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멧
피오나 모즐리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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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원형의 이야기에 영감이 덧붙여져 폭발적으로 쓰여지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소설 <엘멧>. 오래 전 잉글랜드에 존재했던 켈트 왕국 ‘엘멧’이 소설의 제목인데, 이 지역은 현재도 황야로 가득한 곳이라고.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는 스물 아홉에 <엘멧>이라는 첫 소설을 완성한다. 외딴 숲 속에 자신들만의 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는 아빠와 아들, 딸의 이야기로 거칠고 폭발적이며, 외롭고 쓸쓸하고, 서정적이다.



이 소설은 순수하고 야생적인 무엇인가가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파멸되는, 그리하여 폭발해버리는 이야기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빠 존, 딸 캐시, 아들 다니엘은 그들만의 견고한 세계에 속해있다. 거인과 같은 힘으로 가족을 지키는 존과 숲에서 가장 자유로운, 견고한 내면을 지닌 캐시와 예민하고 섬세한 마음을 지닌 다니엘은 숲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일상은 숲 소유권을 비롯한 규범들과 폭력 사건 등에 의해 침범당한다. 마치 남들과 다른 이들의 삶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듯 무참히 파괴당한다. 목가적인 분위기의 전반부가 무색하게 후반부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소설은 가족들 중 가장 차분하고 섬세한 다니엘의 시점에서 화목했던 과거와 홀로 도망중인 현재가 교차 진행된다. 그래서인지 읽어나갈수록 점점 가속도가 붙어 예정된 비극 속으로 소용돌이치듯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거칠게 느껴지는 이야기 전개와는 달리 서정적인 문장들도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결말! 영웅의 탄생 프리퀄 영화라고 해도 믿을만한, 아주 잔혹하고도 강렬한 결말이었다. 기이한 에너지가 몰아치는 소설. 다 읽고 나니 부커상 최종 후보작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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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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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뉴욕이라는 도시와 고독이라는 감정, 그리고 고독을 예술로 표현한 예술가들에 대한 책이다. 뉴욕을 배경으로 사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얽어가는 저자의 글솜씨가 놀랍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적 감수성을 건드리는 문장들. 독창적인 스타일로 우아하게 쓰여진 글이라는 점에서 리베카 솔닛이 떠오르지만 솔닛과는 다르다. 확실한 건 내가 가장 열광하는 종류의 글쓰기라는 것.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이라면 이 책의 앞부분만 들춰보아도 저자가 말하는 고독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고층 빌딩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면서도 가끔은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 세기말 뉴욕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고독을 감각했을 이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예술 속에서 고독을 표현해냈다. 에드워드 호퍼, 앤디 워홀, 헨리 다거,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저자는 고독과 닿아있는 이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고독이라는 단어로 섣불리 한계를 긋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의 언어로 소개되는 예술가들은 그 면면을 전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입체적이다. 다양한 삶, 다양한 고독, 그리고 규정될 수 없는 그 외의 이야기들. 덕분에 뉴욕과 고독이라는 테마 아래 시작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잠들기 전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내리읽어서인지 나에게는 이 책이 더욱 특별하고 내밀하게 여겨진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고독을 정확하게 공감해 주는 이를 만난 기분이었다. 나는 많은 순간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이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면 어떻게든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너무나 다르지만 너무나 비슷한 도시의 사람들이 어쩐지 애틋하다. 자신의 고독을 내보이며 멋진 이야기를 선물해 준 올리비아 랭을 생각하며, 언젠가 나에게도 나의 고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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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4권)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세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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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믹을 직접 겪고 나니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메시지가 남달리 다가온다. 이미 20년 전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적극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시리즈다. 이 책이 출간된지 20년이 다 되었다는 사실에 한 번, 시리즈가 네 권이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이 책은 전 세계의 인구를 100명으로 본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지 아주 직관적이고 간단한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 이웃에 대해, 환경에 대해, 빈부격차에 대해, 결국에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세계 인구가 78억으로 늘어난 2021년에도 이 책의 메시지는 유효하다. 지구는 모두의 것이고,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을 때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것. 이 메시지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 편‘에 이어 ‘이웃 편‘, ‘환경 편‘, ‘부자 편‘에서는 전문적인 통계자료와 에세이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이해인 수녀, 한비야 작가의 에세이가 실린 ‘이웃 편‘이다. ‘자기가 행복한지 모른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는 문장과 ‘남을 돕고, 가진 것을 나누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특히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웃편‘에는 ‘사람편‘의 뒷이야기와 통계자료도 수록되어있어 시리즈 중 가장 두툼하다. 그러나 그만큼 얻어갈 것들이 많아 이 시리즈 중 한 권만 권하자면 나는 ‘이웃편‘을 고르겠다.)



급속도로 악화되어가는 지구의 여러 문제들(환경, 질병, 가난 등)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행함으로써 문제가 진행되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놀랍지만 그 시작은 매일 충분히 행복함을 느끼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환경을 생각하는 것에서부터다. 지금 읽어도 멈칫하게 되는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시리즈. 다시 ‘사람 편‘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당신은 오늘 하루가 설레었나요? 오늘 밤, 눈을 감으며 당신은 괜찮은 하루였다고 느낄 것 같았나요?˝ 이 물음에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어쩌면 매일 이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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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내 일 - 일 잘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내 직업을 발견했을까?
이다혜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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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일자리가 줄어들고 프리랜서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곳곳에서 접한다. 주변에서는 ‘나는 n잡러다‘하는 선언도 심상치 않게 들려온다. 이럴 때일수록 나의 불안함은 하늘을 뚫고 저 우주 멀리까지 치솟는다. 대체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이 드넓은 세상에 내 적성에 꼭 맞지는 않더라도 대충 비슷한 일자리 하나쯤은 있을 텐데. 도대체 스스로의 업은 어떻게 만들어가야하는 걸까? 청소년기에 진작 해야했을 진로 고민을 엉뚱한 시점에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했었는데 ‘진로 고민을 평생 하게 될 줄은 몰랐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멋진 인터뷰집이 나왔다. (아, 평생!) 이다혜 작가와 일곱 명의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내일을 위한 내 일>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일곱 명의 여성들이 인터뷰이로 등장한다. 영화감독 윤가은, 배구 선수 양효진, 바리스타 전주연, 소설가 정세랑, 경영인 엄윤미, 고인류학자 이상희,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다양한 진로만큼이나 다양한 여정을 거쳐온 이들이다. 일곱 편의 인터뷰를 읽으며 결국 정해진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과 인터뷰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때그때의 최선을 다하며 일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여기서 방점은 그때그때의 최선을 다하는 것에 있다. 어쨌든 한 걸음씩 계속해서 나아가는게 중요한 것이다. 또, 일곱 인터뷰이들의 일에 대한 태도가 공익을 향해 확장되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인터뷰이들이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분들이어서일까. 진로 고민뿐만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만드는 인터뷰들이다.



동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더 듣고 싶다. <내일을 위한 내 일>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산뜻하게 읽히는 책이다. 아, 서문에 따르면 철저한 원칙(인터뷰 비용 및 시간, ‘최선을 다한 집중으로 정돈된 표현‘) 하에 인터뷰가 진행되었다고! 인터뷰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후루룩 읽고 마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읽는다는 건 인터뷰이의 ‘살아온 모든 날들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니까.





+ 함께 읽어볼 것들 :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90년대생 여성 10명의 인터뷰집, 아직 읽기 전이지만 라인업만 봐도 느껴지는 명작의 기운), <언니들이 있다>(각자의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열 두명의 ‘언니‘들 인터뷰집), 카카오 페이지 ‘멋있으면 다 언니‘(단행본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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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합니다
라오양의 부엉이 지음, 하진이 옮김 / 다연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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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아무래도 지금 난 등짝 한 대 맞아야 할 것 같다’는 불안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필요할 법한 책이다. 제목만 보면 힐링 에세이인가 싶겠지만 사실 이 책은 냉정하고 현실적인 ‘인생 조언집’이다. 독자들을 호되게 혼내고 타이르는 저자의 열정이 듬뿍 느껴지는.



처음에는 책 제목과 저자의 이름만 보고 미심쩍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읽어보니 다양한 사연들에 저자가 답변해주는 형식으로 쓰여진 덕인지 예능을 보는 것 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어 안도감도 들었고. 물론 온갖 문제들에 대한 저자의 답변도 꽤 진정성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인생의 태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살다보면 학업, 일, 연애 등 온갖 분야에서 문제가 끊임없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무조건 괜찮다고 위로하고 보는게 아니라,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런데 겁먹을 일은 아니라고 명료하게 조언한다. 이를테면 인생의 문제들은 맞춤 제작형이니 혼자 해결해야만 하지만, 차근차근 눈 앞에 닥친 일들을 마주하다보면 금세 지나간다는 말처럼.



엉킨 실타래처럼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 상황에 빠진 이들이 다시 자세를 똑바로 하는데 힘을 보태줄 법한 책이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답하겠지. 그리고 행복은 일상의 순간들로부터 온다. 1월 1일의 결심이 무색하게 흐트러져버린 지금, 다시 일상을 만드는데 큰 대륙의 조언자가 도움이 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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