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책의 디자인이 미쳤다. 양장본으로 된 표지에 박힌 금빛 글씨부터 고급스럽다. 내지의 디자인이나 편집도 나무랄데 없는데 책을 읽어가며 디자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암전들>은 실제로 1941년 발행된 연구서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를 토대로 쓰인 소설이다. 불과 백년도 채 안된 과거에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인식했고 퀴어 연구를 병리학적 자료로 폄하했다. 책 중간에 등장하는 보고서 이미지 속의 텍스트는 군데군데 삭제되어 있다. 마치 검열당한 신문 기사처럼.소설의 화자는 '네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게이 청년으로, 그가 '팰리스'라는 시설에서 임종을 앞둔 '후안 게이'와 나누는 긴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의 퀴어적 경험을 밝히기도 하고 후안이 겪은 옛 퀴어 세대 이야기를 증언하기도 한다.후안이 증언하는 인물 중 '잰 게이'가 있다. 그는 실존 인물로 레즈비언인 자신의 정체성을 토대로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한 업적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후안이 네네에게 건넨 '성적 변종들'인데 이는 당대의 300여 명의 동성애자들을 인터뷰한 연구 보고서다. 하지만 이 급진적인 자료는 왜곡되고 폄하되었고 후안은 이를 네네에게 증언한다.책 속의 텍스트 뿐만 아니라 수록된 이미지와 형식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일관된 스토리나 익숙한 구성이 없어서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오기도 했다. 또한 퀴어와 관련된 역사, 문화적 코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어렵게 느낀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네네와 후안의 대화가 이어지고 책의 끝을 향할수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감정들이 있었다. 결국 <암전들>은 연대와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암전들 #저스틴토레스 #열린책들 #미국소설 #퀴어문학 #퀴어
마트에서 근무하며 비정기적으로 네팔어 법정 통역을 하는 도화는 어느 변호사로부터 이상한 제안을 받는다. 끔찍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네팔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의 말을 '거짓으로 통역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 암수술 직후인데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친 도화는 거액이 걸린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법정에서 필사적으로 결백을 주장하는 네팔 여성의 모습에, 이 사건 뒤에 큰 음모가 있음을 알게된다.수도권을 벗어나면 이주노동자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커뮤니티나 상업시설도 다양하다. 그래서 이제는 주류 대중문화에서 이주노동자나 다문화 가정이 더 다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들도 결국 오늘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일부분이니까.작가는 우리에게 낯선 네팔어와 문화를 끌어와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미스터리 소설을 탄생시켰다. 설정과 소재가 좋아서 초반에 몰입감이 있었다.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문제, 환경문제 등을 스토리 안에 녹인 점도 괜찮았다. 다만 네팔의 쿠마리, 신화 등이 많이 낯설어서 더 자세한 설명이나 안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상화가 확정된 작품이라고 한다. #통역사 #이소영장편소설 #네팔 #이주노동자 #미스터리 #래빗홀 #래빗홀미스터리앰배서더 #서평
청소년을 위한 독고독락 시리즈. 우선은 얇은 분량에 놀라고 큰 크기의 활자에 또 놀랐다. 독자들과 책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하려는 출판사의 열의가 보였다.첫번째 작품 '움직임'은 자폐 스펙트럼을, 두번째 작품 '다시, 기억'은 알츠하이머를 다루었다. 두 소재 모두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힘들게 하는 장애들이다. 정상성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오히려 힘들어지는 상황을 다루었다. 특히 첫번째 소설인 '움직임'은 자폐 스펙트럼의 주인공이 화자라 그만의 시간의 흐름과 방식을 따라가게 된다. 수술로 자신을 '정상화' 시키려는 엄마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이것이 주인공다워서 기억에 남는다. 오래 전 읽은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도 생각났다. 자폐 스펙트럼인 자신의 아들로 인해 자폐인 주인공을 화자로 한 소설이다. 이 책을 쓴 낸시 풀다 역시 자폐인 아들을 키우고 있다고. 자식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엄마가 쓴 소설이라니 멋지고 아름답다.우리집 청소년들에게도 읽어보게 해야겠다.#내가하려는말은 #낸시풀다 #정소연옮김 #백초윤그림 #사계절출판사 #독고독락 #sf소설 #청소년소설 #단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개미>, <타나토노트>, <아버지들의 아버지> 등 초창기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챙겨 읽지 못했는데 이번 신간은 궁금했다.세계 3차 대전으로 인류는 거의 사라지고 핵폭탄으로 인해 지구는 방사능으로 오염된다. 마침 우주선에서 인간과 동물의 혼종을 만들어 온 과학자 알리스는 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지구로 귀환한 알리스는 박쥐. 두더쥐, 돌고래와 사피엔스를 결합시킨 세 종류의 혼종, '키메라'들을 탄생시킨다. 키메라들은 방사능이나 오염 물질에 강하고 각기 특화된 신체적 기능이 있다. 또 사피엔스보다 임신 기간이나 성장기가 빨라 금세 번식하여 개체 수를 늘린다. 그리고 급기야 사피엔스를 위협하기도 한다.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펼쳐낸 흥미로운 가정이다. 이야기는 계속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지루할 틈없이 진행된다. 세계 3차 대전은 어어 없게 발발해서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 씁쓸하기도 했다.알리스가 키메라들을 창조한 의도와 그들을 향해 느끼는 애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 후기를 보니 현실에서도 인간과 동물의 혼종을 연구하는 사례가 많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도들이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만약 소설과 같은 상황이 온다면 모두 다 멸종하는 수밖에.베르베르는 혼종을 옹호한다기보다 현재를 경고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환경, 혐오, 정치 등 현실이 가져올 위험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어쩌면 작가의 경고대로 5년 뒤 일어날지도 모른다.#키메라의땅 #베르나르베르베르 #열린책들 #김희진옮김 #소설 #과학소설 #장르소설 #프랑스소설 #서평 #책추천 #미래소설 #sf
피아니스트이자 클래식 유튜버로 활동 중인 안인모 님의 저서. 유튜브에 올라오는 컨텐츠가 쉽고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의 책도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 처음에 이런 클래식 입문서를 꽤 많이 읽어 온 까닭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걸.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이 책은 시리즈 중 세번째로 출간된 '인상 카페'편으로 일곱 명의 작곡가를 소개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말러, 드보르자크, 드뷔시, 라벨, 사티. 각 인물들의 삶과 대표곡들을 알 수 있다.제법 방대한 작곡가들의 일생을 키워드별로 짚으며 핵심적으로 정리했다. 내용 중간 중간에는 큐알코드로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래알꼭알'이라는 꼭지는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는데 피아니스트로서의 조언이나, 작품번호의 의미, 악보 상의 특징, 곡과 연관된 상식 등 그 내용이 다양했다. 아마도 작가가 음악가면서 콘텐츠 제작자라서 가능한 풍부한 내용이지 않을까. 그중 '드뷔시의 피아노곡 연주 포인트'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연주한 드뷔시 곡이 어째서 별로인지 바로 납득이 되었다.)표지와 내지를 가득 채운 일러스트도 훌륭하다. '최광렬'이라는 분의 작품인데 현실 작곡가들의 모습을 살렸으면서 개성있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책의 삽화로만 머물기에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굿즈로 활용되면 어떨까?)시리즈의 '낭만살롱 편'과 '고전의 전당 편'도 찾아봐야겠다.#클래식이알고싶다 #안인모작가 #위즈덤하우스 #인문 #클래식 #서평 #클래식이알고싶다인상카페편 #안인모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