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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면, 결코 이 책을 집어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단 이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동화책스러운 일러스트는 전혀 내 타입(?)이 아니었단 말씀. 어쨌거나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건 아주 우연한 상황 덕분이었지만 나름대로 의외의 즐거움이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공문서상에 '사망'한 자가 되어버린 야샤르는 교도소에 들어와 자신의 꼬이고, 뒤틀리고, 지지리 복도 없고, 지지리 운도 없고, 황당하고, 어이없고, 기가막힌 삶을 매일 밤마다 풀어놓기 시작한다. 태어나기도 훨씬 전 해에 이미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재되는 바람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한 야샤르의 인생은 초등학교 입학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으면(반드시 공문서상에서의 확인이라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생사불명' 상태는 매 순간 아주 편리하게 적용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넌 죽었다, 고 하고 군대 갈 때가 되면 넌 살았다, 고 하고 제대할 때는 넌 죽었다, 세금을 내고 빚을 갚을 때는 넌 살았다, 유산을 상속받으려고 하면 넌 죽었다, 정신병원에 수감(?) 될 때에는 넌 살았다, 병원에서 나가려 할 때는 넌 죽었다, 를 반복하는 국가 앞에 야샤르는 지칠대로 지쳐간다.

 

  그들이 야샤르의 이야기에 이렇게나 열광하는 이유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샤르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그들 대부분에게 야샤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공동의 삶이었던 것이다. 야샤르는 마치 모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체화한 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p206

 

  그가 매일 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교도소 안의 수감자들은 함께 분개하고, 함께 욕하고, 함께 억울해하고, 함께 슬퍼한다. 야샤르가 겪은 일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외진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나가는 소시민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들의 고농축 엑기스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거기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막히면서도 한편으론 우습고, 결국 씁쓸해지는 에피소드는 바로 내가, 우리가 겪는 일들이 아니던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혹은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기 위해,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관공서를 드나들던 야샤르는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공무원들과의 질기고, 지난한 싸움에서 두 손을 들고 마는데, 공공기관의 풍경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다 같은 모양이다. 서류를 작성해라, 어디에 제출해라, 문서 번호를 받아와라, 누구를 찾아가라, 증명서를 떼어 와라, 어디에 가서 승인을 받아라, 어느 과에 가서 누구에게 문의 해라. 야샤르의 이야기에서 공공기관의 까다로운 절차를 묘사하는 부분은 짜증이 날 정도로 과장되고, 우습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애써 서류를 마련하면 문서번호가 있어야 한다며, 이브라힘 씨에게 제출하라고 하고 문서과의 이브라힘을 찾아가면 그가 아이텐 양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이브라힘을 찾기 위해 아이텐 양을 찾으면 아이텐 양은 과장님을 만나러 갔고 과장님에게 갔더니 그는 축구 경기장에 있다고 한다. 거대한 경기장 안에서 미친듯이 과장님을 찾아 헤매면 누군가 경기장 관리과장에게 데려가고 야샤르는 제발 문서 번호를 달라 요청하고, 결국 헛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식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공무원의 업무속도는 달라진다. 공공기관 안에서 어렵게 큰돈을 들여 마련한 모자를 잠시 걸어 둔 사이, 분실물로 분류돼 순식간에 서류와 함께 문서과로, 과장에게, 관련 부서로, 창고로 사라진다. 그 모자를 되찾기 위해 또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몇일을 허비한 후에야 마침내 과장의 확인서와 함께 모자를 찾으러 창고에 가지만, 결국 주민등록증이 없으므로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며 모자를 돌려주지 않는다.

 

  야샤르의 황당무계한 인생사(史)에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무기력한 인간의 위선과 불편한 자화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가끔은 짜증이 확- 솟아 오르다가, 피식피식 웃다가, 씁쓸해지고, 잠시 슬퍼진다. 야샤르의 이야기를 듣는 수감자들처럼, 욕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에이 씨발!" "이런 제기랄!" "염병할 놈의 세상!" "뒈져버려라!"

  '염병할 놈의 세상'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 시각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아지즈 네신은 터키의 작가인데, 알라딘에서 어떤 독자가 "아지즈 네신의 입담을 따라가다 보니 터키와 한국은 정말 형제국가가 맞는가 보다"라고 하더라. 사실 터키가 아닌 어느 나라인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수 있겠는고? 세상의 온갖 부패한 것들은, 위 아 더 월드여, 씨앙! 

 

  "그러니까 정말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리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관공서에서 말입니다. 부하가 상사에게 '아닙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상사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잘 관리해봐'라고 말한다네요. 아마 우리 나라의 관리인보다 더 유능한 관리인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지만, 민주적인 관리라는 게 버젓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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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 혹은 민주주의. 그것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일까요? 최근들어 절실히 느끼는 거지만 최소한 '국민'을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망할놈의 현실이죠.
 
흡연 여성 잔혹사
서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여성의 흡연, 큰일입니다!


  대학 재학 시절, 예비역들로부터 ‘신여성’으로 불리던 여자선배가 있었다. 문예창작과라는 학과 특성상 타과에 비해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지만 담배를 입에 물고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여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배는 담배를 피우며 당당하게 캠퍼스를 활보하게 다녔는데, 그런 점에서 ‘신여성’이라는 별명은 썩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 별명 안에는 ‘당당해서 보기 좋다’는 칭찬의 의미보다는 주류에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라는 조롱과 ‘여자가 뻔뻔하게 걸어 다니면서 담배를 피다니’라는 비난의 의미가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남자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야, 담배는 기호식품이야. 여자, 남자가 어디 있어” 라며 쭈뼛거리는 흡연여학생(?)들에게 담배를 적극 권하곤 했다. 그리고 돌아서면 “계집애가 담배 피는 거 제일 꼴불견이다” 라고 말하며 이중성을 드러냈다.


그 앙금의 연기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게 큰일인가? 그렇다. 큰일이다.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30여년을 흡연자로 살아온 서명숙씨의 에세이 『흡연 여성 잔혹사』(2004 ·웅진닷컴)는 대한민국에서 여성 흡연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슬프고도 유쾌하게 풀어낸 책이다. 서슬 퍼런 70년대의 운동권 여대생으로, 두 아이의 엄마로, 언론인으로 살아갔던 그녀의 삶은 언뜻 평범한 듯 보이지만 ‘담배’라는 기호식품 하나가 개입되면서 한국사회의 편견과 보수성, 가부장적 가치관과 매 순간 충돌한다.

  ‘세상의 모든 담배 피우는 딸들을 위한 에세이’ 라고 보아도 무방할 이 책은 단순히 흡연에 대한 잡담이 아니다. ‘잔혹사’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담배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잔혹한 삶의 기차에 올라타는 승차권이 된다. 57년생인 저자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라고 우기는 ‘남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웃지 못 할 경험담과 기가 막힌 사연들에 무릎을 치지 않을 여성흡연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가치관은 생각보다 느린 걸음으로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고 거리를 활보해보자.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림, 심하게는 언어폭력을 단 하루 만에 겪을 수 있다는 데에 500원 걸겠다.


아주 작은 차이, 또는 아주 큰 차이


  담배를 처음 배우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다면 상당수의 남자들은 ‘군대에서 고참이 권해서’라고 답한다. 표현은 ‘권해서’이지만 사실상 ‘명령해서’와 다름없다. 철저한 상하관계와 명령체계로 유지되는 군대 안에서 그들은 권력과 복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대답은 천차만별이다. 몇 가지로 묶을만한 카테고리조차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계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자발적 흡연’일 것이다. 여성흡연자들은 누가 등 떠밀어 가시밭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다. 비록 수많은 편견의 시선 속에서 누구나 당당하고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권력과 권위주위로부터 당당할 수는 있다. 서명숙은 여성들의 당당한 흡연에 대해 “당당한 흡연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에 대한, 자기 선택에 대한 주저 없는 긍정이다. 사회가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편견을 눈치 채고 그 너울을 걷어내려는 단호한 몸짓이다” 라고 말한다. 

 

  그녀가 담배를 통해, 여성 흡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쾌하다. “일탈을 향한 본능적인 욕망, 금기에 저항하려는 자유의지”가 더 이상 너희(남자)들의 시선에 갇힐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담배 열애사를 고백하고, 역사속의 흡연여성들을 소개하고, 어디선가 마녀사냥을 피해 몸을 숨기며 담배를 입에 무는 여성들의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초반부를 살펴보면 읽는 내내 입가에 쓴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또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여성 흡연을 금기시하는 남자들의 속내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것만큼은 너희 여자들이 넘보아서는 안 될 꿀단지’라는, 남성들의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여성 흡연에 대해 생각해보니 이 책을 남자들이 읽으면 얼마나 뜨끔할까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 유쾌,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 한쪽이 허해졌다. 요즘은 건강을 생각하는 금연 열풍이 전 지구적으로 번지고 있으니 이제 ‘여자라서 피우면 안 돼’가 아니라 ‘남자들도 건강 생각해서 죄다 끊는 마당에 아이 낳을 몸들이 담배를 피워서야 되겠냐’는 허울 좋은 핑계가 하나 더 생겨버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것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꼽자면, 바로 ‘변절을 꿈꾸다’라는 챕터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30여 년간 담배를 피웠던 저자가, 그렇게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담배를 찾았던 그녀가 이제 담배를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의 인권신장과 자유의지 등에 대해 열렬히 토로해놓더니, 후반부에 들어서서는 운동과 여행을 하며 긍정적인 중독에 빠져보자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장장 46페이지에 걸쳐 자신의 금연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아니, 잘 나가다가 이게 웬 급작스런 방향전환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보니 그녀의 금연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에도 너그럽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당연히 모든 금연열풍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여성의 금연기라니. 비록 마무리가 내 감상에 부응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최초의 여성 금연기를 담은 책이라는 데에 의미부여를 하고보니 다시 뿌듯하게 책장을 닫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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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goon 2006-09-26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하하하.

하늘연못 2006-11-2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의 억압에 대한 탈출로서의 흡연이라는 것이 여성 운동으로서도 건강한 것은 아니지 않나요? 피해자의 자기 선언으로서의 흡연은 건강하지만 가해자의 시선에 갇히고마는 흡연은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따라서 저는 서명숙 선생님의 금연이라는 것이 건강 때문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27년의 관습에서 탈출했다는 면에서는 좋아보이드라구요.그리구, 27년 연초인생의 카리스마에서 훈제된 자유 의지가 어디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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