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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을 채워라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평점 :
히라노 게이치로의 <공백을 채워라>. 그의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나와는 연이 없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주인공 쓰치야 데쓰오가 죽은지 3년만에 살아돌아오면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데쓰오는 3년 전 자기 죽음의 이유를 밝히려 함과 동시에 자신이 죽어있었던 3년 동안 생긴 관계의 구멍을 메우려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환생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남긴 공백에 주목하고 있다.
첫 400페이지까지는 술술 넘어간다. 전반부는 ‘데쓰오는 어떻게 죽었는가’라는 미스테리를 푸는데 할애된다. 하지만 이 책의 포인트는 데쓰오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깨닫게 된 이후에 있다. 미스테리 소설인줄 알았는데 제법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이하 스포)
가장 흥미로웠고 내게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분인’ 이야기였다. 인간은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지 않고 누구를 만나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다른 여러개의 모습(‘분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인물의 말을 빌려 혼자일 때조차 그 전에 관계했던 사람과의 분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아내와 있을 때의 다쓰오, 아이와 있을 때의 다쓰오, 직장에서의 다쓰오는 제각각 다른 모습이지만 결국 다 다쓰오 자신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분인이 다른 분인을 용납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나를 없애고 싶었던’ 다쓰오 역시 그런 경우였다. 죽애고 싶었던게 아니라 없애고 싶었다고. 이게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기에 다쓰오 이야기가 남일 같지 않았다.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사라지고 싶다, 한심한 나를 죽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없애고 싶다’와 같은 생각은 매일 그 빈도가 다를 뿐 항상 하는 나이기에 더욱.
이 책은 죽음보다 삶이 낫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지는 않지만 대신 ‘죽음 뒤에도 살아남는 것’에 이야기한다. 유전자, 기억 그런 것들. 그러나 꼭 무언가가 남아도 남지 않아도.. 모든 존재는 살고 또 죽는다.
의외의 발견. 기대없이 읽은 책이 생각보다 좋을 때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