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PD의 미식기행, 목포 - 역사와 추억이 깃든 우리 맛 체험기
손현철.홍경수.서용하 지음 / 부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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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목포에서 전복 양식업을 하신다. 그덕에 나는 늘 '목포 유지'라는 농담같은 별명을 달고 다녔다. 전복은 비싼 식재료니까 그렇게 비싼 녀석을 키워서 내다 판다면 꽤나 부유하지 않겠냐는 논리인데, 그렇게 따지면 억대의 대지와 건물을 중개하는 대한민국 부동산 중개업자는 모두 재벌들인가. 여튼 전복은 비싸지만 유통 과정의 차액은 상식적인 수준인지라 지역의 유지라는 건 망상에 불과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전복만큼은 질리도록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전복 양식을 하기 전에 우리집은 원래 20년 넘게 김 양식업을 했다. 굴 껍데기에 구멍을 뚫어 포자를 심으면 길죽길죽한 김이 쑹쑹 자랐는데, 그 덕에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집에서 가장 흔한 음식은 바로 김이었다. 지역 유지는 커녕 일곱 식구가 근근이 먹고 사는 수준의 평범한 집안이었지만 부엌에는 늘 김이 넘쳤고, 밥상에는 조기나 갈치, 고등어 같은 생선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에는 홍어와 묵은지가 상에 올랐고, 나는 일곱 살에 이미 산낙지를 질근질근 씹어넘겼다. 가끔 낙지의 빨판이 입천장에 들러붙어 으앙으앙 울곤 했지만 그래도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아주는 산낙지를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할아버지가 막걸리에 콜라를 부어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내게 건네면 한방에 쭈욱 들이키고 캬아- 하는 감탄사까지 흉내내며 '할부지 한 잔 더!'를 외쳤다.

 

여름이면 엄마표 콩국수를 목을 빼고 기다렸다. 불린 콩을 믹서에 갈아 콩물을 만들어서 국수가락보다는 굵고 우동 면발보다는 얇은 면을 투척하면 콩국수가 완성됐다. 콩국수에 얼음을 넣고 오이를 채썰어 올려 한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면 그해 여름은 그것으로 족했다. 겨울에는 콩국수의 콩이 팥으로 바꼈다. 고소한 콩국물 대신 달짝지근한 팥국물이 만들어지고,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밀어 샥샥 채를 썰면 칼국수 면발이 척척 쌓였다. 아랫목에 모여 앉아 무릎까지 담요를 덮고 사방에 팥국물을 튀기며 팥칼국수를 후루룹후루룹 먹고 나면 뱃속까지 뜨뜻해졌다.

 

돌이켜보면 우리 집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목포는 먹을 것이 참으로 두둑한 지역이었다. 동네 어디를 가도 집집마다 널려 있는 무화과 나무에서 잘 익은 무화과를 아무때고 따 먹었고, 시장에 다녀오는 엄마의 장바구니에도 자주 무화과가 담겨 있었는데 이 과일을 남도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스무 살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어쩐지 서울에 오니 생무화과는 없고 온통 말린 무화과 투성이더라니.

 

초등학교 안에는 석류나무가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나가 가지를 흔들어 석류를 따먹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석류가 그렇게 비싼 과일이었다니...! 집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항구가 나왔는데, 골목마다 오징어와 쥐포를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항동시장에 가면 대야에 담긴 낙지와 해삼, 멍게 같은 것들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아빠는 횟집의 회는 비싸다며 종종 수산시장에서 거대한 민어 한 마리를 사다가 날렵한 손놀림으로 회를 떠줬다. 그때 나는 어른이 되면 모두가 그렇게 회칼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는 줄 알았다.

 

세 명의 베테랑 다큐 PD가 목포 지역 음식의 맛과 시간을 더듬어가는 미식기행기, <세 PD의 미식기행, 목포>에는 내가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접했던 그 풍요로운 맛에 대한 이야기가 그득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수탈 1번지로 일제의 잔재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쇠락한 항구 도시 목포가 어떻게 미식가들의 기행지가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이 곁들여지기도 하고, 지리적 조건이 식재료 생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간다. 단순히 맛있는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지방 소도시의 맛집 기행이 아니라 민어, 홍어, 낙지, 콩물, 꽃게장, 팥죽 등 목포에서 맛볼 수 있는 그 맛의 정체과 고유성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가령 조선시대에는 그토록 전국적으로 풍요로웠던 민어가 이제는 남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생선이 되었는지, 어쩌다 홍어를 삭혀 먹게 되었는지, 왜 세발낙지는 다른 낙지에 비해 그토록 연하고 맛이 좋은지에 대한 속시원한 설명과 목포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특유의 요리법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음식의 맛을 쫒다보면 목포 사람들의 삶과 일상이 보인다. 어릴 때는 모든 게 너무나 당연하고 흔하게 닿아 있던 식재료들이 목포라는 지역색으로 세심하게 설명되니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새삼 그 맛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책을 보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리다가 책 속의 알록달록 식감 돋는 사진들에 심호흡을 하기도 하고, 흐르는 침을 닦아내기도 하면서, 밤에는 되도록 펼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나의 유년과 그곳의 시간을 함께 여행했다.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엄마가 해준 음식들이 먹고 싶어졌다. 엄마 냄새와 목포라는 공간, 그리고 유년의 시간들이 뒤섞여 공감각적인 식욕이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 물론 목포에 간다면 꼭 가봐야 할 식당들도 깐깐하게 선별해 소개하고 있다.

자랑을 한마디 곁들이자면, 이 책에 소개된 맛집들은 대부분 나의 고향집 반경 2km 이내에 있다.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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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하면 왜 개, 고양이를 버릴까?
권지형.김보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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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년차가 되어 가는 요즘, 친정 엄마는 우리 부부가 키우는 12살 반려견 짜르를 다른 집에 보내든지, 버리든지 어떻게 좀 하라고 성화다. 나는 어떻게 12년을 함께 산 동물가족을 포기하라고 할 수 있느냐고 성토해보지만, 이제 곧 아이도 낳아야 하니 당연히 집안에 개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게 엄마의 주장이다. 이렇게 아이와 개가 한 집안에서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정말 많다. 반려동물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만큼 여러 이유로 수많은 반려동물이 버려져 유기동물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동물 유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다.

 

아기와 반려동물이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편견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힘들고 고단하다. 반려동물이 있으면 반려동물이 여성의 모성호르몬을 증가시키고 여성호르몬을 억제해 임신이 안 된다는 주장부터 개털이 나팔관을 막아 불임이 된다, 고양이를 키우면 기형아가 태어난다, 개나 고양이의 털 때문에 아기가 숨이 막혀 죽을 수 있다, 개회충이 아이 눈을 실명시킨다, 사람에게 피부병을 옮는다, 아토피가 심해진다, 개는 물고 고양이는 할퀴어서 위험하다 등 온갖 편견과 오해들이 반려동물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때론 수많은 유기 동물을 양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마구잡이로 퍼져나가는 이런 주장들은 과연 사실일까.

 

이 책은 온갖 ‘카더라’ 통신으로 퍼져나가는 반려동물에 관한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쓰였다. 저자는 두 딸과 두 마리의 반려동물과 함께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경험한 반려인이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아이와 반려동물을 함께 키우는 것이 위험하다는 편견을 깨는 도구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간 반려동물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이런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으려 많은 노력을 했으나 뿌리 깊은 오해와 편견이 꾸준히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지켜보며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사실 반려인이기 이전에 과학적 근거와 통계적 수치를 바탕으로 건강을 연구하는 의사로서 객관적인 정보 전달에 더 노력한 흔적이 돋보이는 책이다.

 

가령 반려동물이 모성호르몬을 증가시켜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설에 대해 저자는 의학적으로 모성호르몬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고 일갈한다. 설사 그런 것이 존재한다 해도 모성호르몬이 불임의 원인이 된다면 둘째는 어떻게 낳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나팔관이 개털로 막힌다는 설에 대해서도 자궁 경부는 평상시에 바늘구멍보다 작게 꼭 닫혀 있어 개털이 자궁 경부를 지나 나팔관에 도달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아기가 털 때문에 숨이 막혀 죽을 수 있다는 설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동물의 털은 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의 코털조차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의 몸은 철저한 방어체계를 갖고 있다.

 

고양이를 키우면 톡소플라스마에 감염되어 기형아를 낳는다는 오해도 짚고 넘어간다. 실제로 톡소플라스마에 사람이 감염된다는 것은 고양이가 먼저 이 기생충에 감염된 뒤 알을 포함한 대변을 보고 그것을 사람이 ‘섭취’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피부병이나 외부 기생충을 옮는다는 주장도 동물과 인간의 신체 구조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오해인 경우가 많다. 동물과 인간은 피부 구조와 감염될 수 있는 피부병, 기생충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감염이나 위험이란 우리가 평소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여러 안전사고나 환경에서 오는 위험의 확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예방과 훈련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이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아기와 반려동물이 함께하는 행복한 임신, 출산, 육아’란 가족들이 조금만 더 노력하는 선에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학적 근거를 무시한 잘못된 상식과 편견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반려동물과 함께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버려진 동물들이 거리를 배회하며 위생 문제와 안전 문제를 낳고, 때론 동물들이 무작위로 죽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사회는 결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가 아닐 것이다. 부디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주변의 수많은 압박 속에 고통받는 반려동물 가족들에게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더 이상 동물가족을 포기하지 말자.

 

내가 이 책을 준비하면서 놀란 것 가운데 하나는 반려동물이 사람의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의학적 자료가 희귀하다는 것이었다. (…) 국내에서 연구 발표된 논문은 전무하다시피 하며, 선진국에서도 최근에야 연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반려동물을 키우면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거나 아기가 생기면 반려동물을 버려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길가의 돌멩이가 사람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할 필요가 없듯이, 반려동물도 별 영향이 없기 때문에 자료가 그만큼 적은 것이다.

-저자 서문, p5

연구에 따르면 톡소플라스마 감염률은 오직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타났다. 즉, 그 지역의 흙이나 물이 톡소플라스마에 어느 정도 오염되어 있는지, 지역민들이 익히지 않은 음식을 어느 정도 먹는지 등에 따라 감염률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톡소플라스마 감염이 반려동물이 아니라 지역의 토양이나 물 상태 등과 연관되었음을 증명하는 연구결과이다. 결국 톡소플라스마 감염은 고양이를 키우느냐, 안 키우느냐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지역의 흙이나 물 등 환경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 고양이를 키우면 기형아를 낳는다?, p41

사실 동물로부터 옮는 기생충이 두렵다면 개, 고양이 기생충보다 더 위험한 것이 해산물을 생식하며 얻는 기생충 감염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는 오징어, 낙지, 명태, 넙치(광어) 등을 회로 먹었을 때 감염될 수 있는 고래회충은 구충제로도 예방이 잘 안 되고 심한 경우 위나 장을 뚫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러니 기생충 감염이 두렵다면 반려동물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식생활에 신경을 써야 한다.

- 개회충이 아이 눈을 실명시켰다?, p84

개와 고양이의 피부는 털이 많은 대신에 각질층이 거의 없고 땀샘도 없다. 반면에 사람은 동물의 비늘, 털, 가시 대신에 매우 두꺼운 각질층이 피부표면을 보호하고 있다. 마치 벽돌과 회반죽이 결합하듯이 단단하게 엮인 단백질 구조로 되어 있는 사람의 피부는 세균과 온갖 오염물질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고 더불어 수분 등의 필요물질이 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다. 이런 이유로 동물의 피부병은 대부분 사람에게 옮지 않는다. 개나 고양이에게 피부병을 일으키는 원인 미생물이 사람의 두꺼운 각질층에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반려동물한테서 피부병이 옮았다?, p92

반려동물을 무조건 더럽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균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가 마당에 묶여 평생 예방접종이나 구충도 하지 않고, 목욕 한 번 하지 않고 살던 시대도 아닌데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반려동물은 실내로 들어와 사람만큼 청결한 생활을 하고 있다. 반려동물의 생활환경이 바뀐 만큼 반려동물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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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공부가 사교육을 이긴다
김민숙 지음 / 예담Friend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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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기가 망설여지는 게 육아의 고단함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아이 한 명을 낳아 성인이 되기까지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1인당 평균 2억 6천이라던가? 너무나 큰 액수여서 상상조차 되지 않는 억! 소리 나는 금액에 벌써부터 심장이 후덜덜 소리를 낸다. 그런데 어쩌면 그 억 소리 나는 금액은 양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비용만 계산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교육'이라는 비용을 계산하면 양육비는 그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분명 학원에도 다니지 않았고 하루종일 사교육에 시달린 적도 없다. 물론 그래서 내가 이 모양일 수도 있지만;; 당시 반에서 일등, 전교에서 일등 한다는 아이들도 지금처럼 극심하게 사교육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대부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사교육 없이는 절대 좋은 성적을 받을 수도,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없다고들 말한다. 출산율도 낮아지고 학생 수도 줄었지만 교육의 혜택이 개인의 인생을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은 엄마들이 사교육의 힘을 빌어서라도 자녀를 좀 더 우수한 인재로 키우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능만 끝나면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교과서와 수업에만 충실했어요. 학원은 다니지 않았어요."라는 말이 분명히 뻥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들 치열하게 경쟁하고 학원과 과외로 무장한 아이들을 교과서와 학교 수업만으로 물리쳤다고? 그저 준비된 멘트라고만 생각하고 흘려버렸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한글도 제대로 몰랐던 아이가 지금 전교 1등을 한다고? 정말?

 

갑작스런 사업 부도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들의 공부를 제대로 봐줄 길이 없었던 엄마는 초등학교 5학년이 다 되도록 아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하나하나 챙기기에는 사는 게 너무 고되고 바빴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데, 사교육은 꿈도 꿔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아이를 바보로 만들수는 없다는 위기감이 엄마를 움직였다. 직접 공부를 해서 아이를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설마 정말 엄마가 아이를 가르쳐서 꼴찌였던 아이가 1등이 되었을까? 읽는 내내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기초도 전혀 없었고 받아쓰기 점수는 늘 바닥이었고, 그저 마냥 놀기만 했던 아이는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래, 내가 그랬다;;; 공부는 습관이 반이더라;;;) 그런데 어떻게 선생님도 아닌 엄마가 아이를 책상 앞에 앉게 했을까.

 

물론 그 배경에는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엄마의 피나는 노력과 관심, 그리고 아이의 의지가 있었다. 물론 아이가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의 노력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었다. 사실 첫장부터 순간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안타까워서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가정 형편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프고 힘들었을 엄마가 방치된 아이를 보면서 흘렸을 수많은 눈물들이 보였다. 공부할 애가 아니라며 쓸데없는 짓 말라고 책을 던졌던 남편을 보면서 어떻게 이 정도 노력도 없이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냐고 하는 그 엄마의 마음. 오랜 죄책감과 책임감이 아이를 놓지 않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자녀 교육하기' 수기 공모전에서 입상한 사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말 그대로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등생 자녀로 키워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이었지만, 또한 누구나 쉽게 동참하기 어려운 길이지만, '공부'라는 것이 반드시 돈이라는 물질적 투자가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이의 공부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엄마의 세심한 관심이라는 걸, 이 위대한 엄마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신경쓸 것도 많고, 사는 게 바빠서 사교육이라는 간단한 길을 택한 엄마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서 남들보다 우수한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엄마들에게, 너무 빨리 아이의 공부를 포기해버린 엄마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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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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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동네에서 아이들과 야구공을 주고받고 개천가 공터에서 시합을 벌이다가 <인조인간 캐산> 같은 텔레비전 만화영화나 클로버문고 만화책에 대한 품평을 주고받곤 했다. 친구들과 뜨거운 한 철을 보내던 소년은 느닷없이 찾아온 생이별을 맞이하며 울음보를 터트린다. 어느덧 8톤 트럭 한가득 짐을 싣고 동네를 떠나가던 이들에게 손을 흔들던 소년은 다시는 친구들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이후 소년은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간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지만 친구들의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다. 아카데미 프라모델과 형형색색의 레고 블록과 플레이모빌에 둘러싸여 정체를 알 수 없는 문명화에 어리둥절하던 소년은 '집이 바뀌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파트, 그리고 아파트사(史)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 이후 정치, 사회, 문화, 경제를 촘촘하게 분석하고 독특한 스토리텔링으로 정리한 이 책은 저자 개인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부터 출발한다. 개인과 사회가 기억하는 아파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건축이자, 생물이자, 개인이자, 집단이자, 문화이자, 경제다. 아파트는 살아 움직이지 않지만 아파트를 욕망하고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토건 권력은 아파트를 살아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었다. 전쟁의 상흔을 재빨리 지우고 근대화로 진입한 한국 사회를 과시하기 위해 1962년에 지어진 마포아파트부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수백 개의 크레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쌓아올리고 있는 주상복합아파트까지, 그 짧고도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그동안 아파트를 다뤄왔던 수많은 책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이유는 픽션과 팩트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아파트를 이야기하는 화법의 실험성에 있다. 아파트 자체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해 자신을 향한 욕망에 대항하고, 불만을 토로하며, 야심을 드러낸다거나, 강남 중산층 출신의 60대 남자를 화자로 설정해 자신의 세대가 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세력이었음을 털어놓는 자기고백적인 서술은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선에 입체감을 더한다. 

 

'팩트의 진술'이라는 형식으로 쓰인 2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아파트 정치사와 변화무쌍한 주거문화를 여러 시각 자료를 통해 설명한다. 80년대 인테리어의 최신 유행이었던 베란다 가드닝이나 샤방한 레이스와 꽃무늬 천으로 점철된 홈패션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냉장고와 세탁기, 텔레비전 등 백색가전은 어떤 생리에 의해 변모했는지, 가족 구조와 주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방의 공간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들여다보면 개인의 체험 속에 잠들어 있던 ‘삶’이 움찔거리며 일어나 시대와 개인의 역사를 비추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아파트를 단순한 ‘건축물’로 한정 짓지 않는다. 마포에서 시작해 용산으로, 동부이촌동으로, 잠실로, 압구정으로, 분당과 용인으로 이어지는 부동산 노른자들의 형성은 그저 토건 권력이 꿈꿔왔던 유토피아만이 아니다. 그래서 아파트는 때로 무기체이자 자존심이며, 근대 이후 한국사회가 지향해왔던 욕망 그 자체이자, 야망과 절망을 반복했던 중산층의 처참한 생몰(生歿)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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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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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계속 회피하면서 김애란의 새 소설집 <비행운>을 읽었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습해지고 더워지는 책이다. 전체적으로 여름 느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기도 하고, 면지에 인쇄된 김애란의 사인 위에 '여름 비행'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면 더 덥다.


김애란 특유의 허를 찌르는 문장들이 거의 사라졌다. 주제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두근두근 내 인생> 이전의 단편들에 비해 굉장히 섬세해졌다. '벌레들'의 경우 작가의 이름이 없다면 누가 썼는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로 김애란스럽지 않다. 문장의 섬세함만이 아니라 주제에 접근하는 시선 자체가 촘촘해졌다. 그게 한뼘씩 확- 자라버린 나무 같기도 하고, 꽃과 열매가 다 져버린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 같기도 하다.

 

나는 꽃이 만발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김애란이 좋았다. 짙은 초록으로 꽉 차올라 껑충 자라버린 김애란보다, 꽃으로, 열매에게로, 벌레에게로, 매미에게로, 여기저기에 시선을 옮겨붙일 수 있는 김애란이 좋았다. 그래서 이번 소설집은 성숙하고 단단하지만 매력적이진 않다.

 

그래도 이 소설집의 첫 작품으로 배치된 '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서른'은 한 번 더 읽고 싶었다.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선배는 곧잘 나를 '녀석'이라 불렀다. 그런 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p15 '너의 여름은 어떠니'

 

 

학생 중에는 평소에 저랑 한마디도 안 하다 이따금 딸기우유나 초콜릿을 건네고 가는 여중생도, 말수 적고 속이 깊어 언제나 부모님을 걱정하는 남고생도 있었어요. 공부를 하도 한 탓에 수업 중에 코피를 쏟는 아이도,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토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요.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간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p297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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