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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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이런 소설을 읽으면 주변의 온도가 2도쯤 더 올라간 것만 같다. 천선란 작가의 새 장편소설 <나인>. 식물들의 목소리를 듣게된 주인공 나인이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게된 뒤, 친구들과 함께 실종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재미있고 다정하고 정의로운 소설.

남들과 다른 존재. 우리 모두는 남과 조금씩 다른데, 유독 다름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각자의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 고유함으로 인정하고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바람결에 흔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잎새들처럼 서로를 해치지 않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식물이 주가 되는 이야기여서 더 좋았다. 덕분에 파란 빛의 생명력이 소설 곳곳에 숨겨져있는 듯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따뜻하다. 돌아오지 못할만큼 멀리 가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나 어서 되돌아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개의 파랑>도 무척 재미있었는데, <나인>은 더 좋다. 다정하라. 함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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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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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꼽는 올해 최고의 책.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인데, 이 책은 그 이상이었다. 몇 주 동안 이 책을 아껴 읽으면서 글을 쓰고 싶어졌고, 공연을 보고 싶어졌고, 급기야는 공연을 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 책은 여럿 만나보았으나 두 번째, 세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 책으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차오르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오래오래 가방 속에 지니고 다녔던,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의 산문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이 책은 저자가 프랑스와 한국에서 만난 예술과 사람,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공연은 무대에 올려진 바로 그 순간에만 실재하는 것. 꼭 같은 공연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이 유일무이함이, 순간성이 공연예술의 매력이다. 독자로서는 영영 볼 수 없는 공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도 왜 나는 속수무책으로 이 책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결국 책 속에 담긴 것들은 공연을 매개로 저자가 엿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 유예되고 간직되었던‘ 이야기이기에.

예술에 대한 곡진한 사랑이 드러나는 책 속 문장들은 오랜 시간 공들여 쓰여졌을 것만 같다. 나는 이런 문장들을 만나길 바라며 그동안 수많은 책들을 읽어온 것이 아닐까. 고요히 아름다웠다. 오래도록 듣고 싶은 백색소음처럼. ‘관객으로서 나는 언제나, 걸려 넘어지고 틈으로 추락해버릴 아름다움을 좇아 극장에 간다.‘(55p), ‘만일 당신이 춤을 춘다면 나는 가만히 앉은 몸으로도 그 춤을 따라 추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155p).

이 책에 대해서 더 잘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러려고 할수록 미끄러지는 듯하다. 몇 주 동안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책을 꺼내 보이며 이런 책은 당신도 읽어야 한다고 추천의 말을 쏟아냈는데, 들은 이들은 전부 감탄하며 책 제목을 소중히 적어갔다.

책 자체의 만듦새도 정말 아름답다. 가름끈도 내지 디자인도 사진도(작가님이 직접 찍으셨다니!) 감탄 그 자체. 다만 너무 열심히 읽었는지 뽀얀 커버에 손때가 묻어버렸는데 이 또한 멋이겠으나 소장용으로 한 권 더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 그나저나 작가님 북토크 놓치신 분들, 아침달 계정에서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한때 공연을 보러다니는 것이 삶의 이유였던 시기가 있었고, 고등학생 때 연극을 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매일 저녁 극장 객석에 앉아있었던 때의 기억이 자주 떠올랐다. 아비뇽 연극제에서 아무 연극이나 끌리는대로 보러다녔던 기억, 고등학생때 대본 분석하고 무대에 올랐던 기억들도.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공연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삶은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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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 1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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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림 -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
존 버거.이브 버거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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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은 우아하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말년의 존 버거가 화가인 아들 이브 버거와 나눈 편지들 <어떤 그림>.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림과 사진과 철학과 인생을 넘나드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글 묶음인데도 무척 깊이있고 맵시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토록 서로를 존중하며 깊이있는 예술적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놀랍고 아름답다.

가장 좋았던 문장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이브의 견해다.
-저는 모두가 거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요. 다리와 저, 이 간극까지 포함해서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요.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나야 했다.˝

산다는 것은 나를 세상에 표현하는 일. 언어로, 그림으로,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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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뇌의 작동 원리와 내면 세계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이 담긴 책. 저자는 심오한 정신적 깊이는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뇌는 매 순간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내는 창조 기관일 뿐이라고. 우리는 보통 내면을 깊이 있는 심오한 정신 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여긴다. 내면에서는 의식이 미처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통상적인 이론들을 뒤엎고, 내면세계는 물론이고 생각과 감정이 허구라고 말한다. 인간의 뇌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생각, 신념, 행동을 지어낼 뿐이라고.



저자는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지각적 실험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간다. 생각은 지각의 확대이기에, 우리가 지각적 정보를 한 번에 하나씩 받아들이면서도 마치 전체를 동시에 지각하는 것처럼 꾸며내듯 생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저자가 감정은 허구임을 증명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기분을 끄집어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리적 상태를 해석하기 위해 감정의 이름을 붙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거나, 호흡이 가빠지는 신체적 증상은 상황적 맥락에 따라 희열로도 해석될 수 있고 분노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이렇게 우리는 신체적 기반을 바탕으로 감정을 해석해내는데 그 기반이라는 것이 상당히 빈약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양 극단의 감정이 공존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돌이켜본다면 결국 감정이라는 것 또한 이름 붙이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이 해석하기 나름이라니. 꽤 수긍이 가는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해 무척 재미있었다. 체스나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 인공지능이 가장 지능적으로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신념이나 지식을 넣는게 아닌 수많은 경기를 통해 경험으로 배우게 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시는 인간의 정신작용, 그러니까 생각이나 행동이 불변하는 특정 신념 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즉흥성에서 나온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결국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은 상상력과 창조력이 그 근간이라는 마무리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 없이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이었다. 우리의 뇌는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하는지, 내면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끝없이 궁금해하는 사람으로서 며칠간 눈에 불을 켜고 읽었던 책.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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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의 말 - 중단된 열정,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마르그리트 뒤라스 외 지음, 장소미 옮김 / 마음산책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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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터뷰집. 소설 <연인>의 성공 이후 뒤라스는 약 2년간 이탈리아인 기자 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뒤라스의 수많은 인터뷰들 중에서도 유독 이 인터뷰가 주목받는 이유는 뒤라스와 토레 사이의 밀도 높은 친밀감이 돋보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뒤라스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극히 뒤라스다운 인터뷰‘라고.



인터뷰를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뒤라스의 완고하고도 직설적인 면모다. 겉치레따윈 없는 그 당당함이란! 애두르지 않고 거침없는 그의 태도에서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동시대 유명인들을 언급하면서도 가차없이 솔직하게 의견을 밝히는 그. 자신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물론 예외는 없다. 그가 스스로의 결핍마저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모습에는 뭐랄까, 위엄이 서려있다.



뒤라스의 언어로 그의 예술관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이번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큰 재미다. 그는 글을 쓰는 것으로 삶의 사건들을 마주한다. ‘짓누르는 침묵을 말하게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삶에서 느낀 것들을 복원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글을 써나간다는 뒤라스. 그는 비정형의 사건들을 다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뒤라스식 스타일로 담아낸다. 영화와 연극에 대한 이야기까지 만나볼 수 있어 질적으로도 무척 흡족했던 인터뷰집.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상호작용에 따라 재미와 깊이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점에서 인터뷰는 참 매력적인 장르! 신뢰하는 인터뷰어들을 두고 남몰래 그들의 기사를 찾아보는 인터뷰 덕후로서, <뒤라스의 말> 완전 대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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