택된 사건은 9명의 대법관들의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 최종 판결에 이르게 되는데, 한국의 대법원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주로 법리적인 사안을 다툰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 유사한 성격을 띤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사회를 뒤흔든 연방대법원의 주요 판결 31가지를 쉽고 명쾌하게 소개한다. 사실 법조인이나 관계자가 아닌 이상 판결문의 전문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고 직접 읽는다 해도 수월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법조문 자체도 상당히 난해하고 판결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순수하게 지적인 호기심만으로 접근하기에 법은 사실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런 점에서 각각의 판결을 최대한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한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각 사건은 프롤로그, 판결, 반대의견, 에필로그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프롤로그에서 사건의 개요와 논의 지점을 설명해준 다음 요약된 판결문을 소개하고 소수의 반대의견까지 담은 뒤 사건과 관련된 뒷 이야기와 의미 등을 짚어보는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31개의 판결은 각 시기마다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사건들이었다. 낙태, 총기 소유, 인종, 임금, 직장 성희롱 등 일상에서 시작된 민감한 이슈들은 남북전쟁이나 대공황, 뉴딜정책, 2차 세계대전, 워터게이트 사건 등 미국의 가장 극적인 순간들과 함께한다. 흑인 노예의 인권 문제부터 최근 미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바마 케어’에 관한 국가 의료 보험 문제까지 두루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사건을 소개하는 데 있어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순히 확정된 판결문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견과 이후 이야기까지 다뤘다는 점이다. 판결 내용과 반대의견을 비교해보면 단순히 기계적인 균형을 유지한다기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치열한 논쟁을 통해 판결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준다.
1973년, 낙태의 권리에 대해 여성 개인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는 기본 권리로서 연방대법원은 낙태를 금지하는 텍사스 주 정부의 법률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임신 초기 3개월 내에 행해지는 시술에 대해서는 사망률이 현저히 떨어지므로 3개월 이내의 낙태의 자유는 여성 개인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 외 1명의 대법관은 사법부가 헌법의 원래 의도보다 더 깊숙이 개입했다면서, 사법기관인 연방대법원이 낙태에 대한 상세한 절차를 내놓으며 판례를 통해 스스로 법률을 만들어버린 격이 되었다며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에필로그에서는 정작 소송을 제기했던 노마 매코비라는 여성이 판결이 나오기까지 4년이 걸렸기 때문에 본인은 낙태를 하지 못했지만 낙태의 합법화 결정에 공헌한 데 대한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낙태 반대 운동가로 변신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모두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연방대법원 역사상 최악의 판결이라 불리는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은 흑인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는 전제를 확정 짓고 있다. 미국 독립 선언서에서 규정한 인간에 흑인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판결들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인 사안이 대부분인 만큼 민감한 이슈에 대한 다층적인 시각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가령 인종의 문제는 단일민족 국가인 우리나라에는 해당되지 않는 문제일 수 있었지만 이미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접어든 현대의 한국사회에서 미국이 겪은 다양한 인종 문제와 사회적 이슈들은 곧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