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를 닮은 소녀
에릭 포스네스 한센 지음, 손화수 옮김 / 잔(도서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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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사자를 닮은 소녀>. 말 그대로 사자를 닮은, 황금빛 털로 뒤덮인 채 태어난 소녀 에바의 이야기. 전형적인 성장소설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소설이다. 사실 우리 모두 남들과 ‘다른‘ 점 하나쯤은 있지 않나.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보통의 사람들과는 눈에 띌 만큼 ‘다른‘ 용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곱절은 더 위험하고 고독해진 에바의 삶은 ‘다름‘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준다.



전반부인 에바의 탄생기는 3인칭 시점으로, 후반부인 성장기는 1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에바가 과거를 회상하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중반부부터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시간을 고립되어 살아온 에바. 반대로 밖에 나갈 때는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화려한 옷을 걸치는 에바. 이처럼 아이러니로 가득한 생활 속에서 에바는 다른 청소년기 아이들과 다름없는 몸과 마음의 혼란을 겪어낸다. 자아상이 확립되는 바로 그 시기의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다뤄져 흥미롭다. 스스로와 타인과 세상을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를 반복하며 성장해나가는 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일인데도 에바는 너무나 처절하게 이 시기를 지난다.



사실은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다 읽고 나서도 감정을 정리하기 힘들었다. 에바가 다음 행보로서 그녀 삶의 운명을 직접 결정하기 직전에 상징적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데,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읽으며 에바와 동질감을 쌓아왔던터라 그녀가 느꼈을 감정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 결말 역시 기존의 성장소설과는 달리 아주 놀랍고도 색다르구나 싶다. 그러니까 결말을 통해 내가 받은 느낌은, 적지 않은 시간 진행되는 연극을 아주 몰입해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대 위에 거울이 등장해 나의 본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의 그 깨어남과 비슷했다.



노르웨이의 작가 에릭 포스네스 한센의 장편소설 <사자를 닮은 소녀>. 작년에 잔 출판사에서 출간된 로이 야콥센의 <보이지 않는 것들>도 노르웨이 작가의 소설이었는데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북유럽 작가와 작품들에게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냉엄하면서도 남다른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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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앙스 - 성동혁 산문집
성동혁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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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읽을수록 자꾸만 투명한 구 모양의 오브제가 떠올랐던 산문집. 성동혁 시인의 <뉘앙스>. 시인의 문장은 슬프고 맑지만 결코 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기분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느낄 법한 바로 그런 기분.



성동혁 시인의 시집을 오랜시간 아껴 읽어왔다. <6>과 <아네모네>. 첫 시집에 적힌 ‘이곳이 나의 예배당입니다‘라는 시인의 말을 오래도록 중얼거리던 날들도 있었다. <아네모네>는 오래도록 침대 맡을 지켜주었던 시집이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각별하게 여기는 시인이나 시집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밀한 모습을 들키는 것처럼 여겨져 말을 줄이는 편인데, 희한하게 주변에 성동혁 시인을 아끼는 이들이 많아 그의 시 이야기는 종종 나누곤 했었다. 산문집은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아 두고두고 아껴 읽자 싶었었는데 참지 못하고 그만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읽고 나니 문장들로 엮인 글 한 편 한 편이 마치 시와 같아서 미루지 않고 읽어보기를 잘했다 싶다.



수사를 늘이지 않아도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는 문장들. 이 책에 담긴 슬픔은 아주 투명하고 맑은 것, 이 책에 담긴 다정함은 아주 조심스럽고 따뜻한 것.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소중한 마음을 전달받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장은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담기엔 너무 협소하다.‘는 문장을, 그 속에 담긴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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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술라이커 저우아드 지음, 신소희 옮김 / 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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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수전 손택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을 넘나든다. 기대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 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스물 두 살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약 4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살아남은 술라이커 저우어드는 두 왕국을 넘나드는 자신의 여정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그려낸다. 처음 증상을 느꼈을 때부터 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 끝까지 자신을 지탱했던 글쓰기와 사랑, 이후 건강의 왕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자동차 여행까지. 이 책은 한 인간이 자신을 이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자신을 처음부터 하나씩 받아들여나가는 이야기다.

질병과 고통만큼 삶의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한 번 이것과 마주한 사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회복은 익숙한 내 모습을 영원히 버리고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는 생존확률 35퍼센트를 뚫고 살아남았으나 꿈과 사랑, 정체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찾아나가야했다. 세상은 병에서 살아남은 이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전과는 영영 달라진 몸과 면역체계를 이끌고 다시 처음부터 자립해야하는 건 전부 자기 자신의 몫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투병 칼럼을 읽고 편지를 보낸 이들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보통 사람보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니까 새로운 그녀만의 속도로. 내밀한 이야기를 자기연민 없이 그러나 솔직하고 용감하게 드러내는 저자의 태도는 무척 매력적이다. 한치 앞을 모르는 여정을 떠나는 저자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았다.

삶은 계속된다. 병을 진단 받은 뒤에도, 화학 치료를 받은 뒤에도, 성공적으로 치료가 끝난 뒤에도. 그게 무엇이든, 병이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는 술라이커 저우어드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통해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고 삶을 고통에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설령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할지라도.

​+ 원제 ‘Between Two Kingdoms‘도 좋지만, 한국어 제목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도 정말 좋다.

++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근황을 찾아보다가 병의 재발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근황을 알리며 프리다 칼로의 ‘나는 나의 뮤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다. 내가 더 잘 알고 싶은 주제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와 나의 몸과 질병과 고통과 삶. 용기와 희망. 그녀가 남긴 모든 문장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인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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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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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이 몰아닥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기 혼돈과 싸우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었던 이가 있다.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가 30여년간 몸과 마음을 다해 수집해온 어류 표본들이 갑작스러운 지진 때문에, 삶의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전부 박살났을 때에도 그는 주저없이 다시 일어난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는 혼돈 속에서 다시 설 수 있었나. 이 책의 저자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바로 그 의문을 풀고자 한다. 그녀 삶의 혼돈으로부터 바로서고자,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며. 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기이자 회고록이다.



이 책은 과학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철학적이며 자기 성찰적이다. 저자는 여러가지 소재를 한데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데, 끈질기게 혼돈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녀는 그 답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알려줄 수 있다는 듯 그의 삶을 파고들어간다. 이 책의 묘미는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반전에 있다. 영원히 꺾이지 않을 것만 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불굴의 의지 이면의 것들이 조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다른 독자분들로부터 독서의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 스포일러는 접어두고, 저자의 깨달음과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하는 생각들을 적어볼까 한다. 내려놓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그저 모든 것이 흘러가도록 두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가장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자연이 우리 삶에 혼돈을 내리꽂는다면 그 혼돈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 가장 빨리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가 모래폭풍속에 자신을 내맡기기로 선택했듯이.



흥미로운 이야기, 인생에 대한 성찰, 매혹적인 구조. 한 번 읽고 다시 들춰보았을 때 더 매력적이었던 책. (표지 디자인 너 무 아 름 다 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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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잡기 - 노년의 정원사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
마크 헤이머 지음, 황유원 옮김 / 카라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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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게 된다. 때마침 읽고 있었던 책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시인이자 정원사인 마크 헤이머가 황혼을 넘긴 나이에 쓴 첫번째 에세이 <두더지 잡기>. 책 속에는 저자가 20여년간 생계를 책임져준 두더지 잡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유, 그동안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이 간결한 문장으로 담겨있다.

자연 속에서 사는게 아니라 자연을 관람하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를 모른다. 자연은 치열하고도 냉혹하게 계절과 섭리에 맞게 흘러가는 것. 자연 속에서 일하는 사람인 저자는 기꺼이 자연과 함께 흘러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벨벳 천 같은 가죽을 두른 채 고독하게 생활하는 두더지에 대해서, 맑은 정신으로 생각들은 그저 지나가게 둔 채 내면을 자연으로 채우는 자신에 대해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저자가 열 여덟살때 홈리스가 되어 자연 속을 걸어다녔다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파편적으로만 소개되지만 자연 속에서 순간만을 사는 저자의 태도가 시작된 시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연과 두더지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의식의 상태로,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을 확보하며, 순간순간을 살 것. 그러니까 나와 타인을,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살 것. 기본에 충실하며 매 순간을 살아있음이라는 경이로 가득 채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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