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말기. 신분제는 흔들리고 일부 양반은 그저 허울 뿐인 이름이 된다. 한양의 뒷골목을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한 이들이 진정한 실세가 된 세상. 이 소설은 격변의 18세기 말을 배경으로 펼쳐진다.등장인물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다보니 초반부터 이들을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몰락한 양반 이륜은 아내가 갓난 아들 강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싸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인왕산패'의 실세 하우도의 밑으로 들어간다. 비록 몰락했지만 양반으로서의 선비정신이나 절개, 정도를 지키는 이륜. 그의 아들 강하는 무관으로 입신하려 하지만 아비의 행적 때문에 좌절된다. 그 와중에 하우도의 아들인 상익은 규장각 벼슬아치의 몸종을 죽이는 사고를 치고. 이륜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아들 강하를 상익으로 위장시켜 송도로 보낸다.캐릭터들이 많은 만큼 줄거리의 요약이 쉽지 않지만 크게 보면 '인왕산패'라는 상권 조직을 둘러싼 이야기다. 헐리우드 영화에서의 마피아 조직처럼 갈등, 배신, 복수, 여자 등이 등장한다. 장르적인 재미가 있다. 조직의 보스 하우도, 보스의 쓰레기 아들 하상익, 충직한 부하 이륜과 그의 아들 이강하. 이 정도의 캐릭터만 봤을 때 영화 <로드 투 퍼디션>과 같은 스토리(보스가 자신의 혈육을 위해 충직한 부하를 버리는)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흘러가는 스토리였다면 김 샜을 것이다. 뜻밖의 대결 구도가 있어 흥미로웠는데 하우도 그의 부인 하명혜가 그랬다. 특히 하명혜의 서사가 특이하고 행동은 패기있더라. 앞으로의 스토리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된다.영화 감독이 쓴 소설이라 그런지 문장들이 이미지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대 구어체 대사들은 좀 튀긴했으나 잘 맞았다. 조선 시대의 상업 용어들이나 시스템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있었다.책 표지의 제목 폰트 '묵계'가 무척 시원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