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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재미를 선택한 삶 주철환

 

 

‘주철환’이라는 이름은 예능 프로듀서로들 사이에서 하나의 신화다. ‘모여라 꿈동산’부터 ‘대학가요제’, ‘퀴즈 아카데미’, ‘일요일 일요일 밤에’, ‘우정의 무대’ 등 그가 연출한 프로그램들마다 ‘대박’이 터졌고, 그는 예능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다.

이렇게 잘나가던 주철환이 현장을 떠나 이대교수로 강단에 서더니, 7년 만에 다시 경인TV(OBS)의 CEO로 변신을 거듭했다. 질주였다. 하지만 최근 경인TV CEO를 ‘타의’로 그만두면서 처음으로 ‘실패’라는 평가와 마주하게 되었다. 세간의 관심이야 온통 그 부분에 쏠려 있지만, 오늘의 직격인터뷰의 주안점은 그의 ‘변신’이 아니라 ‘인간 주철환’에 있다.


 



꿈꾸는 낭만주의자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한 인간을 규정하는 기호는 대개 '직함'이다. 때문에 사람을 만날 때 ‘그’를 부를 마땅한 사회적 호칭이 없을 때 우리는 당황한다. 그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전(前) 사장, 전 피디, 전 교수라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리포터 안경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수줍은 손을 내미는 그를 향해 유일한 현직 호칭인 ‘주 박사님’이라 부르기도 조화롭지 않았다. 그에게 물었더니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Q. 선생님은 낭만주의자십니까?


그건 아니에요. 물론 때로는 그럴지도 몰라요. 낭만을 견지 할 때는 낭만주의자고 때에 따라서는 고전주의자나 현실주의자도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낭만’이 제가 좋아하는 삶의 유형이긴 해요.


Q. 처음에 중학교 국어교사에서 PD로 전업한 것도 특이한 이력인데 계기가 있었나요?


원래 모교에서 교사를 하는 것이 꿈이었죠. 한데 군대가 좀 늦었어요. 제대 전에 MBC 앞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게시판을 보고 있더라고요. 채용공고였죠.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과목이 ‘국어, 영어, 상식, 작문’인데 국어는 원래 전공이고(그는 국문학 박사다), 당시 카추샤 복무중이라 영어는 약간 자신이 있고, 자질구레한 상식도 많은 편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죠. 게다가 중고등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두 번의 장원을 한 적이 있으니 그 과목들이 와 닿아 그냥 원서를 받아왔죠.


Q. 아무리 그렇다고 난데없이 교직을 버리고 ‘예능 PD’를 선택하나요?


당시 MBC 최병윤 PD가 후배 병사였는데 그가 신방과 출신이었죠. 그때 그에게 PD시험 한 번 보면 어떨까하고 물었더니, ‘당신은 죽어도 안 된다 합격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오기가 나서 시험을 쳤는데, 필기에서는 합격하고 최종면접에서는 당연히 떨어졌죠.


Q. 왜 당연히 떨어졌다고 생각합니까?


PD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왜 PD를 하고 싶은지도 몰랐으니 당시 면접을 보던 이웅희 사장이 오히려 당혹스러워하더라고요. 그 후 ‘내 길이 아니다’고 생각 했는데 몇 달 뒤 추가모집으로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어요. 그 순간 재밌을 것 같아서 입사를 결심했지요.


Q. ‘재밌을 것 같아서’라면 정말 특이한 이유인데, 그 후에도 다시 교수, CEO까지 숨 가쁜 변신을 했거든요. 말씀을 듣고 보니 변신을 놀이처럼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데요?

그건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실례죠. 내가 선택하고 도전하는 곳의 공통점은 ‘재미있는 곳’이라는거죠. 나는 어릴 때 TV와 라디오를 좋아했고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변신도 교육 아니면 방송쪽이었으니, 그건 ‘변신’이라기보다는 ‘진화’라고 할 수 있죠.

Q. 마지막 진화였던 경인TV(OBS) 사장으로 갔을 때,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왜 그 제안을 받아들였나요?

PD를 하다보면 늘 ‘내가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죠. 사장이 프로그램 존폐에 영향을 미치는 최종 결재자니까요. 저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뜬금없다. 황당하다’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대로 좋은 프로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나를 그쪽으로 이끌었죠.

Q. 하지만 아무리 숙원이 있어도 그렇지, 정년과 명예가 보장된 대학교수보다 미래가 불투명한 지역방송사장이 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을까요?

저는 지금도 후회는 정말 하지 않아요. 인생은 다양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죠. 65세까지 이대 교수로 있는 것도 좋지만 ‘우여곡절 있는 삶이 밋밋한 평화로움보다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Q. OBS에서 고통스럽지 않던가요? 재직시절 간간히 괴로운 심경을 내비쳤는데요.

오히려 그 괴로움이 나를 키웠죠. 저는 태생적으로 성공보다는 성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Q. 경인TV에서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말 것이다’는 주변의 우려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나요?

그런 생각은 못했죠.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마 가지 못했겠죠. 사냥개가 마지막 순간에 보신탕집에 끌려가면서 ‘보신탕집 주인도 측은지심이 있겠지’하고 가지는 않죠. 나는 만남의 의미를 중시해요. 그냥 ‘재미있을 것이다. 즐거울 것이다’라고 생각했죠. 몇 개의 측면에서 억울하달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사라졌어요.

Q. 앞서 낭만주의자는 아니라고 했는데, 사장을 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그 자체가 낭만주의적 사고가 아닌가요?

그건 솔직히 인정!

(연배가 위인 사람에게 이런 표현이 예(禮)는 아니지만, 그는 무척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인터뷰이에게 꽤 신랄한 느낌일 수 있는 질문에도, 그는 어린아이가 장난을 걸듯 탄력적인 반응을 보였다)

Q. 그곳에서 지낸 2년은, 선생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요?

서로 의미 있었고, 앞으로도 서로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쪽에서 초기에 내 달란트가 필요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고, 나로서도 일부라도 해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만 한 10년 정도에 걸쳐 제대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죠.

Q. 프로듀서로서의 이상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현실 같은 것을 생각하지 못했나요?

지금은 강하게 절감해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모으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것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주주들이 볼 때는 ‘철없는 생각이다’고 보였겠죠. 본질적 입장차이죠. 그쪽에서 서로 헤어지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던데, 저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받아들여요.

(그는 직원들과 정이 너무 많이 들어 아직도 송별회 중이라고 했다. 아울러 주주들과의 이견과, 임기 중에 후임이 거론되던 난감한 전후사정 등에 대해서는 애써 말을 아꼈다. 그 전후사정이란, 그가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모 인사가 대주주인 영안모자 부회장과 후임사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더니, 그리 머지않아 그가 퇴임한 것을 가리킨다)

Q. 이쯤에서 PD시절로 돌아가 보죠. PD 주철환은 다른 프로듀서들과 어떤 다른 점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교육시스템에 들어가 본 PD예요. 교사에서 PD로 다시 교수에서 CEO로 갔으니까요. 교육은 사람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이고, 프로듀서는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니 일치점이 있었어요.

Q. 방송연출 못잖게 책도 많이 쓰셨는데요?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는 그동안 무려 11권의 책을 썼고, 그 책들은 지금도 프로듀서를 지망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PD는 프로그램으로 말한다고 하죠. 하지만 아니에요. 시인은 시로 말해도 되죠. 왜냐? 독자가 시어를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니까요. 하지만 프로듀서는 ‘뽀뽀뽀’부터 노인프로까지 시청자가 열려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기획의도를 가져도 그대로 되지 않죠. 모든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는 다 좋아요. 심지어는 막장드라마도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전달되지는 않죠. 그래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쓰고 싶어지는 거예요.

Q. 기획의도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과 이상의 차이인가요?

맞아요. 예를 들어 기획은 ‘기쁨을 줘야한다’로 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 기쁨이 ‘마음을 끌기보다 눈길을 끄는 것’으로 변질 될 수밖에 없죠. 방송은 자본과 결합되어 있으니까요. 폭력을 예를 들면 예전에는 뺨을 때렸다면 지금은 음식을 얼굴에 던지죠. 분노의 표현이 점점 자극적이 되어가죠. 그렇게 방송이 추락하고 타락하는 것이죠.

Q. 그렇다면 ‘OBS’에서는 자본의 속성, 즉 시청률로부터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나요?

그 점은 OBS가 ‘본의 아니게’ 나를 속인 셈이죠. 처음에 ‘공익적 민영방송’을 한다고 했고, 회사의 슬로건도 ‘희망과 나눔의 빛’이었거든요.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었죠. 그래서 저는 신입사원을 ‘희나리’라 불렀어요. ‘희망, 나눔, 빛’이라는 의미로요. 그런데 금세 시청률이 아닌 시청자 지상주의로 변질되어 버렸죠. 결국 PD의 낭만적 기획의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죠.

Q. 스스로도 그 점을 이제서 인식하신 것인가요? 스스로 쓴 기획의도와 스스로 만든 프로그램이 다르듯, 기업의 슬로건과 실제가 다르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요?

음. 어쩌면 낭만주의자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이 부분에서 ‘본의 아니게’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경인TV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실수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Q. 스스로를 ‘카메라를 쳐다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던데, 카메라는 어떤 세상을 비춰야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은 동물농장이지 않나요? 소, 돼지도 있고 심지어는 바퀴벌레도 있어요. 이 중 어떤 것을 무조건 다 박멸해야하나요. 그걸 인정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면 좋겠어요.

Q.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으신데…?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성서에 나오는 말이 다 맞는 말 같아요. ‘사랑하면 이익이 있다. 또 화난 사람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싶어요. TV뉴스를 보면 모두 화내고 또 화를 낼 만한데, 하지만 다들 좀 차분히 생각하면서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정의를 위해 무조건 싸워야만 하나요? 너무 거칠어요. 거친 말과 거짓말이 너무 많죠. 저는 말이 음악처럼 되었으면 좋겠어요.





Q. 언어에 대단한 감각이 있으신데, 그렇게 언어에 천착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말은 원래 가족이었는데 요즘은 이산가족이 된 것 같아요. ‘두운, 요운, 각운’이 비슷한 말이 많죠. 저는 그런 말을 찾는 것을 ‘언어의 핏줄 찾기’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예전에 개그맨 서경석, 이윤석에게 ‘꿈, 꼴, 꾀, 끼, 깡, 끈’을 가지라고 말했죠. 또 이대에서 신입생들에게 ‘스티븐 코비의 일곱가지 습관’을 얘기하면서는 ‘ㄱ’역으로 시작하는 일곱 가지 단어를 이야기했어요. ‘관찰, 경청, 기억, 기록, 관리, 결합, 극기’와 같은 식이죠. 경인TV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는 ‘오성’을 얘기했는데, ‘개성, 품성, 지성, 근성, 정성’과 같은 것이죠. 어떤 사람은 말장난이라고 싫어하지만 제게는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라고 할 수 있죠.

(최고의 예능 PD답게 그의 말은 현란하고 감각적이었다. 그는 그동안 인터뷰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위에 소개한 조어능력(造語能力) 뿐 아니라, 그가 말을 할 때 줄줄이 따라 나오는 ‘고전, 시, 가사’ 등에 이르는 화려한 인용구들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Q. 이런 언어능력이 예능 PD로서 성공의 요인이 되었나요?

아니요. 나는 그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수업이라면 그것을 달아오르게 하는 기폭제가 있어야 하듯 프로그램 역시 그렇죠. 저는 그래서 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노래는 움직이는 시(詩)라고 할 수 있죠. 시는 언어의 농축액이니까요.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인생이 쓰기 때문이고,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누가 부르면 ‘네’ 라고 대답하듯 노래를 부르면 메시지가 ‘대답’하기 때문이며, 그림은 ‘그린다’고 하는 것은 그리운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듯, 저는 부르고 응답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죠.

(어쩌면 선문답 같은 이 대답 하나에 ‘주철환’이라는 사람의 철학과 특질들이 모두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Q. 현장을 오래 떠나있었는데, 본인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끼’가 넘쳐난다고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아 그건 흐뭇한 지적이에요.

Q. 부정적인 관점에서는 카리스마가 없는 것 같고, 긍정적으로는 성품이 상당히 부드러운 것 같은데요. 이점은 프로듀서로서는 약점이 되지 않나요?

‘퀴즈아카데미’ 시절에 어떤 기자가 문제가 너무 가볍다는 기사를 써서 지적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럼 민주주의의 장점 같은 것을 내야 할까요? 그런 것은 토론프로 같은 곳에서 다뤄야죠. 저는 퀴즈는 문제를 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일부러 대답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때 상대가 ‘참 친절하군요’ 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어찌 보면 저는 솔직히 친절해서 뜬 건지도 몰라요.

Q. PD협회보 인터뷰에 나의 주특기는 약간의 창의력과 약간의 친밀감이라고 했더군요.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행복이죠. 따라하는 것은 기능이구요. 물론 기능도 중요하지만 덜 행복하죠. 이것이 일에 대한 제 철학인데, 그러려면 내 자신이 먼저 작품이 되어야하죠. 주철환이라는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예요. 새롭지 않고 붙박이로 남아있으면 매력이 없어요. 퀴즈아카데미에서도 당시에는 보통 퀴즈에 우승하면 돈과 선물을 줬지만 나는 여행을 보냈죠.

Q. 대중음악에 조예가 상당하시다면서요?

어릴 때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부터 사랑해왔죠. 초등학교 4학년 때 문주란씨와 윤복희씨를 너무 좋아했지만 예능 PD를 하면서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참 미스터리한 일이었죠. MBC에는 추억의 가수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없었거든요. 윤복희씨는 이후 OBS에서 사장으로 만났죠. 그때 ‘나의 우상이 지금 내 앞에 있다니’라며 혼자 행복해했었죠.

Q. 요즘 예능프로에 비판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항상 당대가 옳다고 봐요. 원로 코미디언 한 분이 요즘 애들 기본이 없다며 유재석, 강호동을 안 좋게 얘기 하시기에 이런 얘기 안하셨으면 좋겠다 싶었죠. 또 원로 가수 한 분이 처음에 서태지 노래를 두고 ‘소음이다’라고 하실 때, ‘나중에 후회할 걸’ 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막장 드라마도 마약 남용 같은 것이라면 말리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시청자의 삶을 참혹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Q. 그럼 막장 드라마까지도 나름대로 세태를 반영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는 뜻인가요?

시간이 지나고서도 남는가가 중요하겠죠. 서태지 이후 많은 비슷한 그룹들이 나왔지만 서태지만 남았고, 조용필 이후 많은 남성가수가 나왔지만 조용필만 남았어요, 또 패티김 이후 많은 여류가수가 나왔지만 패티김만 남았죠. 그것이 가치고 진정성일 테죠.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있는데, 지금 너무 고민하면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마음’ 즉 ‘노파심’이죠. 그런 걸 두고 ‘인간정신을 훼손시킨다’와 같은 걱정들은 문자 그대로 오버죠.

Q. 만약 지금 다시 예능 PD로 컴백하신다면 다시 좋은 프로를 만들 자신이 있나요?

지금 나는 무한도전의 김태우 PD를 이길 자신이 없어요. 말하는 것을 보니 기능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생각이 뚜렷해요. 지금 제가 그와 싸워서 어떻게 이겨요.

Q. 그래도 주철환의 생각이 반영된 프로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나요?

차범근 감독도 당대의 선수였지만 지금은 해설가로 충분하죠. 가끔 축구 해설가가 경기 중에 선수들을 많이 지적하지만, 저는 제가 캐스터라면 ‘선생님도 같이 뛰시죠’라고 농담 한 번 하고 싶어요. 주철환이 지금 PD들과 겨루는 것이 바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죠. 패티김이 ‘랩과 댄스’를 할 수 없듯이 말이죠. 다만 ‘55세의 주철환은 경륜으로 만들 수 있는 프로를 30대 PD는 할 수 없는 여건’이라면 다시 할 수 있겠죠.

Q. 대중문화에는 ‘재미만 있지 위로가 없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로의 정의가 뭐죠? 그것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바꾸면 되지 않나요? 저는 이렇게 말해요. ‘비극적으로 살려면 비교만 해라! 즐겁게 살려면 비유를 하라!’ 그래서 지금 저를 어떤 라이벌 PD와 비교하면 둘 중 한 사람은 화가 나겠지만, 대신 ‘그 분은 장미, 나는 프리지아’ 이렇게 비유를 해주면 둘 다 행복하지 않을까요? 따지는 삶은 곤혹스럽죠. 다지는 삶을 살아야죠.

(준비한 듯, 거침없이 답이 흘러 나왔다. 심지어 그는 답을 하는 과정에서 직접 작곡한 ‘모여라 꿈동산’과 ‘퀴즈 아카데미’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문득 저런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짐짓 근엄해야 하는 CEO를 하면서 삶이 꽤나 심심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Q. 상당한 독서를 하신 것 같은데, 평소 얼마나 읽습니까?

많지만, 다 읽은 건 아니에요. 저는 청소년이 독서에 대해 질문하면 서점 가 볼 의향은 있지? 그 중에서 가장 땡기는 걸 읽어! 이렇게 얘기하죠. 핵심 메시지를 자기화하면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아침형 인간’ 같은 책을 다 읽을 필요가 뭐 있어요? 제목을 보고 핵심어 키를 뽑아서 발췌독을 하죠. 이를테면 박경철의 책은 대충보고, 그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는 왜 이렇게 살까? 왜 이런 말을 할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생각보다 독서를 많이 한 것은 아니죠. 대신 11권의 책을 썼으니 많이 쓰긴 한 거네요.

Q. 문장보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는 뜻인가요?

뜬금없는 대답이지만 나는 송도삼절 이것을 누가 정했나?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알고 보니 황진이가 스스로 정했더군요. 그게 매력적이었어요. 그럼 저절로 이어지죠. 그렇다면 주철환은? 이렇게요. 그래서 나도 내 자신으로 수식어로 만들어야겠다고 많이 생각했죠. 재밌게 살고 의미 있게 죽는 사람. 분석보다 해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요.

Q. 분석보다 해석하는 사람이란 무슨 뜻인가요?

이를테면 서태지는 왜 랩을 했을까? 라는 의문을 갖는 거죠. 미국에서 랩은 흑인들이 시작했죠. 불만이 많으니까요. 그 불만을 궁시렁궁시렁하다가 이게 랩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 ‘만적’이 우리나라 랩의 시초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적의 말에도 리듬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죠. 불만을 평화롭게 표현하는 게 랩이라면 홍길동도 랩퍼가 아닐까? 이런 것이 제 방식의 해석이죠.

Q. 진지한 질문으로 돌아가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덕목을 꼽는다면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약간 귀엽고 적당한 돈과 지위와 재미가 있어야하지요. PD에는 3 ‘ㅅ’ 이 필요한데 ‘상상, 설득, 순발력’이죠. 순발력은 시간을 절약해주죠. 누구든 말을 길게 하면 싫어지고 길게 하는 말은 수용자 중심의 사고가 아니죠. 시간 도둑질이에요. PD시절에도 윗사람이 잔소리를 길게 하면 속으로 노래를 부르죠. 나중에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으면 ‘일리가 있네요’ 라고 대답해요. 어떻게 보면 못된 거죠.

Q. 너무 빨리 달려온 만큼 빠른 은퇴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조바심은 없어요. 조만간 기념음반을 낼 생각이에요. 선물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책도 낼 계획이죠. 특강 요청도 많고요.

Q. 다음 다섯 번째로는 어떤 변신을 할 계획인가요?

그건 감히 말할 수 없죠. 건방진 거예요.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지만 말로하면 교만하죠. 나를 원하는 사람의 제안을 받고 싶어요. 이를테면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누군가 요청한다든지.

Q. 지금까지 네 번의 변신이 모두 제안을 받아들인 수동적 변신이었다면 마지막 변신 역시 수동형일까요?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우울할 거라고? 9월을 기다려봐’라고 하셨던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지금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죠. 친구들도 전화를 많이 하고요. 하지만 솔직히 어이가 없죠. 하지만 실제 그렇게 말하면 건방진 거죠. 그래서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9월에는 뭔가 할 거야. 라고 말했죠. 사실은 아직은 아무런 계획도 없어요. 하하하.

Q.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신데 왜 능동적 계획을 세우지 않나요?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 되기 싫어요. 지금도 매우 즐겁고 이 인터뷰도 유쾌해요. 박경철의 프리즘으로 비춘 나는 어떨까? 기대되죠. 예전에는 주철환이 만난 사람 이런 것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대상이 되어 행복하죠.

Q. 주례를 많은 선다고 알려져 있는데 주로 무슨 얘기들을 하시나요?

무지개를 보려면 비가 많이 내려야죠. 직전에 고통이 있는 것이에요. 한데 무지개도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일곱 색이나 있잖아요. 인생 역시 모자이크를 만드는 과정인데 그 과정만 보고 한 마디씩 거들죠. 여기는 검다, 여기는 텅 비었다, 이렇게요. 그러나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얼굴이라면요? 검은 것이 눈이고, 빈 것이 입일 텐데요. 그러니 불만으로만 너무 긴 시간 보내지 마라!고 말하죠.

Q.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친구가 중요하죠. 공자를 존경하는 이유도 논어 1장부터 ‘배워라! 왜 불만을 가져!’ 그리고 2장에는 ‘친구를 사귀어봐. 옛날 친구 연락도 좀 하고!’ 그리고 3장에서는 ‘그래도 불만 있어? 그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너무 화 내지마!’ 이렇게 말하잖아요. OBS에서 친구가 많이 생겼죠. 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들을 사랑해요. 얼마나 좋아요? 화내지 않고. OBS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바로 ‘얼마나 좋아?’ 라는 말이었어요.

Q.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어린아이 같아요. 어린아이의 특징을 가지고 있죠. 결국 순수하지만 유치하다는 말인데 유치한 것 인정해요. 그러나 순수하고 싶죠. 성경에 ‘어린아이의 얼굴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이 얼굴이 동안이 아니라 동심이라고 생각해요.

Q. 하지만 ‘OBS에서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는데요?

내게 괴로움 많았던 시기였던 것 인정해요. 하지만 OBS에서의 기억이 내게 흉터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 적이 있지만 지금 보니 예방주사 자국이었어요. 이제 어떤 전염병에도 건강해진 거죠. 그래서 OBS는 내게는 성장통이었고 통과의례였죠.

Q. 처남인 손석희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요?

선택과 집중에 성공한 사람이죠. 시간의 평등과 효율에 관심이 많고 시선집중과 100분 토론만으로 일주일을 사는 사람이죠. 심지어 내가 대학가요제를 맡았을 때 그렇게 부탁을 해도 진행을 맡아주지 않더군요. 그 결과 1분 뉴스가 100분 토론이 되었으니 100배가 성장한 사람이죠. 그는 읽기를 거부하고 목소리를 냈어요. 그 점에서 존경스러워요.

Q.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면?

나는 눈치 보기로 살아온 인생이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면 인기영합주의자라 하겠지만 그건 아니에요. 진심으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보는 대로 믿는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말을 항상 고민하죠. 누가 내게 이렇게 고민을 상담해요. ‘남들이 내게 건방져 보인대요’라고요. 그럼 저는 ‘너는 건방져’라고 말하죠. 남이 그렇게 말하는 게 걸리면 아예 개의치 말든지 아니면 신경 써서 고치든지 해야죠. 부족할수록 경쟁심이 많아져요. 샘(妬)이 많으면 자기의 샘(泉)이 없어요. 특히 사람에 대해 싫어하되 미워하지 말아야죠. 진부하지만 저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고 싶어요.

Q. 역설적으로 선생님의 이런 부분이 OBS에서 CEO로 적응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기업은 적재, 적소, 적시를 중시하는데 이게 좀 어긋났겠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새도 되고 쥐도 될 순 없었죠.

Q. ‘새도 되고 쥐도 될 수 없었다’는 말은, 노(勞)의 입장도 사(使)의 입장도 모호했다 이런 뜻인가요?

‘이용의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게 얼마나 가슴을 두드리는 가사인가요? 나는 강한 사람은 될 수 있으나 독한 사람을 될 수 없어요.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되게 한 1순위는 사장이죠. 그러니 나를 먼저 자를 것이라고 안심시켰죠. 대주주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학교라고 생각합시다. 저는 경영대학을 다니고 회장님은 교육대학원 공부를 제가 시켜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학교가 아니라 병원이었어요. 더구나 내가 의사로 온 게 아니라 환자로 온 경우거든요. 나중에는 빨리 퇴원해야겠다 싶었고, 더 시간이 지나니까 감옥 같아서 빨리 출소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마치며

인터뷰를 끝내고 원고를 정리하면서도 그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주철환은 ‘꿈꾸는 낭만주의자’, ‘다빈치형 인간’, ‘제너럴 리스트’와 같은 진부한 표현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 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그가 스스로 부른 노랫말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 한 대목이 기나 긴 낭만의 여정에서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인간 주철환’을 표현하기에 그나마 가장 적합한 ‘응답’이 아니었을까. 

[출처]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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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한권의 소설이 대한민국 출판계를 흔들고 있다. 50대 어머니들이 20대 딸에게 이 소설을 선물하고, 그 딸은 책장을 넘기며 눈물을 찍어낸다. 언론은 ‘모성적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를 관통한 작품’이라 말하고, 혹자는 ‘엄마가 뿔났다’와 대비되는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신경숙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열이면 열 같은 내용이다. 어디에도 ‘작가의 말’은 없고, 단지 ‘기자의 글’만 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과연 ‘외딴방’의 작가 신경숙이 단지 ‘위로’만을 던지고 싶었을까? 이번 인터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신경숙씨는 독자의 눈물이 슬픔이 아닌 정화와 치유의 눈물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 전문기자]
 
 1.엄마를 부탁해

에필로그를 빼면 소설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엄마를 잃어버린 딸의 지점이다. 여기서 딸은 ‘너’로 지칭된다. 2장은 ‘그’라 불리는 아들의 지점이다. 그리고 3장은 ‘나’ 바로 엄마의 지점, 4장은 다시 ‘너’ 딸의 지점이다. 처음 책을 펴드는 순간 당혹스러워진다. 1장의 주인공 ‘너’가 꼭 ‘나(독자)’를 지칭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Q. 신작이 또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좋죠. 하지만 두렵죠. 30살에 ‘풍금이 있던 자리’를 썼죠. 초판 3000부를 찍었는데 예상 밖의 반응이었어요. 그때는 더 이상 직장을 알아보지 않아도 되겠다는 기쁨이 생기더군요. 작업실과 넓은 책상을 준 작품이죠. 굉장히 고마운 일이구나 싶었는데, 그것은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파장이 커서 두려워요. 근거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두렵네요. 내 소설이 서사가 반듯하게 진행되는 소설은 아니거든요. 쉽지 않을 수 있는 대목이 있는 소설인데…

Q. ‘엄마를 부탁해’는 1장의 주인공이 ‘너’라고 시작해 독자로서 당혹스럽던데요?

쓰는 ‘나’의 입장에서 ‘너’라고 지칭하고는 거리감을 두고 관찰하는 거죠. 그러나 읽는 사람은 자기에게 말한다고 생각해요. 직접적으로 감정이입이 되는 거죠.

Q. 이 책을 탈고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엄마란 누구에게나 가장 흔하고 깊은 체험일 텐데,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는 것이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요?

단편적으로는 늘 써왔죠. 하지만 ‘엄마’라는 이미지는 늘 장벽처럼 느껴졌어요. ‘어떻게 저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나? 나는 못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 싸우고 있었죠. 엄마라는 보편성이 너무 강해서 어떻게 그것을 새롭게 특수화시킬 수 있는가? 이것을 내 마음속에 해결하는 과정이었죠.

Q.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하셨는데 그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요?

세월과 함께 엄마는 늘 다른 모습으로 변해요. 아까 말한 보편과는 역설적이지만 다양함과 복잡성을 띄고 있어 이걸 어떻게 포착해내나? 고민한 거죠. 게다가 일상에서도 익숙한 것이 늘 밀려나듯 작품도 그렇겠죠.

Q. 그러다가 언제 ‘그것’이 다시 밀고 올라왔나요?

‘어머니’라는 말을 버리니까 저절로 장벽이 무너지더군요. 이기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글을 쓸 때 늘 독립된 인간이라고 느껴요. ‘어머니’ 역시 ‘엄마’로 불리는 순간 의존하는 느낌, 즉 분리가 아닌 하나 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어요.

Q. 어려운데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엄마, 사회적 호칭으로서의 어머니’, 뭐 이런 차이인가요?

엄마는 모든 사람들의 자기 얼굴이죠. 잘 닦아서 보면 나의 근원이고 시작이에요. 그 근원을 찾아가는데 어머니가 아닌 엄마에게 의존해서 가더군요. 저는 이것을 이기심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뛰어넘어야하는 무엇이죠. 예의를 갖추어야 할 이름이고요.

Q. 단순히 ‘엄마라 칭하는 순간 글이 써졌다’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는데요?

글을 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죠. 이런 주제의 글을 쓰는데 ‘어머니를 부탁해’와 ‘엄마를 부탁해’중에 어떤 느낌이 주제에 더 가까울까? 하고요. 모두 엄마를 택하더군요. 처음 어머니로 진행되던 글은 꺼칠꺼칠했었는데, 첫 문장을 ‘엄마를 잃어버린 지 1주일째다’로 고치는 순간 합일과 충만한 느낌이 다가오더군요.

Q. 아까 그것을 이기심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말은 막혀 있다가 ‘엄마’라는 정서에 기대면서 비로소 밀고 나갔다는 의미였나요?

뒤로 밀려나는 순간이 있어요, 예를 들어 6년 전에 쓰다가 장벽에 막혀 더 못쓰고 ‘리진’을 썼죠. 지금까지 작품을 시작하면 그것은 꼭 끝낸다는 것이 습작시를 쓸 때부터 굳어진 습관인데, 이 작품은 시도와 멈추기를 반복했어요.

Q.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그 부분이 이 책의 열쇠 같은데요.

돌이켜보면 내 욕망이 너무 컸죠. 처음에 엄마에게 이 시대를 대표해주는 어머니상을 부여한 거죠. 그런데 사회는 점점 엄마를 해체시켜나가기 때문에 여기에서 갈등이 발생했죠. 엄마는 항상 바뀌어 80년대 엄마와, 90년대 엄마, 그리고 지금 시대의 엄마는 모습이 달라졌는데 여기서 충돌이 있었죠.

Q. 충돌이라면? 시대에 따라 변하는 ‘엄마’의 모습을 단순히 지금 시점의 ‘어머니’로 뭉뚱그려 일반화 할 수가 없었다는 뜻인가요?

이를테면 4장에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이라는 구절은 이미 10년 전에 탄생했어요. 다만 소설 속에 들어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날지 몰랐었죠. 이후 계간지에 1년간 연재하는 사이에 지금 포커스에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Q. 요사이 ‘엄마를 부탁해’는 ‘위로’라는 코드로 부각되고 있는데요? 의식한 결과인가요? (소위 시류에 편승한 기획소설이냐는 뜻이니, 작가에게는 무례한 질문이다. )

개인적으로는 조금 당혹스러워요. 언론에서 말하는 ‘엄마의 위로와 내 소설의 원 뜻이 같은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요. 이 소설은 엄마를 칭송하지 않아요. ‘엄마 역할을 나누어 가져야하는 것이 아닌가?’에 초점이 있어요. ‘엄마를 부탁해’는 그러니 독자가 부탁을 받아야하는 책이에요.

Q. 독자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독자가 부탁을 받아야 하는 책이라면, 작가적 관점은 다른데 있다는 뜻인가요?

작가적 관점에서는 다른 필요한 대목이 있어요. 나는 인간이 자기의 역할을 하게 될 때까지 딛고 일어서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가장 큰 디딤돌이 엄마라고 여겨요, 그런데 ‘우리가 디디는 그 엄마는 과연 행복했을까?’ 라는 근본적 질문이 있어요. 그 차이를 건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것이 굳이 ‘위로’라고 말한다면 ‘엄마를 통해 위로받자’가 아닌 ‘엄마를 위로하자’라는 소설이죠. ‘엄마를 부탁해’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나온 책이죠.

Q. 그렇다면 ‘엄마를 부탁해’ 는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나요?

제가 가장 난감할 때가 사람들이 ‘여기서 울라고 썼다는 말이지?’ 라는 반응을 보일 때였어요. 어떤 작가도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작품 앞에서 항상 처음이죠. 쓸 때는 읽는 사람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난감하죠. 만약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이 슬퍼서만 우는 것은 아닌 정화와 치유의 눈물이기를 바래요. 그래서 ‘이 책을 보고 울란 말이지?’ 이 말이 가장 아파요.

Q. 예술가를 시대의 고통을 동시대의 언어와 형식으로 담는 사람이라 부른다면, 혹시 이 주제를 다루면서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기시지는 않았습니까?

그것은 와 닿지 않는군요.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 담기는 틀을 찾지 못하고 전개되면 시대착오적이 되죠. 언어는 보수적이에요. 영상매체와 비교할 때 이미 보여준 많은 것들을 약간 뒤에서 늦걸음으로 찾아가는 것이 원래 언어의 운명이죠.

Q. 그럼 문학은 늘 패배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인가요?

작가로서 가장 절망스러울 때가 사회의 복잡한 일들을 제때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낄 때죠. 그러니 이미 뒤쳐지며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것이 언어이고요. 영화관에 있으면 2시간 동안 한 세계가 흘러가죠. 하지만 책 읽기는 달라요. 한 페이지가 이해되지 않으면 뒷장으로 갈수가 없죠. 그래서 언어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그러면서도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치는 거죠.

Q. 이 소설의 독특한 양식, 주인공이 ‘너, 그, 너, 나’로 전개되는 형식의 변화들은 현재를 담아낼 수 있는 틀과 형식을 염두에 둔 것인가요?

내가 쓰는 작품들은 어떤 시점이건 현재성을 띠고 ‘지금’을 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 작가겠죠. 문학은 앞서가는 것만은 아니에요. 회의와 통찰을 품은 채 뒤를 돌아다보는 일이기도 하죠.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 우리가 두고 오거나 잊어버리거나 배반한 것들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도 해요. 다만 거슬러 올라가되 당대성을 품은 채 가야죠.

Q. 아까 질문을 던지고 나온 책이라고 하셨는데요, 이 책은 해명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뜻 인가요?

제게 소설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죠. 저는 끝을 완성시켜주지 않을 때가 있어요. 독자가 미완성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보고 완성시키는 과정이죠. 일종의 모호성으로서의 질문 같은 것이에요. 완성은 독자가 시키는 것이고요. 때문에 각자 다르게 읽게 해야 하죠. 한 작품을 열 사람이 각각 다르게 얘기하게 하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죠. 여백이나 공백, 질문 같은 것이 많으면 좋겠죠.

Q. 치열한 작가들은 대개 내면의 ‘트라우마(외상)’가 있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어떤가요?

아마 죽음이었겠죠.

Q. 작가에게 ‘죽음’이란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일까요? 혹은 아름다움일까요?

기찻길 옆에 살아서 기차 때문에 죽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기관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죠. 기관사는 어쩔 수 없어요. 뻔히 보면서도 질주할 수밖에 없죠. 기차가 멈추면 그 지점으로부터 몇 백 미터 가서 서 있게 되죠. 그때의 처참한 모습들. 나를 잘 따라다니던 개도 그랬었죠. 바로 뒤에 따라 왔었는데, 냄새만 남고 형체는 없더군요. 내가자란 시골도 단순히 아름다운 시골의 모습만은 아니었죠. 죽음은 봄이 되면 찾아오죠. 겨울동안 잘 견뎌낸 분들이 봄빛아래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죽음은 참 다양하고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작가들이 죽음에 천착하겠죠.

Q. 작가의 그런 트라우마들이 작품 속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게 되나요?

죽음은 에너지이자 끝이 아닌 시작이죠. 죽음을 알면 곧 생명과 사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예전작품에선 숨기지 않고 드러냈죠. 작품 속에 죽게 한 사람이 많고 그 잔상을 남겼어요. 장편을 쓰면 글을 쓰는 동안 작중인물은 생명을 가지고 사는 인물이지 작품속의 가공인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를 죽게 했을 때 잔상이 강하더군요. 가끔 독자들에게서 ‘왜 죽게 했는가?’ 라는 추궁을 당하기도 하죠.

Q. ‘엄마를 부탁해’에도 그런 ‘죽음’의 여운이 숨겨져 있나요?

이 소설에서는 경계에 둔 것이죠. 엄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가있어요. 4장에서 형식이 깊이 개입되어 있죠. 원래 엄마는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했어요. 주변인으로서만 완성시키려했는데 형식이 형식을 낳았고, 엄마에게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하게 되었죠. 엄마를 딛고 일어선 나로서 엄마에게 드리는 헌사죠.

Q. ‘엄마’에게 스스로를 이야기 할 기회를 주는 것, 이상의 헌사를 할 수는 없었나요?

우리 시대가 엄마로 상징되는 모성을 회복하되 옛날방식이어서는 안되겠죠. 새로운 모습으로서의 ‘회복’이 필요해요. 그래서 아직 못 찾아서 잃어버린 상태로 둔 거죠. 찾거나 못 찾거나 독자가 읽어낼 수도 혹은 의도하지 않은 파장들이 찾아냈을 수도 있죠.

(작가의 말은 지극히 정제되어 있었다. 조심스러웠고 부드러웠다. 작가가 말한 ‘의도하지 않은 파장’이란 이 책이 ‘위로’ 혹은 ‘모성’의 코드라고 세상이 주목하는 해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Q. 앞서 경계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소설 속에서 ‘엄마의 생사를 알 수 없게 처리했다’는 뜻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의미인가요?

현실은 옛날식의 모성을 강화시킬 수 없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아직은 탈신화를 할 시대도 아니죠.

Q. 마지막까지 엄마를 잃어버린 상태로 둔 이유는 ‘부재(不在)’를 강조하기 위한 것 인가요?

물리적 부재뿐 아니라 현재 엄마상의 부재죠. 여기서 엄마상이란 모태 뿐 아니라 살리고 보살피고 태어나는 것은 모두 지녀야 할 것들이죠. 배척 할 것도 아니고요. 엄마라는 말에 의지해서 정당하게 나눠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Q. 엄마를 통해서가 아니라, ‘엄마라는 말에 의지해서’라는 말이 결국 해답이로군요?

사회적 긴장을 깊이 들어가 보면, 모성이 없어서 절망한 사람들, 혹은 읽어버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위로 받았으면, 사회가 모성성을 띠었으면 하죠. 심지어는 이 소설 속의 엄마조차도요. 결국 엄마가 하나로 설명되지 않듯 다양하게 끌고 가며 변주되는 셈이죠.

Q. 그렇다면 우리는 ‘엄마’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요?

누구에게나 다 있어야 하는 거죠. 엄마 뿐 아니라 모든 존재에 있어요. 내가 내게, 네가 내게, 공동체가, 혹은 사회자체가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엄마에게만 지워놓았어요. 이제는 그것을 나누어져야해요.

2. 신경숙을 부탁해


신경숙은 내면이 치열한 작가다. 문체와 형식에 엄격하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한다. 쉽게 읽히는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가 쉽게 읽혀지고, 시대의 ‘요청’에 따라 ‘위로’라는 키워드로 ‘일반화’ 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듯했다.

Q. ‘외딴방’ 이후 지금까지 작품의 색조가 많이 달라졌는데요. 스스로 그 변화를 점검하고 계십니까?

내 안에는 생애가 두 개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시골과 도시, 어두움과 밝음과 같은 두개의 생애요. 어떤 때는 둘이 잘 섞일 때가 있지만 때론 등을 돌릴 때가 있죠. 글을 묘사해나갈 때 그런 걸 느껴요. 때문에 작품을 읽어보면 어느 작품에서는 리얼하고 어떤 부분은 현실에 발을 디디지 않는 느낌이 들 것이고, 때로는 이 둘이 같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겠죠. 하지만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러나 마치 둘이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이죠.

Q. ‘외딴방’의 경우는 상당히 격렬하달까, 치열하달까, 그런 인상을 주지만 ‘바이올렛’이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같은 작품은 평화롭거든요. ‘엄마를 부탁해’는 또 다른 느낌이고요.

그때는 정면으로 대결한다는 느낌으로 쓴 거죠.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써내려간 느낌, 그러나 ‘기차…’와 ‘바이올렛’ 등은 상상 혹은 그런 쪽에 가까운 느낌으로 썼어요.

Q. 초창기 작품들이 ‘날 것의 느낌’이라면 이후에는 상당히 ‘정제된 느낌’인데요?

내 마음은 오히려 거꾸로 같은데요? 저는 새로움이란 이야기 속이 아닌 형식과 문체에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세대는(작가는 63년생이다) 큰 역사에 부딪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죠. 우리 청춘시대의 저항이 적다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4.19, 6.25와 같은 체험은 없는 것이죠. 때문에 새롭게 무엇을 쓴다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만의 문체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작가는 인터뷰어가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의 의도를 금세 간파했다. 그리고 평온하고 담담하게 특유의 어법으로 질문에 답을 했다)

Q.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문체가 있지 않나요?

맞아요. 운동장이나 계단 같은 곳에 표지나 저자 이름조차 없는 책을 누군가 주워서 읽어도 이것은 신경숙의 글이다, 라고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쓰려는 욕구가 강하죠.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표현할 때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문체를 가져야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데 나이 들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사람들이 오히려 소설 안으로 많이 뛰어 들어와요.

Q. 사람들이 뛰어 들어온다는 말은 이제 이야기를 중시한다는 뜻인가요?
사람들 얘기를 내 식으로 간곡하게 쓴 것이라고 할까요? 어떤 이야기건 내 언어로 조명하지 않으면 뭇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야죠. 평범한 생각과 욕망조차 쉽게 추측할 수 없고, 설령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내 소설 속에서 내면이 비치기를 바라는 것이 일관된 내 입장이죠.

Q. 예를 들면요?

단편집 ‘풍금이 있던 자리’의 경우 나를 실험해본 작품이죠. ‘시’인지 ‘소설’인지 경계에 두고 ‘이것이 독자에게 소설로 읽힐까?’ 라고도 생각했죠. 내부적으로 계속하고 있어요. ‘어떤 얘기를 새롭게 읽히도록 어떻게 새롭게 쓰지?’ 그것이 늘 고민이에요.

Q. 신경숙이라는 작가에게 문학이란, 또 소설이란 어떤 것일까요?

언어라는 것은 만질 수도 없고 보관할 수도 없는 것이죠. 그러나 언어는 불멸이에요. ‘바이올렛’을 쓸 때 내 소설에 글로 담긴 삼청동이 지금은 흔적도 없죠. 세상은 매순간 변하고 스쳐지나가지만, 언어로 순간을 포착해놓으면 불멸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순간을 ‘내 언어에 걸려들어 빛을 쬐어 불멸한다’라고 표현하죠. 그것이 내 속의 허무라면 허무를 뚫고 견디고 나가는 방법이죠. 최종적으로는 허무와 격렬하게 싸우는 것이 소설이고요.

Q. 최근의 작품에서는 그 격렬함이 상당히 완화된 것처럼 보이는데요.

제 소설의 기본이 연민에 닿아있어서 이제는 바라고 응시하는 쪽에 가까워졌어요. 배려에 맞춰져 있는 거죠.

Q. 작가로서 누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까?

‘광장’을 쓴 ‘최인훈’ 선생님이 은사였는데, 수업시간에 ‘문학은 깊은 우물에 자기얼굴을 비춰보는 것이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이 섬광처럼 다가왔어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죠. 걷어내고 또 걷어내고 마지막으로 밑바닥에 비친 얼굴 말이에요.

Q. 말씀을 들으니 소설가 신경숙이 진짜 쓰고 싶은 것을 아직 안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너무 즐거운 질문이네요. 못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글을 쓰는 나와 일상의 나가 따로가 아니라 하나죠. 가끔은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분리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나는 점점 일치가 되는 것 같아요. 물방울처럼 솟아났다가 다시 들어가고 또 나왔다가 들어가고, 나도 그 어떤 이야기를 찾아가는 중인 것 같고, 그래서 분명히 있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Q. 그렇다면 그것은 자전적 체험을 형상화 한 것 아닌가요?

극단적인 아름다움과 지극히 관능적인 것일지도 모르죠. 아까 트라우마 질문하셨죠? ‘죽음’이라고 답했는데요, 그것에 가까운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 있어요. 순간순간 작품화되기 이전의 이런 생각과 느낌이 찾아오지만, 그 느낌이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없어지기도 해요. 때로는 쓰고 싶은 마음을 아예 잃어버리기도 하고요.

Q. 그렇다면 그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사라지지 않고 심지어 다른 작품을 쓸 때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 역시 변할 테니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찬란하고 황홀하고, 빛나게 ‘햇빛 속에 있는 빛나는 하얀 말의 갈기 같은 아름다움에 관한 소설’, 첫 장부터 끝 장까지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조금도 빠뜨렸으면 안 되는, 그리고 다 쓸 때쯤이면 그 작품을 다 외고 있을지도 모를 그런 소설이에요. 하지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연금’이 필요하겠죠.

(외딴방을 쓰기 위해 ‘희재 언니’가 10년간을 감금당했다면, ‘엄마를 부탁해’가 나오기까지 ‘엄마’가 연금당했고, 앞으로 정말 쓰고 싶은 ‘무엇’이 지금 그녀의 내면에 갇혀있다고 한다)

Q. 37세에 결혼하셨는데, 늦은 결혼이셨죠? 남편은 어떤 분인가요?

우리는 굉장히 달라요. 그래서 서로에게 동행자로서의 틈을 메우죠. 결핍이 채워지는 느낌을 줘요. 시간이 지날수록 나 혼자였을 때보다 함께 있는 게 좋고 동지처럼 안심이 돼요. 그쪽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는 안 물어봐서 몰라요(웃음). 내 쪽이 너무 많이 의지해서 좀 걱정일 때도 있죠. 저사람 나 없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생긴 것도 같고요.

(요즘 세태의 사랑은 요란하다. 그(그녀)를 목숨보다 사랑한다던 사람들이 금세 돌아서서 악마처럼 저주한다. 사랑하는 것과 반하는 것을 가리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신경숙의 사랑은 내게서‘그의 부재를 두려워함’이 아닌, 그의 편에서 ‘나의 부재를 걱정함’이었다)

Q. 어떻게 16살에 작가가 될 결심을 했나요?

낯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발설했죠. 두려움 때문에요. ‘다른 곳으로 가는구나’ 하는 순간, 주술처럼 스스로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이죠. 이후 도시에서 평탄하게 적응했다면 그저 한번 해본 생각이었을 수 있지만, 16~20살 사이에 오히려 강화되었어요.

Q. 도시에서 적응이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나요?

시골에서 태어나 열다섯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어요. 그리고 스물이 될 때까지는 공장지대에서 보냈죠. 완전히 서로 반대되는 이 공간에서 본 것들이 각인현상처럼 내 마음에 찍혀있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보며 자랐던 농촌에서의 어린시절은 공동체 감각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던 것 같아요. 그곳을 떠나오던 밤 기차안도 또렷이 기억해요. 이 도시에 도착한날 새벽빛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거대한 대우빌딩도요.

Q. 공동체적 감각을 지닌 시골소녀에게 서울은 극도의 소외를 안겨주었군요?

시골의 들판은 넓게 퍼져 있어 먼 곳을 응시하게 했다면 도시의 빌딩은 위로 솟아 있어 나를 내려다보거나 내가 올려봐야 하더군요. 나는 이 두 공간으로부터 위로도 받고 내상을 입기도 했죠. 이 두 가지가 다 내 안에 있어요. 공동체와 개인처럼 서로를 밀어내기도 하고 껴안기도 하면서.

(정읍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신경숙은 열여섯에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의 전기공장에 다니며 산업체 특별학급을 다녔다. 컨베이어벨트 아래 소설을 펼쳐 놓고, 좋아하는 작품들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모조리 베껴 쓰며 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1985년‘문예중앙’에 중편소설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Q. 상경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물론 진학목적 때문이었죠. 아버지가 우리 모두를 교육시켜야한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서울서 처음 1년간 일을 했죠. 4명이 동시에 대학을 다니기도 했으니 상급학교로 갈 때마다 귀로에 섰죠.

Q. 그때 16세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것이었나요?

70년대 시대상황이 어린 눈에 정리는 안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했죠. 치약 하나로 6개월을 버티면서도 월급 받아 시골로 보내는 사람, 노동운동으로 처참히 깨진 사람, 그사이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끼여서 우울하게 변해갔죠.

Q. 그때의 우울이 내면에 고정되었나요? 초기작품 외딴방에 드러난 우울 같은…

사춘기 때 안 봐도 될 것을 많이 봤고, 또 그 나이는 자존심을 많이 다칠 때였죠. 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없었어요. 나중에 대학 때는 내 목소리가 어떤지를 모를 만큼 말을 하지 않았죠. 졸업 후에도 29살까지 계속 일을 했어요. 글 쓰는 사람이 하는 일은 다했죠. 출판사, 잡지사, 학생기자, 심지어는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를 3년 동안 하기도 했죠.

Q. 신경숙의 내면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 ‘외딴방’은 어떤 작품인가요?

작가가 되고 10년 만에 쓴 것이지요.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안에 두고 있었죠. ‘풍금’이나 ‘깊은 슬픔’같은 작품은 언어에 대한 무진장한 집착과 화사한 세계라면, 외딴방은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할 무엇을 눈을 감거나 피하는 느낌으로 10년을 지내면서 부닥친 내적 한계에 대한 일종의 ‘의례’였죠. 그 글을 쓰면서 비로소 치유도 많이 되었어요.

Q. 마지막으로 소설가 신경숙의 꿈이나 목표는 어떤 것 입니까?

사춘기 때의 나는 절실히 꿈이 필요했어요.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문학은 그러니까 글쓰기와 책읽기는 나로 하여금 꿈을 꿀 수 있게 해줬어요. ‘도리스 레싱’의 말처럼 작가는 꿈을 만드는 불사조이기도 하죠. 나는 사인할 때 내 앞에 서 있는 이가 젊을 땐 거침없이 꿈을 이루라고 써줘요. 꿈을 이루라고 해 주는 것이 힘들게 청년시절을 통과하는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내 식의 최선의 위로입니다. 요즘은 내 동년배, 나보다 앞 나이를 사는 분들께도 써 드리죠. 좋게 나이 먹고 싶다는 것도 꿈이고 잘 죽고 싶은 것도 꿈이니까. 나 자신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나도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니까요. 늘 다음 작품이 궁금한 작가이고 싶어요. 지난 시절에 쓴 작품이 아니라 방금 쓴 작품으로 소통되는 현재 진행형의 작가로 존재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내 꿈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한 권의 책,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단 한 문장도 버릴게 없는 허무를 뚫고 나온 내적형식이 완성된 눈부신 책을 쓰는 것이요. 그때는 그게 꼭 소설이 아니라도 상관없겠죠.

마치며

인터뷰어로서가 아닌 독자로서‘한 권의 책,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단 하나도 버릴 게 없는 허무를 뚫고 나온 내적형식이 완성된 눈부신 책’을 만나기 위해, 지금 작가의 내면에 연금되어 있는 ‘그것’을 향해 이 말을 해야겠다.
신경숙을 부탁해! 


[출처]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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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스터디 손주은 대표는 사교육의 ‘레전드(전설)’라 불린다. 그가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손사탐’이란 이름을 날릴 때, 자녀들의 강의 신청을 하려고 엄마들은 전날 밤부터 학원 앞에 줄을 섰다. 그것은 전설의 1막에 불과했다. 2000년 학원 강의를 온라인으로 가지고 들어간 뒤 7년 만에 시가총액 1조원을 돌파했다. 그런 그가 최근 한 신문을 통해 “교대생과 사범대생(교직과목 이수자)만 교사가 되는 것은 산업사회 시대의 기득권 보호 장치”라며 공교육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일을 계기로 구설에 올랐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사석에서 한 말이었다”고 했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솔직한 속내를 들어보고 싶었다.

첫인상은 ‘열정가’에다 놀랄 만큼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내내 파격이었다. 집무실의 ‘뽀샵’ 처리한 ‘손사탐’ 대형 브로마이드와, 인터뷰어 앞의 ‘손 대표’ 사이에는 엄청난 부조화가 있었다. 그가 과외강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색달랐다.





 

 


Q.학생 때 결혼하셨던데요.

사실은 과외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첫사랑 때문이었어요. 424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만난 여자가 있었죠. 가난한 이대생이었는데 등록금을 대주려고 한 달에 여섯 명 그룹 과외지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대학 1학년 때인 81년에 헤어졌죠. 그 충격으로 헤매다 학사경고를 받았어요. 촉수가 날카로울 때였죠.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지만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어요. 3학년 때 또 학사경고를 받았죠. 절망의 나락으로 빠졌고 군으로 도망갔죠. 서울대 보낸 아들놈이 그리 되었으니 아버지는 충격으로 말씀도 하지 못하셨죠. 제대하고 복학하자 결혼을 시키더군요.

Q. ‘대책 없는 결혼’의 책임은 손 대표가 져야 했나 보군요?

그런 셈이죠.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그때 어머니들과 죽이 맞았죠. 먹고살려니 일반 강사로는 안 되겠고 ‘객단가’를 높이려고 당시로서는 유례 없는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는 고3 입시지도를 시작했죠. 처음 가르쳤던 10명 중에 9명이 대학에 갔어요. 다음 해에는 4배의 수업료를 받았죠. 2년 동안 그때 돈으로 2억원 정도를 벌었어요. 그렇게 2년이 지난 뒤 유학을 고민해 보았는데 준비도 안 돼 있고 유학을 다녀와도 자리 잡을 자신이 없더군요. 다시 쉬운 선택을 했어요.

Q. 그냥 ‘과외를 천직으로 삼자’ 뭐 이런 거였나요?

사시를 보기로 했어요. 그해 3월 공부를 시작했는데 형법 책을 펼치니 머리가 아파요. 1주 만에 포기하고 신림동 당구장에 출근했죠. 와이프에게는 사시 준비를 한다고 했으니까요.

Q. 사시 준비라기보다는 도피였군요? 과외선생을 하기에는 그렇고, 다른 것은 자신이 없고, 뭔가는 하는 척해야 하고….

맞아요. 5월 8일 사시 1차 시험을 치르고 나니 9일에 어머니들이 찾아와 ‘놀면 뭐하냐’ 그러면서 다시 과외를 부탁하더군요. 그 길로 다시 과외를 시작했고, 90년에 양재동에 학원을 열었죠. 91년부터 학원을 본격적으로 키워가려는데 사고가 났죠.

(손 대표의 세 가족 교통사고를 말한다. 아들은 현장에서, 딸은 9개월 후 세상을 떠나지만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내는 몇 달 후 극적으로 회복됐다.)

Q.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군요?

인생에 더 이상 손해볼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들이 죽고 석 달이 힘들었죠. 자살 충동이 계속 생겼어요. 그런데 딸마저 가고 나니 갑자기 담담해지더군요. 딸아이가 새벽 4시 반에 사망했는데 11시에 장례를 치르고, 그날 오후 6시에 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그 후로 본격적인 강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어쩌면 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주당 70시간의 수업을 했으니까요. 그러다 96년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Q.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사이 딸과 아들 하나씩을 더 낳았지만, 그때까지 늘 먼저 간 아이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죠. 어느 날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득하더군요. 돈은 좀 벌었지만 내겐 잃은 것만 있더군요. 더구나 이 일(과외)조차 목적의식이 아니라, 단지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라 마음 한편으로 원죄의식이 있었어요.





Q. ‘원죄의식’이란 교육을 상업적으로 접근했다는 뜻인가요?

과외는 사회 불평등을 심화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돈 많이 받고 뒤에 있는 아이를 밀어 올리면 결국 누군가는 뒤로 밀려나죠. 사교육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악’이죠. 이것을 정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거죠.

Q. 철학적 고민에 빠진 셈인데, 고민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나요?

어머니의 소망이 목사이니 신학공부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내 삶의 내용이 목사는 아닌 것 같았고, 과외와 학원만으로 30억원은 넘게 벌었으니 그것을 종잣돈 삼아 사립학교라도 하나 세울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되겠더군요.

Q. 과외로 번 돈으로 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신선한 발상인데요?

사교육에서 더럽게 번 돈으로 공교육에 투자하면 남 보기에 그림은 나오죠. 하지만 진짜 헌신이 아닌 ‘폼으로 사립학교 이사장을 하는 것은 얄팍한 수작이다. 내가 정말 많이 타락했구나’ 하는 반성이 들더군요.

Q. 그래서 장고 끝에 다시 학원으로 간 건가요?

잘할 수 있는 게 뭐냐? 자문해 보니 결국 강의더군요. 하지만 지금처럼 고액의 프리미엄 수업이 아니라 과목당 3만원짜리 소위 ‘막 단가’ 강의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Q. 박리다매로 ‘고액 강의로 인한 불평등도 해소하고 돈은 돈대로 벌 수 있다’ 뭐 이런 결론이셨군요. 그래서 ‘깨끗한 장사’는 어떻게 시작을 했나요?

당시 내가 운영하던 학원(진리와 자유학원)에서 월 5000만~6000만원의 수입이 나왔지만 포기했죠. 대신 대중강의를 위해 학원가를 찾아가 다른 학원에 나를 ‘강사로 써 달라’ 하고 원서를 들이밀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죠. 그때 원장들에게 ‘당신이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실패가 될 것임을 기억하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죠.

Q. 그래도 결국 학원 강사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지인에게 부탁해 강남의 한 학원을 소개받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97년 1월 2일 첫 대중강의를 시작했어요. 광고지 10만 장을 뿌리고 ‘손선생 통합사회’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죠. 그때 다섯 개 반을 모집했는데 겨우 3개 반에 총 8명의 학생이 등록하더군요. 그래도 확신했어요. 목숨을 걸고 강의했죠. 7월이 되니 2000명이 등록했어요. 8월이 되니 등록을 위해 전날부터 어머니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더군요. 그때부터 ‘손사탐’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요.

Q. 소위 재벌급 강사가 된 건데, 왜 굳이 메가스터디를 설립하셨나요?

97년부터 고민을 시작했어요. 지난 삶과 새 출발에 대한 고민을 하다 2000년에 기업을 만들었죠. 진리와 자유학원, 친구가 하던 다른 학원, 또 다른 학원 3개를 합병해 10년 안에 매출 1000억원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그게 안 되면 ‘10년이 되는 2007년에 다시 고민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2006년에 1000억원을 달성했죠.

Q. 일련의 과정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로군요. 강의로 이름을 날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온라인 기업을 설립하겠다는….

그건 아니에요. 첫째는 그 이전 삶에 대한 반성이었고, 둘째는 앞으로는 ‘리더가 되려면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었고, 세 번째는 기득권을 버리고 사회적 부채의식을 덜겠다는 목적이었죠. 저에게 지금 자긍심이 하나 있다면 온라인 교육으로 인해 사교육의 불평등을 상당히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죠.

Q. 현재로 돌아가죠. 온라인 교육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주에 풀로 대중강의를 하면 72시간을 할 수 있었죠. 1년에 40억원을 벌었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죠. ‘마흔 넘어서도 이 짓을 하면 내 인생은 망하는 것이다. 평생 이 짓을 하고 살면 돈 벌어 뭐가 남나’라고 고민하던 중에, 98년께 케이블 TV를 보며 영감을 얻었죠.

Q. 케이블 TV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계획한 일은 아니었군요?

맞아요. 그때 ‘학교와 학원이 집으로 오는 시대가 열린다’ 생각하고, 유니텔에서 실험으로 음성파일 강의를 시작했죠. 생각보다 많이 듣더군요. 그래서 2000년 4월에 전자공학을 하던 동생을 끌어들여 5월에 오피스텔에서 회사설립을 준비했어요.

(그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인생의 주요 곡절과 고비의 순간들의 날짜와 시간을 모두 정확하게 기억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놀라운 기억력을 ‘굳이’ 드러내곤 했다. 뛰어난 강사 출신 CEO의 ‘의도된’ 자질인지, 감출 수 없는 천재성의 현현(顯現)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시험 잘 치르게 하는 것이 참교육이다

Q.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교육 업체’라는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나요?

우리가 아무리 사교육의 불평등을 줄여도, 시대가 사교육을 때리는 원색적 비난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않죠. 사회는 선과 악을 통째로 구분하는 법이죠.

Q. 같은 사교육이라도 고액 과외와 온라인 교육은 다른데 도매금으로 취급을 받아서 억울하다는 뜻인가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저는 입시 중심 사교육은 미래 전망이 없다고 봐요. 우리가 가는 길도 그게 아니고요. 입시 사교육은 10년 내 급격히 약화될 것이 확실해요.

Q. 사교육 1위 기업이 사교육 쇠퇴론을 주장하는 건가요?

우리나라 사교육의 팽창은 압축성장의 결과물이었죠. 과거에는 판잣집에 비비고 살면서도 자식을 대학 보내는 것이 신분상승의 가장 쉬운 길이었어요. 부모들이 이런 경험치를 가지고 있죠. 이런 경험들이 사교육을 키웠지만 이제 우리 사회의 압축성장은 끝났죠. 신분 상승, 계층 변화가 약해져요. 이 때문에 앞으로는 교육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요.

Q. 그것은 오히려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면서 교육비를 부담할 수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 혹은 SKY와 비SKY로 신분 세습이 이루어지는 탓이 아닐까요?

냉정하게 보죠. 지금 특목고, SKY대 졸업하면 별 볼일 있나요? 이 아이들이 애를 낳으면 교육에 투자하지 않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별 볼일 없거든요. 미래사회는 오히려 개인의 창의성, 변화감지력, 부모 재산 이런 것이 변수가 되겠죠. 그럼 대학은 중요도가 떨어지죠. 그 때문에 현재 메가스터디 사업도 10년 내에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생교육, 실버교육과 같은 새로운 분야로 나가지 못하면 무너지겠죠.

Q. 대학의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뜻은 어떤 의미인가요?

나는 장기적으로 대학이 유니버시티로 존재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 않아요. 교육 수혜자인 학생은 대학이나 교수와 같은 교육권력이 만든 시스템에 놀아나지 않게 되겠죠. 지금은 무조건 자기 대학 강의만 들어야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겠죠. 온라인 강의가 제공되면 학생이 타 대학의 좋은 강의를 골라 듣게 되고 그럼 학교의 틀이 무너지는 거죠.

Q. 너무 앞서 나간 말씀 같은데, 그럼 손 대표께서는 교육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육은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죠.

Q. 파격적인 말씀인데요?

사회가 정직하지 못해요. 서울대 사범대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교육이 왜곡되었죠. 교육근본주의는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죠. 하지만 자연주의적 관점은 피교육자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이 후자에 박수를 치죠. 하지만 전자가 없는 후자는 없어요. 예전에는 서당에서 천자문, 사자소학을 배우고 그 과정에 인지력이 확대되곤 했지만, 지금의 열린 교육은 솔직히 엉망이죠.

Q. 열린 교육보다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 참교육이라는 말씀인가요?

시험을 잘 치르는 기술이 아니라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는 지식을 고스란히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죠. 한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 값싸게 평가해요.

Q. 그건 사교육 업체의 대표로서의 인식입니까? 아니면 소신입니까?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데요. 한국과 일본이 이번 WBC 결승에서 연봉이 100배나 되는 메이저리거를 이긴 것은 주입식 훈련의 반복에 의해 안정적 수비 포메이션이 나오고 안정적 타격을 하기 때문이었죠. 한국과 일본은 주입식 교육의 대표거든요. 한데 자율야구와 자율교육은 어느 날은 잘되고 어느 날은 엉망이 되죠. 우리의 입시결과주의가 일부 문제는 있지만 그로 인한 반복식 교육은 의미가 커요.

Q. 오히려 그 때문에 열심히 배워도 우리 학생들이 창의력이 없다는 평을 듣지 않습니까?

천만에요. 주입식 교육은 우리 국가 능력의 기초였어요. 한국야구도 이렇게 된 것 아니겠어요. 저는 김성근 감독을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주입식 야구를 반복하고 거기다 정신력을 가미하는 거죠.

Q. 그것이 향후 우리나라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평가하지 않나요?

10년 전 소니TV가 있는 집은 부자였죠. 지금 소니TV 있는 집은 돈이 없어 TV를 못 바꾼 집이죠. 10년 만에 삼성이 소니를 이겼는데 70년대 후반 서울대 공대생들이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든 것 아닌가요?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주입식 교육의 대표선수들이었죠.

Q. 글쎄요. 압축교육이 과거 우리를 앞서간 나라를 따라잡는 데는 유용했겠지만 그런 교육으로 앞서갈 수 있을까요?

우리 교육은 엄청나게 기초가 튼튼했죠. 오히려 그래서 가장 앞설 수 있었어요. 교육이 기본적 토대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말만 그럴듯하지 교육이 아니에요. 메가스터디를 두고 시험기계를 양성한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말은 우리 강의 한 번 들어보고 하면 좋겠어요. 우리 강의가 입이 쩍쩍 벌어지게 전달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교육이란 학생들의 사고를 확장시켜 주는 것이고, 그러려면 좋은 선생이 필요하죠.

Q. 아까 말씀하신 주입식 입시교육과 사고 확장은 모순 아닌가요?

입시는 단순 암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에요. 그 과정에서 앎의 기쁨과 쾌감을 느끼는 아이들만 성공해요. 수능 문제는 엄청난 사고를 요구해요. 사고력 시험이죠. 언론도 수능 문제 한번 풀어보고 ‘수능식 반복교육’이라는 기사를 써야죠.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교육이 아니에요. 오히려 정치논리로 악용하는 거죠.

Q. 교육논쟁이 정치논리로 악용하는 것이라고요?

대학만 해도 보세요. 지금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면 사교육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대학들이 떠들고 다니잖아요.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실정으로는 안 된다던 사람들이 지원금 따먹으려고 태도를 싹 바꾼 거죠.

Q. 손 대표 말대로라면 주입식에서 성공한 10%를 제외한 나머지 90%의 아이들은 버리나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은 현재 지배구도에서 만들어진 교묘한 논리예요. 과연 이 문제에 정직한 고민을 했을까요? 전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90%를 향한 대체교육을 고민해야죠. 그 90%가 실패한, 경험과 상처가 좋은 성과가 되도록 말이죠.

Q. 공부에서 탈락하는 아이들의 상처가 곧 좋은 경험이라는 것은 좀 억지 같은데요?

동창회를 가면 성공한 친구들의 공통점이 있죠. 첫째 부류는 야간자습하는 것이 행복했던 아이들이죠. 둘째 부류는 야간자습이 지겨워 미친 아이들이고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에너지가 넘쳐 학교 담을 넘죠. 그러면 꼭 따라 넘어가는 녀석이 있어요. 그때 먼저 넘어간 녀석이 ‘야, 이왕 나왔으니 중국집에 가자’ 그러고는 짬뽕 국물과 배갈을 시켜 먹고는 ‘에라 내일 쥐어터지더라도 집에 가자’고 해 버리죠. 그런데 그런 녀석들은 다 성공했더군요. 따라 넘어간 애들과 따라 마신 애들이 성공하지 못했고요. 중요한 것은 에너지예요. 부드럽고 조화로운 에너지든 다이내믹한 에너지든 에너지가 커야 성공하죠.

Q. 지금의 학교 교육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체제로는 안 돼요. 교사들이 안전한 밥그릇을 유지하려는 관행부터 깨야 해요. 수업시간표가 교실에 붙어 있는 게 말이 되나요? 사교육은 듣고 싶은 과목을 듣고 싶은 선생에게 듣지만 공교육은 싫건 좋건 정해진 선생님이 들락거리죠. 사교육을 지나치게 욕하는 것은 공교육의 면죄부를 얻기 위한 작당이죠.

Q. 강남 아이들이 최고의 성적을 내는 것은 역시 훌륭한 사교육 때문인가요?

천만에요. 강남이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전국에서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인데 그런 부모를 둔 아이의 공부 유전자가 뛰어나겠죠. 거기에 경제적 뒷받침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데 강남·서초·송파의 입시 결과가 그만큼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단순 숫자로 보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건에 비해 오히려 성과가 가장 낮은 곳이 이곳이에요.

Q. 투입된 노력이나 여건에 비해 성과가 나쁘다는 뜻인가요?

소득과 부모의 학벌 수준을 놓고 봤을 때 강남 1%와 지방 1%가 같지 않죠. 나도 강남 1%에 못 들어요. 그런 부모 수준에 사교육비 수준을 생각하면 강남의 입시 결과는 허무하죠. 그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교육의 효과가 있느냐는 회의가 들게 돼요. 냉정하게 볼 때 사교육이 입시에 미치는 영향은 많아야 25%이고, 결국 학생의 의지가 있느냐가 75%죠. 사교육이 입시 격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논리로 만들어진 허구죠.

Q. 사교육도 공교육도 답이 아니라 단순히 학생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뜻인가요?

그것이 가장 본질적이죠. 우리나라 사교육은 정말 엄청난 자기파괴적 성격을 가지고 있죠. 나도 영업하고 살지만 우리는 억지 수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교육 수요에 대응하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그나마 깨끗한 수준을 유지한다고 생각해요.

Q. 지금 이 말은 메가스터디 대표로서 한 치의 사업적 고려 없이 한 건가요?

나는 철학적 가치를 배반할 만큼 타락하진 않았어요.

Q. 마무리를 해야겠네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천재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때 월반해 5년 만에 졸업했어요. 내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의식중에 숨어 있죠. 그때 초등학교 담임이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죠. 아이들은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죠.

Q.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깨끗한 장사꾼으로 남고 싶어요. 이게 가장 큰 소망이죠. 사교육이라 교육자 대접을 받을 수는 없죠. 메가스터디가 아무리 깨끗이 하려 해도 오물을 던지겠죠.

Q. 솔직히 이렇게 달려온 인생이 행복하십니까?

나는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은 근거 없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시작과 끝이 자기 의지로 되지 않는데, 행복이란 인간이 너무나 행복하지 않아 만들어 낸 형이상학적 추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죠. 즉 ‘행복을 위해 산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에요. 저는 대신 ‘몰입의 평화와 성취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고 믿어요.

Q. 독특한 철학적 가치이군요.

아이들을 잃는 큰 사고 뒤 미련이 사라진 탓일 수도 있죠. 약간의 해탈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마치며

손주은 대표는 지금도 오전 4시에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일과는 살인적이지만 강의를 마친 강사들과 강의를 두고 밤새 격론을 벌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학 박사인 누이와 몇 시간씩 신학논쟁을 하기도 한다. 인터뷰를 마친 오후 11시에 손 대표와 콩나물국밥집에 들어섰더니, 주인이 단골이라고 반색하며 파전 한 접시를 서비스로 올려 준다. 그는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체력은 황소 같고 넘쳐나는 에너지는 화산 같다. 다른 이들이 그 열정에 공감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거침없는 그의 말을 다듬으며, 원고를 정리하는 이 순간에도 인터뷰에 달릴 댓글들이 걱정스러워지니 말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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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연간 400 회 내외의 강연을 다닌다. 거의 매일 한 두번꼴로 강연이 있는 셈이다. 이에대해 누구는 부럽다고 하고 누구는 힘들겠다고 한다. 부럽다는 사람들은 강연료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힘들겠다는 사람들은 물리적인 고생이 많을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 탓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부러울 것도 없고, 힘든 일도 아니다. 먼저 필자가 하는 강연의 절반 이상은 기업이 아닌 대학이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수익면에서는 소위 영양가가 별로 없다. 힘들다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행위가 수직적으로 ‘가르치는’것이라면 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다.

 

그야말로 강연 한 번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수평적으로 청중의 눈을 마주보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위로와 격려가 된다. 특히 그것이 가능성이 충만한 어린 학생들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라면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스폰지처럼 무엇이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어린학생들에게 경험과 생각을 들려 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멋지고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강연중에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 나라를 이끄는 이가 되고, 늙어 노쇠한 내 몸을 돌봐 줄 의사나 간호사가 되고, 또 내가 살아가는 집을 고쳐 줄 기술자가 되어서, 내가 미래의 어느시점에 그들을 만났을 때, 그때 내 강연을 기억해 주는 행복한 그림 같은 것이다. 그럴때면 저절로 흥분이 되고 때론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할 수록 힘이 나고 즐거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는 대개 ‘독서나 글쓰기’에 대한 주제,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자기 계발적 성격의 주제, 혹은 필자의 책을 주제로 한 ‘사랑이나 생명’을 주제로 한 주제가 주류를 이룬다. 학생들을 상대로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미래’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야기를 들어준다. 강연을 마치면 그렇게 들어주는 아이들이 예쁘고 때론 고맙기도 하다. 특히 강연이 끝나고 이어지는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한 명 용기를 내서 먼저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아예 봇물이 터진다. 그게 아이들이다.

 

질문들은 정말 기발하다. 그럴 때는 좋은 강연자보다 좋은 질문의 힘이 크다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강연 주제는 변질되고 자유로운 토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요즘 아이들이 활기차고 적극적이다. 한동안 질의 응답식 대화가 이어지고, 마무리가 될 즈음에 내가 하는 말은 늘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단 읽기는 읽되 잘 읽으라고 한다. 책은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중에 부실한 부분을 지우고 새로운 지식을 입력하는 ‘메모리 반도체’ 같은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면 기존의 지식중에 진부한 지식이 지워진다. 그 위에 새로운 지식이 덧입혀 지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사유를 만나고, 지식을 얻게되면 기존의 지식체계에 수정이 가해지고 덧칠되거나 가필 수정이 되기 때문이다.

 

독서란 그렇게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가진 지식 체계를 계속 바꾸고 수정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측면에서 책읽기란 나를 연마하는 것이다. 때문에 좋은 책이 아닌 나쁜 책(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은 나를 정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갖추어진 나의 지성에 오물을 덧씌우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다.

 

진부하지만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빠트리지 않는 이야기가 ‘철학의 중요성’이다. 철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많지만, 청소년기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사고’, 아니 ‘사유’의 방법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정보사회가 되면 서 지식은 점점 세분화되고 깊어졌다. 마치 둥치가 굵은 나무에서 수백의 가지가 드리우듯 지식은 깊어졌지만, 대신 가지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남에게 배우는 공부는 있지만, 스스로 익히는 공부가 사라졌다. 그 결과 ‘통섭’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수 많은 가지들이 결국은 한 갈래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리고 합쳐서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통섭’의 사유다. 하지만 ‘통섭’이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령과 역기를 들듯 ‘통섭’을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식스팩 근육처럼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자기 자리에서 한발 물러나 그 자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객관적 사유’라 부를 때, 그 객관화가 잘 이루어진 것을 가리켜 비로소 ‘통섭’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통섭,직관,통찰’을 기르는 가장 좋은 학습이 바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철학은 문자 그대로 사유의 학문이다. 자연과학의 실험실이 약품과 기구에 의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유의 실험실은 머릿속에 있고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실험실은 그가 사용하기에 따라 우주를 창조하기도 하고, 또 세상을 가로지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철학은 그런 사유의 실험실이다. 하지만 철학은 자연과학의 실험처럼 결과를 두고 평 할 수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형이고 때론 실체가 없다.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저 너머에 가상의 존재자를 두고, 그것을 탐구하던 ‘형이상학’에서 부터, 자연에서 과학을 발견하고 그 바탕을 중시하는 ‘유물론’까지 철학은 때로는 구부러지고 때로는 지워지고, 때로는 전복된다. 하지만 그렇게 이른 물길의 끝이 어딘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또 내일의 철학은 오늘의 철학과 다르다. 과학은 앞선 연구자의 업적위에 새로운 연구자가 벽돌을 쌓아 나가는 것이지만 철학은 순식간에 선각자의 사유가 뒤집어지거나, 분열하고 다시 합체되기도 한다. 인간의 사유란 경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철학자의 사유가 누적 될 수록 철학에 접근하는 길은 점점 멀어진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에서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철학은 여정의 학문이다. 철학에의 입문은 그 여정을 공부하는 것이다. 한데 이 여정은 쉽게 발을 들이기가 어렵다. 학교에서는 ‘4 원소’, ‘데카르트’, ‘칸트’의 이름을 가르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길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강의 이름만 왼다고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모레가 되는 이치를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늘 아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좋은 철학 입문서를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 필자가 추천하는 책은 대개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이진경의 철학의 모험’,‘버트런트 러셀의 서양 철학사’ 이 세 권이다. 우선 고등학생 정도에서 읽기 쉬운 책이 ‘소피의 세계’다. 이 책은 우화처럼 구성되어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왜 그런 사유가 가능한지를 친절하게 이끌어 간다. 필자가 읽어본 책중에서 학생들에게 추천 할만한 가장 이상적인 철학 입문서다, 즐겁게 읽힌다. 성인들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명저라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입문자에게 ‘안동림의 이 한장의 명반’이 손꼽히는것 처럼, 철학 입문에도 이 책이 레퍼런스라고 여겨진다.

그 다음 순서는 ‘철학의 모험’이다. 이 책은 독자로서 자랑스러워해도 좋은 책이고 잘 정돈된 책이다. 여기에는 물론 저자 이진경의 내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수의 일장’은 고요하면서도 무게가 있다. 쉽게 재밌게 풀어가면서도 철학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아주 잘 정돈되어 있다.

이 두 책을 읽었다면 다음 순서는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다. ‘철학사’는 철학 입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 자체가 사유라면, 철학사는 ‘사유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철학사를 건너뛰고 철학을 공부한다면 비약된 의식처럼 허술하고 기괴한 모형이 된다. 왜 당대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철학의 주제가 변주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철학은 왜 등장했는지, 시대별로 연대기를 구성하며 그 자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물길을 보여준다. 그래서 철학사는 물에 손을 담그는 책은 아닐지언정, 물길을 보여주는 ‘부감도'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세 권의 책을 모두 읽으면 청소년기의 철학공부로서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여겨진다.

 
그 다음부터는 좀더 세분화해서 읽고 싶은 철학자를 골라 ‘니체’건, ‘헤겔’이건 하나하나 산을 오르면 된다. 그것은 성인기의 몫이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이 세 권의 책은 철학교육, 아니 나아가서는 사유하기, 통섭교육의 제 일순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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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난 시간과 융합된 로맨스 소설은 처음이라 그런지 매우 독특함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히, 이 책은 내게 약간 과학적인 느낌을 주었다. 
  


현재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4차원의 존재를 밝혀냈고 또 하나의 변수가 시 

간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시간에 대해 미래라는 한방향으로 등속직선운동 하 

며 가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이와 달리 헨리는 과거,미래와 현재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오 

고 갈 수있다. 여기서 헨리는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시간여행을 하는데반해, 그의 딸은 약 

간의 자기의지대로의 시간여행을 할수 있다는점을 미루어 볼때, 이는 3차원의 인간이 시간 

을 조종할 수 있는 4차원 인간으로 점점 진화되어감을 직시할수 있고, 헨리와 딸 앨바는 진 

화 되어가는 과정 중의 인간임을 알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느끼면서, 헨리라는 진화 과 

정속의 인간과 평생을 인내와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클레어와의 사랑이야기는 매우 흥미진 

진하면서 독특하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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